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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기독교는 주류(主流) 종교로 계속 살아 남을까?

by 까마귀마을 2023. 10. 4.

과거 기독교는 인류 역사의 중심이었다.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유럽의 도시다. 유럽 대부분의 도시 중심에는 시청과 교회가 나란히 서 있었다.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이 나란히 도시를 지배한 것이다. 지금도 유럽 여행을 가보면 이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근세 이전만 해도 귀족 집안에서는 정치가와 성직자가 동시에 존재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에는 정치권력자가 성직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독교는 사회의 중심이었다. 종교와 권력이 늘 함께하였다.

 

그러나 근세 이후 기독교는 몰락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왔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종교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적이 없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적 타락이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기독교 도그마( 이성()적인 비판이 허용되지 않고 증명 필요 하지 않는 교리() 교의())의 오류였다. 이제 천지창조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계층은 성직자가 아니라 물리학자다. 그리고 인간의 참된 본질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성직자가 아니라 의·생명 학자와 심리학자다. 윤리·도덕에 관한 이야기도 성직자가 아니라 법학자나 사회학자가 할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는 모든 분야에서 그 권위를 상실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연과학의 발달 덕분에 사람들은 신에 대한 두려움도 상실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신의 심판이 기다리는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특히 종교가 주장한 종말이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종말과 전혀 다른 것을 말해준다는 을 배운 인간은 더 이상 사후 세계에 큰 관심이 없게 되었다. 예수 시절에만 해도 악령의 작용이나 신의 의지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현상들이 이제는 모두 과학적 설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간질을 일으키는 뇌전증은 뇌의 비정상적인 활동의 결과이고 나병은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지진과 화산폭발도 인간의 도덕적 타락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구의 지각 변동에 불과한 현상이라는 사실도 상식이 되었다. 홍수도 인류를 쓸어버리려는 신의 의지가 아니라 기후 변화로 발생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메뚜기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전적으로 날씨 탓이다. 역병이 도는 것은 악령의 작용이 아니라 세균과 바이러스가 번식하는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현대 의학은 질병에 걸린 환자만이 아니라 심정지 상태에 있는 실제로 죽은 인간도 살려낸다. 신의 은총으로만 가능했던 기적 같은 일이 얼마든지 과학의 힘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종교의 권위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의 선함과 윤리·도덕, 그리고 세상을 해석하는 진리를 배타적으로 보유했다는 교회의 성직자가 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행동을 하고, 게다가 그런 성직자를 '우리 식구'라고 조직적으로 감싸고돌며 반성하지 않는 교회를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와 성직자는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는 진실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그저 이 세상에서 먹고살기 위해 교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성직자라는 직업을 택한 이들일 뿐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거에 교회와 성직자가 독점한 인간 지성의 최고 분야를 모조리 세속 세계에 빼앗긴 것도 모자라 도덕적 위마저 추락한 교회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이른바 ‘아줌마 부대’를 끌고 다니는 성직자밖에 없다. 특히 남편과 자식에 '버림받아' 실망한 외로운 40대 이상의 아줌마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이 성직자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넘쳐난다. 이 아줌마들은 진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어디 말 잘하는 신부 있다더라', '어디 잘생긴 중이 있다더라' 하면서 자기들끼리 떼로 몰려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직자들이 주로 하는 이야기도 아줌마들의 푸념을 들어주고 적당한 심리적 만족을 주는 것이 전부다. 사실 세속의 인생상담소가 하는 것과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 불교와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는 이야깃거리조차 안 된다. 그런 이야기해 봐야 이해를 못 하니 말이다.

 

그리고 아줌마를 대상으로 한 인생상담 못지않은 수익이 나는 것이 바로 기도 장사다. 철철이 계절마다 핑계 만들어 봉헌하게 만드는 기도만이 아니라 수능 100일 정진 기도, 취업 정진 기도, 심지어 남편 바람막이 기도까지 있다. 명분은 가정을 위한 기도이지만 말이다. 이런 기도는 원래 무당들이 드리던 것인데 성직자가 이 블루 오션(현재 존재하지 않거나 알려져 있지 않아 경쟁자가 없는 유망한 시장)에 뛰어들어 이제 레드 오션( 산업의 경계가 이미 정의되어 있고 경쟁자의 수도 많기 때문에, 같은 목표와 같은 고객을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을 만들어 버렸다. 경쟁이 치열하다. 이 못지않은 장사가 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무덤과 납골당 사업이다. 가뜩이나 땅이 없는 나라에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일이 매우 심각한 경제적 부담이 되는 일이 된 현실을 보고 교회와 절이 뛰어든 것이다. 물론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도 빼놓을 수 없다. 상당한 수익이 되는 사업이니 말이다.

