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 신앙이란 단어 뜻 자체는 '기도해서, 믿어서 복받는' 신앙이란 의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요약하는
대로 신앙적으로 지극 정성을 들이면 하늘을 감동시켜 곤경(죽을 병 등)에서 벗어나거나 내가 원하는 것( 건강, 돈, 출세 )을 얻어낼수 있다는 뜻이다. 내세 보다는 현세중심적인 사고가 기복신앙의 본질이다. 세상 대부분의 종교는 시대에 따라 형태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복이 포함되지 않은 종교는 없다고 한다. 일신의 평안과 부와 명예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가질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일수 있지만 그렇다고 기복을 전제로 하는 미신이나 무속이 종교가 될수는 없다. 종교와 무속이나 미신의 차이가 무엇일까?
스스로 깨우쳐 부처가 되는 불교 마저도 부처가 신이되고 부처에게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기독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 구약을 정경으로 삼고있다. 유대인들의 삶이고 법인 히브리 경전은 그들의 민족신 야훼의 축복으로 온통 잘먹고 잘사는, 즉 이 땅에서의 지상왕국 건설이 주 내용이다. 이웃사랑, 수난과 대속, 그리고 죽어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지만 사람들을 교회당에 끌어 들이기는 뭔가 2% 부족하다. 유대교 경전속의 야훼 즉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아 잘먹고 잘산다는 기복신앙 만큼 사람들을 예배당으로 끌어들이기 쉬운며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 있었을까? 특히 개발 독재 시절 산업화와 "잘 살아보세" 라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 바르게 살아야 하는, 바르게 살기를 가르쳐야 하는 교회의 사명은, 본질은 내던저 버리고 삼중축복이니 하며 일신의 편안과 사회적 부와 명예를 믿음의 승리로 호도(糊塗)하며 하나님 믿으면, 교회가면 복 받는다는 터무니 없는 말로 현세에 잘먹고 잘사는 무속신앙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켜 버렸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기 전 시대에는 장독대에 물 한 사발을 떠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천지신명에게 빌거나, 영험한 무당을 불러 굿이나 푸닥거리를 했다. 무당은 정성을 들여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의뢰인을 부추기거나 협박했다. 정성은 주로 굿판의 규모와 무당에게 주는 돈의 액수로 결정된다. 절에서도 사정이 비슷했다. 개인이 큰 돈을 들여 재를 올리면 기도가 부처님 혹은 각종 보살에게 상달되어 소원이 성취된다고 여겼다. 심봉사의 눈을 뜨기 위해 심청이가 몸을 팔아 절에 공양미 300석을 바친 것이 그 맥락이다.
돈 없는 사람은 몸으로 때우는 방법이 있었다. 탑을 돌며 기도하기, 불상 앞에 절하기 등인데 그 숫자의 많음이 그의 간절함과 정성의 판단 기준이 된다. 3보1배라는 걸어가면서 절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라마교의 오체투지의 미니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뭔가 기도하는 이의 간절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보여주면 그 대가로 이 땅에서 뭔가를 얻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복음이 들어온 후 이 땅에서 무당이나 점쟁이의 세력은 약해졌다. 꼭 복음 때문은 아니고 과학의 발달, 이성의 진보, 문명등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복 패턴은 질기게 살아남아서 교회로 침투했다. 그것을 일부(사실은 상당한 수의) 목사들이 이용해 왔다. 순수한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친 사도와 순교자들의 후계자가 아니라, 무당과 점쟁이의 후계자가 된 것이다. 기꺼이 열심을 내어 신도들의 욕망을 부추겼다. 게다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고, 신앙적으로 올바른 믿음이라고 악한 가르침을 펼쳤다. 그것도 모잘라 괴성을 지르고 방언을 하는것이 성령의 은혜인냥 부추기지만 이는 무당의 강신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구원은 영적으로 복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육적으로도 복을 받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 축복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꾸며내어 사람들에게 주입했다. 이런 짓은 우리가 저지르는 수많은 악 중에서도 특히 그 죄질이 나쁜 악이다.
오늘도 어떤 설교자가 방송에서 그런 논리를 펼쳤다. 다윗이 오르난(혹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하면서 금 600세겔을 지불한 대목이었다. 금 600세겔은 엄청난 액수이다. 그래서 그의 땅이 성전이 되는 영적인 축복을 받는 동시에, 육적으로도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흥'이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나 심심치 않게 듣는 설교다, 감사 헌금을 하고 십일조 헌금을 아낌없이 하고 열심히 기도 했더니 망해가던 사업이 갑자기 불처럼 일어났다, 입시철만 되면 수능생을 위한 100일 작정기도를 하는가 하면, 갖가지 제목의 헌금을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는 봉투에 소원을 적어 바치는 소원헌금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이룬 일들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복을 받기위해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는것이 예수님이 말한 복이고 성경의 가르침인 것처럼. 인간과 거래하는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거래 하려는 행위는 그것이 무엇이든 악한 행위 일 뿐이다.진정 한국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올바른 정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더 악한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눈만 멀뚱멀뚱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 말씀이 과연 기복 신앙을 부추기는 말씀인가? 하나님의 나라를 열심히 구하면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인기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는 말씀인가? 전혀 아니다. 전후 맥락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건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의식주 문제에 불안해하여 전전긍긍하지 말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먹고 사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에 우리의 마음이 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기복 신앙을 부추기는 근거 구절로 이용하는 것은 말씀을 뒤틀어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교묘한 반역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는 구절이 그 가르침과 연결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에서 부유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기복 신앙 이제는 그만하자. 번영 신학 지겹지도 않은가? 우리가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님 자신이 가난한 집에 태어나 번듯한 교육도 못 받고 변변찮은 직업을 가지고 살다가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 다니시다가 입고 계시던 옷까지 다 벗어주고 세상 떠나신 것을 보면서도 바로 그분께 나만은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정성 드리고 싶은가? 그런 설교가 먹힌다면 그건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육신에 속한 신자들에게나 먹히는 것이지 옥토에서 진짜 열매를 맺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청중들도 그런 욕심일랑 깨끗이 단념하자. 그런 욕심을 부추기는 설교자들도 이젠 그만할 때가 되었다.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고 오히려 비웃음만 당할 뿐이다. 그러다가는 하나님 앞에서 큰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 따위 설교를 하다가 주님 오실 때 우리 주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에서 (옮겨온 글 일부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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