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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토예프스키와 양파 한 뿌리 은혜는 어떻게 행위로 완성되는가?

by 까마귀마을 2023. 12. 26.

며칠전이 성탄절이다. 

우리인류를 죄에서 구하였다는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다. 물론 예수님 탄생일은 정확히 알수없으니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 하는게 맞다. 예수님 즉 하느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시어서 우리죄를 대신지고 희생제물이 됨으로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면서 부터 우리에게 지워진 죄, 우리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입과 손과 마음으로 지은 그 수많은 허물과 죄들이  예수님의 피흘림으로 모두 속죄되었다고 우리는 믿고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아무른 댓가도 치루지 않고 우리가 교만하여 끊어진 창조주와 우리의 관계는 회복되고 우리가 떠나온 그 낙원으로 다시 돌아갈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쫒겨난 그 낙원으로 돌아감이 예수님의 피흘린 은혜가 아니라 우리의 선행과 믿음의 노력이나 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수난을  받고 고통속에 돌아가신 구원의 역사는 헛것이 되고 마는가? 우리가 살아서 베푼 수많은 선행이, 믿음마저도 그 결과나 크기가 아니라 마지막날 하느님의 은혜 즉 하느님이 지닌 고유한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것이 하느님의 은혜와 은총에 부합한 삶이 될수 있을까? 예수님이 탄생한 이 좋은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해보며 브런취에서 글 하나를 옮겨옴니다.

 

천국에 대한 예화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양파 한 뿌리' 이야기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책임에 적당히 무게를 싣고 있는, 내가 들은 가장 균형 있는 천국론. 본문을 그대로 옮겨 본다.

 

옛날 옛적에 참 못되고도 정말 못된 아줌마 한 사람이 살았는데, 그만 죽었답니다. 죽고 나서 보니 아줌마는 그동안 착한 일을 단 한 가지도 하지 않았던 거예요. 악마들이 아줌마를 붙잡아서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자, 아줌마의 수호천사가 가만히 서서 생각했지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무슨 착한 일이 저 아줌마한테 없을까 하고요. 마침 기억나는 것이 있어서 하느님께, 저 아줌마는 텃밭에서 양파를 뽑아 거지 여인에게 준 적이 있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너는 바로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의 그녀에게 내밀되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저기 불바다에서 나올 수 있다면 낙원으로 가도 좋지만, 만약 양파가 끊어진다면 그녀는 지금 있는 그곳에 남게 되리라.


천사는 아줌마한테로 달려가서 양파를 내밀었습니다. 자, 아줌마, 어서 붙잡고 올라와요. 그러면서 천사는 아줌마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겨서 마침내 거의 다 끌어올렸는데, 그러자 호수에 있던 나머지 죄인들이 아줌마가 저리로 끌려 올라가는 것을 보고서는 다들 그녀와 함께 나가려고 그녀를 붙잡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줌마는 참 못되고도 못됐기 때문에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끌어올려 주는 거야, 너희들이 아니라, 이건 내 양파지, 너희들 게 아니야. 그녀가 이 말을 하기가 무섭게 양파가 툭 끊어져 버렸답니다. 그러고 아줌마는 불바다 속으로 떨어져 오늘날까지 타고 있어요.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답니다. (p.155)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선행'이 아니다. '은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교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기도, 또 그만큼 많은 이들을 기독교에서 등 돌리게 하기도 했다. 인간 입장에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천국은 오직 신의 은총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 인간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죄인이라는 것. 1517년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썩어빠진 가톨릭 교계에 일침을 날리며 앞세운 다섯 가지 핵심 교리(다섯가지 sola )중 하나도 바로 sola gratia. '오직 은혜'였다. 이 땅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든, 그게 얼마나 선하든 상관없이 심판대 앞에선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인간의 공력. 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불편한 기준인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런 비기독교인의 반감을 그대로 이 예화 속에 투사했다. 그래,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치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못된 사람에게도 일말의 선행이 있다면? 그 사람도 지옥에 보낼 것인가? 신은 그렇게 악한 존재인가?

당연히 아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까지도 찾고 또 찾고, 집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분이다. 그런 하나님이 수호천사의 간청을 매몰차게 뿌리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양파 한 뿌리'만큼의 구원이 허락되는 것이다. 양파 한 뿌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연민'이자, 인간에게는 '희망'의 상징이다. 이제 못된 아줌마는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을 붙들고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내야 한다. 운이 좋다면 그녀는 비록 양파 한 뿌리만큼의 초라한 상급일지언정 불바다에서 벗어나 천국 한 귀퉁이에서 영생을 누리는 은혜를 얻을지 몰랐다.

하지만 구원이란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대신 내어놓고 산 우리들의 목숨 값이다.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못된 아줌마로 하여금 자신에게 매달린 다른 이들에 대한 연민을 철저하게 저버리게 함으로써 그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게 한다. 너는 원래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억지로 찾아낸 너의 알량한 선행은 결국 그녀가 평생 살아온 이기적 삶을 반증하는 증거일 뿐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을 두루 감싸는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만약 이 예화에서 이 못된 아줌마가 어찌어찌하여 양파 한 줄기를 붙들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 고려대 석영중 교수에 의하면, 그녀에게 주어진 '양파 한 줄기'의 의미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공정'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그녀의 알량한 선행 하나가 만약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었다면, 평생 의로운 일을 하고 천국에 들어온 어떤 의인들에게는 당연히 '불공정'으로 작동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천국에 들어갈 만큼 충분한 선행의 기준은 무엇이고, 또 그걸 누가 판단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선행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정황과 맥락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개념이다.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다. 밖에서는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기업가가 집에서는 다정하기 그지없는 아버지일 수 있고, 집안에서는 대접받지 못하는 누군가도 어떤 모임에서는 누구보다 호인일 수 있다. 누군가를 위해 한 나의 배려가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도 한다. 나와 타인과의 이해의 거리만큼 선행의 거리도 멀고 멀다. 그러니, 무엇으로 그의 선행을 판단할까.

우리는 그저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분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뿐이다. 그 못된 아줌마가 양파를 붙들고 평생의 이기적 선택 대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선택을 했다면,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실 분이라는 그 사실을 알 뿐이다. (글 브런취 송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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