본문 바로가기
위암 치료 일지

위암 치료 일지 11.

by 까마귀마을 2024. 4. 10.

11.요양병원에서의 2주일 및 아산병원 첫 외래진료
23년 12월 26일. 
동탄 아들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08 :30분쯤 ㅇ요양병원에 도착하여 접수를 하고 이어 코로나 pcr 검사를 받았다. 결과가 나오는 오후까지 병원이 제공한 침대가 딸린 대기실에서 쉬며 점심은 본죽에서 삼계죽을 사와 아내와 둘이서 먹었다. 오후 2시쯤 검사결과 음성으로 확인되어 316호실로 입원 하였다.내가 입실한 병실은 6인실로 서울의 대형병원 다인실과는 달리 넓고 깨끗하였으며 병원 분위기는 밝고 병원 특유의 차가움이 덜 느껴졌고 맞이하는 직원들의 표정도 밝고 친절하여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입실한 316호실은 1실은 비워져 있는것 같았으며  입원실의 5명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이것이 판단의 기준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 나이가 적은 나이가 아니란걸 느끼고 있다. 
 
이곳 요양병원에서 첫밤을 보내었다. 
지난 밤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잠자리가 바뀐것도 한 이유이지만 아직도 병원의 침대가 익숙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아서 인것 같다. 몇번이나 깨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몸은 특별히 아픈데는 없지만 복강경을 위해 뚫은 배의 상처가 여전히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 어제저녁 오늘아침 두끼의 식사를 했다. 첫 외래진료가 있는 1월 9일 까지 2주간은 죽만 먹어야 되고  한끼 먹는 양이 적으니 찬은 단백질 위주의 소화가 쉬운 부드러운 음식 이어야 되며 자주 먹어야 하는 시기다. 간식으로는 죽이 한 그릇, 요구르트, 두유가  따로 나왔다. 간식으로 나온 죽에는 물김치 외에는 나중에 먹을 찬이 따로 없었고 죽은 시간이 지나자 식고 불어서 먹기에 힘들었다. 두끼를 먹고 느낀점은 수술을 한 아산병원보다 너무 성의 없이 제공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두끼를 먹어보고 앞으로 계속 찬이 이렇게 나올거라고 예상 할수는 없지만 왠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어찌됐든 한달은 있어야 하는데....
 
이곳 요양병원에서 두번째 아침이다. 지난 밤은 그런데로 잠을 좀 잔것 같다. 이는 몸과 마음이 비록 짧은 이틀이지만 하루 하루 여기 환경에 적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어나 물울 조금 먹고 20여분 간 걷기운동을 하고 나니 07시가 조금 지나자 아침밥이 나왔다. 어제 아들과의 통화에서 병원의 부식이 많이 부실하다는 대화를 나누었는데 아들이 병원측에다 단백질량을 늘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하더니 확실히 부식이 조금은 달라진것 같다.
내가 입원한 병동에는 5-60명의 요양을 받는 많은 남,여 환자가 있었지만 암 환자는 내가 입실해 있는 316호실의 5명 뿐인것 같았으며 대부분의 환자는 무릎, 허리등 재활을 요하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의 노인들이었고 남자 보다는 여자가 더 많았다. 암 전문 요양병원으로 알고 입원 했지만 암 환자만을 전문으로 하는 요양병원이라기 보다는 암 환자를 비롯하여 주로 노인 요양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 이었다. 그리고 거동이 어려운 환자들을 간병하는 간병인이 무척 많다는 느낌이고 간병인들은 우리나라 사람은 한명도 없고 모두가 조선족 이라는 것이 특이하였다. 
특히 식사가 일상회복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위암 환자는 나를 포함하여 2사람 뿐인것 같았으며 병원에서 제공되는 식사가 암 환자 위주가 아니고 일반 환자 위주로 식사가 제공 되다보니 특별히 먹는 음식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나 같은 위암 환자에게는 찬이 맞지 않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병동에는 재활을 요하는 환자도 더러 보였지만 내가 입원한 3층 병동에는 실내 자전거 2대를 제외하고는 재활을 돕는 특별한 운동 시설이나 운동기구는 없었다. 다른 병동에 재활운동실이 따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내가 입원한 병동은 없었든 것이 확실하다. 병실 복도를 걷는 것 말고는 내가 할수 있는 운동은 없었다. 우선 걷기 운동이라도 시간을 정하여 꾸준히 할수 있도록 운동 시간표를 짰다. 힘이 들고 어려워도 내가 이겨내고 감당해야 할 일이다. 걷기 운동을 하면서 젊은 시절의 추억이 새롭다. 새벽마다  해운대 백사장을 가로질러 동백섬을 조깅하며 떠오르는 아침해에 하루를 시작했던 싱싱하고 젊은던 날들을...
그땐 아마도 그런 날들이 영원 할줄 알았는데 참으로 인생이란 허무하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내 몸하나 간수할 기력도, 물 한모금 내 마음대로 벌컥 마실수 있는 몸이 아니다. 이렇게 늙어가며 조금씩 무너지고 쇠약해지는 것이 우리 인생이고 생명 가진 것들의 숙명 인가보다. 그러다 어느날 나는 한줌의 재로 아니 원래 나를 형성했던 자연속의 한 원소로 돌아 갈것이다.  봄이면 비가 되어 세상을 적시고, 가을이면 한줄기 바람이 되어 내 사랑 했던 가족들의 뺨을 살포시 간지르며 가만히 속삭일 것이다 나는 영원히 죽지않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겨울이면 하얀 눈으로 내려 불평등하고 모순이 가득찬 이 세상을 하얗게 덮을 것이다. 나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오래 오래 아쉬움으로, 안타까움으로, 그리움으로,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람은 지나친 욕심일까?
내가 입원해있는 6인실에 오늘 한사람이 퇴원하고 두사람이 새로 입실했다. 한사람은 페암으로 수술이 어려워 방사선과 항암치료를 병행한다 하고, 한사람은 11월초에 위암수술을 받고 집에서 요양하며 일상회복을 꾀해서나 여의치 않아 다시 입원 했다고 하였다. 두사람 모두 5-60대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암은 노화가 주 원인이라 하는데 왜 이리 젊은 사람들이 많이 걸리고 있는지?
 
24년 12월 30일.
오늘로 수술을 한지 꼭 열흘이 되는 날이다. 수술로 인한 상처부위는 흉터는 있지만 많이 아물었다. 오늘쯤 목욕을 했으면 하였는데 손목에 링거 바늘이 붙어있어 내일로 미루어야 했다.
여기 병원생활도 같은 병실의 환우들과도 어울리며 나름 그런대로 적응이 되어가고 있지만 병원의 식사가 너무 부실하다. 몇 번이나 부식이 부실하니 개선해 달라고 애기를 했지만 한  두끼 정도 개선이 되는가 하면 이내 전과 같거나 비슷한 메뉴가 연달아 올라오고 맛도 너무 없었다. 이러다가는 암으로 죽는것이 아니라 영양부족으로 죽을수 있다는 생각이다. 계속 부식의 개선이 없다면 퇴원을 심각히 고려 해 보아야 할것같다. 만일 퇴원을 하면 집에서 요양을 해야 할지? 다른 요양병원을 알아봐야 할지? 걱정이다.
 
아침 일찍 샤워를 했다. 아산병원 입원 하기전 집에서 하고 열흘 만이다. 아직 복강경 흉터가 아물지 않아 조심스럽기도 하여 비눗칠만 하고 간단하게 씼었다..
오늘 아침밥 역시 어제 그대로의 메뉴에 죽도 오늘 아침 끓인게 아니고 미리 끓여 놓을걸 그대로 내어온것 같았다. 국도 지금 내가 먹어서는 안되는 콩나물국이고, 오늘 아침은 미역국이 나왔다. 아마 위암환자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지 않고 위가 건강한 환자들을 위해 요리한 음식을 그대로 제공하고 있는것 같았다. 아무래도 퇴원을 하여야 할것같다.
아침죽을 먹고 가족 단톡방에 1월 9일 아산 병원 첫 외래진료를 보고 퇴원 하겠다고 퇴원 의사를 올렸다
간호사들이 변을 봐는지 여기 입원하는 날부터 계속적으로 물어왔다. 다행히 어제 편한 상태로 변을 보았다. 먹은게 없어서 인지 5일만에 보는 변이다. 혹시나 변비 일까봐 약을 주었지만 기분에 쉽게 볼수 있을것 같아 약은 먹지 않았다. 오후에는 아들이 면회를 왔다.
저녁에 체중을 제어보니 61k로 요양병원 입원할때보다 2k가 더 빠졌다, 아직 체중이 본격적으로 빠질때도 아닌데 수술전보다 4k 이상이 빠졌다. 이제부터 쇠약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나 보다. 두렵다. 길고 긴 싸움이 되겠지만 이 싸움에서 이기고 꼭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23년 12월 31일.
내인생 영원히 기억될 계묘년이 오늘로 저문다. 76년 인생에서 최대의 시련과 충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다른날 처럼 날이 새고 또 하루가 지나간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는 걷기운동이 오늘은 힘에 부친다. 기력이 쇠해졌다는 증거다. 앞으로 계속 체중이 더 빠지고 기력이 더 딸릴텐데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근육운동을 못한지 보름쯤 되었다. 불과 보름만에 가슴은 물론 다리도 팔도 보기에 안스러울 정도로 여위고 가늘어 졌다. 참으로 서럽고 슬프다. 타고 나길 부모로 부터 건강한 몸을  물려받지 못한 나는 젊어서는 늘 감기를 달고 살았으나 40대 이후 부터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고 나이 들어서는 걷기와 근육운동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은 덕분으로 수십년간 일정하게 체중을 유지하여 왔고 70이 훨신 넘은 나이에도 항상 꼿꼿하며 보기에 좋은 체형을 유지하여 왔다.  다시 예전의 몸으로 돌아갈수 있을런지.....
매일 틈나는 대로 걷기 운동은 계속하고 있다. 휴대폰의 엡으로 확인해보니 하루 7-8천보는 걷는 것으로 숫자가 나와 있었다.
 
24년 1월 1일.
갑진년 새해 아침이다. 새해를 병원에서 맞다니...
일평생 한번도 없었던 일이고 생각도 해보지 못한일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수도 없이 많은 병원에서 나처럼 병실 침상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수 많은 환우들이 있을거다.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빌곳은 신 뿐이니...하느님! 부디 저와 이 시간 병상에 있는 모든 환우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치료의 기적으로 회복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아침밥상 국에 크다란 만두가 2개 들어있는 만두국이 올라왔다. 먹음직 해보여 아무 생각없이 한조각을 숟가락으로 퍼서 나도 모르게 예전처럼 대충 씹어 삼키자 마자 갑자기 열이 확 올라오고 가슴이 꽉 막혔다. 이른바 덤핑증후군 증세인가 같다. 일단 먹는것을 중단하고 비슷듬히 누워 상태가 진정 되기를 기다렸다. 하염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만두하나도 마음대로 먹을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 가련하고 서러워서 나는 그렇게 울고있다.
그러나 다시는 울지 않을거다. 여기서 울며 무너질수는 없다.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하고 속옷도 갈아입었다. 여위어가는 내 목골을 보고 싶지는 않지만 안본다고 달라질것도 없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현실을 외면해서도, 부정해서도 이 난관을 극복할수 없다. 새해라 여기 저기서 신년 인사가 톡으로 올라오고 있다, 일일이 답장할 심신의 여유도 안정도 안되었지만 진심으로 모두들 나처럼 아프지 말고 건강하기를 빌었다.
병원에서 제공되는 찬이 너무 부실하여 아들네에게 몇가지 반찬을 부탁했다. 아들아 , 며늘아가 미안하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냐 늙어서 자식들의 짐이 되지 않겠다고 평생 오늘까지 철저한 절제와 노력으로 지켜온 내 건강이다. 지금의 내 상항은 내가 오늘까지 대충 막살아서 생긴 병이 아니란다. 운명처럼 지워진 유전의 짐, 오늘까지 버텨온 건강도 어쩌면 내 노력의 결실이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보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가 제한되어 있어 며늘아기가 준비한 몇가지 반찬을 아침 출근길에 병원 1층 로비에서 전달 받았다. 짜증 내지 않고 부탁하면 웃으며 순응해주는 며늘아기가 고마웠다. 
 
어느듯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10일째다.
병원에서 해주는 의료행위는 아침 저녁 회진을 하며 몸 상태를 점검하고 이상이 있으면 상태에 따라 의사의 진료와 약 처방이 있지만 특별한 증상이 없는 나 같은 환자는 요구에 의해 영양제를 맞기도 하지만 혈압, 체온을 체크하는 것 말고는 1주일 간격으로 2회씩 주사하는 면역주사가 전부다. 여기 병원에서의  좋은점 이란 따뜻한 실온에서 지금 내 몸 상태로 하기 적합한 걷기 운동이 전부다. 몇번을 건의해도 개선되지 않는 식사 때문에 오는 9일 아산병원 첫 외래 진료를 보고는 아무래도 퇴원을 해야 할것 같다.
 
24년 1월 9일 수술후 첫 외래가 있는 날이다.
여기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2주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외래 진료를 위해 직장을 하루 휴가를 낸 아들과 어제 부산에서 동탄으로 올라온 아내와 같이 08시쯤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채혈실에 들려 피를 뽑고 1시간쯤 기다린후 수술을 집도한 공충식 교수와의 진료가 이루어졌다. 수술후 첫만남인데 나는 그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가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는게 당연한데 교수는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밝은 얼굴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안심이 느껴졌다. 지금은 체력이 떨어지고 체중이 빠져 힘들지만 3개월만 지나며 차차 회복될것 이라는 위로와 조직검사 결과 암이 곱게 자라 전이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항암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큰 짐 하나를 내려 놓는 기분이었다. 공교수는 제일 힘든점이 무엇인가? 물었다, 우선 입맛이 없고 기운이 없다고 하자 가까운 집 주변의 동네의원이나 가까운 병원에서 영양제 맞기를 권유했다. 진료전 채취한 혈액검사 결과는 한두가지 수치가 경계선에 걸려 있었지만 건강에 이상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했으며 별도로 약 처방은 없었다. 진료전 잰 검사에서 체중이 60k 밑으로 떨어진걸 확인했다. 수술전보다 5k이상 빠졌다. 수술후 6개월 까지 체중이 계속 빠진다 하는데 한달도 되지 않아 벌써 5k나 줄어들었다. 얼마나 더 빠질지....
3개월후 혈액검사 예약과 7월에 ct검사등 진료예약을 하였다. 요양병원은 한달정도 요양을 계획하고 입원을 하였지만 2주만에 퇴원을 했다, 2주간 병원비는 대략 200만원 정도였다. 아들 집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아침 며느리 출근 편으로 동탄역으로 가 부산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니 정오쯤 되었다. 10여년이 넘도록 감기 한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잘 관리하여 왔건만 집을 떠난지 불과 20여일 만에 노쇠하고 병약한 늙은 노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위암 치료 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암 치료 일지 13.  (0) 2024.05.20
위암 치료 일지 12.  (1) 2024.04.13
위암 치료 일지 10.  (0) 2024.04.03
위암 치료 일지 8. 9.  (0) 2024.03.30
위암 치료일지 7.  (0) 2024.03.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