 

유럽은 어떤가? 아줌마 부대도 없고 무덤 장사도 없다. 아무리 돈에 미쳐도 체면이 있으니 말이다. 그 대신 유럽에도 '할머니 부대'는 존재한다.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비록 기독교 신자는 무섭게 줄어들고 있지만 수십 년 동안 교회에서 장례 미사를 드리는 신자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죽을 날이 가까운 노인들은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 죽고 나서 장례까지 책임져주는 교회를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도 이미 교회에서 청년이 나 한 명 그리고 나머지 열댓 명의 대부분 할머니인 노인들이 미사를 드렸다. 현재 독일 가톨릭교회에서 주일 미사 참여율은 4%대다. 곧 100명 가운데 4명만이 주말의 미사에 참석한다는 말이다. 개신교도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죽음을 교회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 한 때 불교나 기독교는 인간 지성의 정점에 있었다. 인간의 인식과 형이상학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천재급 성직자들이 학자로서의 역량을 맘껏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그 기독교나 불교의 성직자도 과거의 성직자 수준의 지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만한 ‘아줌마 부대’만 끌고 다니며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줌마가 할머니가 되면 장례까지 연결되는 사업의 주요 고객이 된다. 그래서 교회의 수입은 크게 줄지 않는 것이다. 이 또한 통계로 확인된다. 독일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10년 만에 거의 30% 이상 줄었음에도 교회 수익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약간 늘었다. 아직 돈벌이가 되는 것이 교회 장사라는 증거가 객관적으로 나타나 있다.

 

어찌 이리되었을까? 당연히 과학의 발달 때문이다. 특히 검증 가능성으로 무장한 자연과학의 명증성()앞에서 교회의 도그마에 의지한 애매한 진리 담론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종교는 외적인 공공의 자리에서 내적인 사석으로 몰린 것이다. 이제는 종교가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신이 창조한 천지인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지극히 편협한 우주관은 많은 과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런 억지의 대가를 이제 교회가 단단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 구절이 없다. 예수도 우주론을 강의한 적이 없다. 오로지 교회가 자기 멋대로 만들어낸 매우 비과학적인 우주론의 도그마의 덫에 걸려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우주론만이 아니라 인간론, 윤리와 도덕론에서도 비과학적인 도그마의 덫에 걸려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가 주장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교회가 내세우는 것이 맹목적인 믿음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식하게’ 믿는 것이 참다운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가 말하는 것에 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줌마 부대가 교회 안에 넘치게 된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지성을 지닌 이들은 다 교회를 떠나버리고 난 다음에 말이다.

 

교회가 권위를 상실하고 겨우 아줌마 부대와 할머니 부대에 의존해서 연명하는 과정에서 성직자의 성과 돈에 관련된 타락은 결정타가 되었다. 자신을 신이나 영원한 진리와 일치된 존재쯤으로 내세우던 성직자가 ‘평민’보다 더 추접한 ‘타락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목격한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근원적으로 나약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신자는 의지할 절대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엇이든 믿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래서 절대자나 다름없는 거룩한 존재로 믿었던 성직자의 추한 몰골을 확인한 신자는 절대자나 절대 진리에 대한 믿음은 포기하지 않고 교회 밖에서 그런 믿을 대상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를 대체할만한 사상이나 단체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런 대체재로 등장한 것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뉴에이지다. 뉴에이지는 탈 기독교의 가장 눈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그리고 뉴에이지는 철저히 기독교를 뿌리로 한 혼합주의(syncreticism)의 산물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기독교에 맞선 것이 무신론이다. 이는 과학주의와 결합하면서 이제는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가 <이기적 유전자>와 <만들어진 신>을 쓴 리처드 도킨스와 <호모 데우스>와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가 있다. 이에 못지않은 것이 환경보호 운동이다. 특히 유럽 지역에서 환경운동은 단순히 환경보호를 위한 시민운동의 차원을 넘어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독일의 경우 환경운동으로 시작한 정당인 <녹색당>은 <사민당>과 <자민당>과 연정을 이루며 독일의 정치계에서 주류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리고 페미니즘도 기독교의 대체재 역할을 하고 있다. 서양에서 페미니즘은 단순히 남성의 폭력에서 여성을 구하는 차원을 넘어서 강력한 정치적 구심점을 확보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 비하를 하는 정치가는 영원히 매장되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 전체적인 흐름의 주요 특성은 전통적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독교의 독점적 지위의 상실이다. 이제 교회는 세속 사회의 다른 장사꾼들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함을 포기하고 시작한 세속적인 기복, 장례, 상담 모든 분야에서도 일반 사기업과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것이다. 교회도 먹고살아야 하니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상품을 파는 자본주의에 철저히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실추되는 상황에서 아줌마 부대와 할머니 부대가 가버리고 나면 교회 자체의 경쟁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 ‘인재’가 없다. 중세 때만 해도 최고의 지성이 몰려든 곳이 교회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가? 가장 머리가 뛰어난 인재는 모조리 자연과학 분야, 특히 의학과 물리학 분야로 몰려간다. 성직자가 되려는 자들은 대부분 차마 인재로 불리기 힘든 수준에 있다.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 양성되는 성직자들은 많은 경우 그 수준이 충격적일 정도다. 그런 이들이 모인 교회가 사회를 이끌 동력을 과거처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교회는 남을 가르칠 처지에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교회의 대체제 가운데 가장 경쟁력이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 현재로서는 뉴에이지 운동이다. 그러나 뉴에이지 운동은 기성 교회와 달리 조직화하여 있지 않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다. 그런데도 기성 교회의 신자들을 가장 많이 흡수하는 분야이기에 교회에서 가장 심각하게 여기는 영역이기도 하다. 뉴에이지가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실적 도움에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는 대부분 대동소이하다. 목회 데이터연구소가 1998년부터 정기적으로 조사하여 발표하는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에 따르면 종교를 찾는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마음의 평안, 구원과 영생,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 재물, 성공을 위한 축복과 맘에 맞는 이들과의 친교다. 그런데 그런 소망을 지닌 한국 종교인의 숫자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1998년 53%였던 종교인이 2022년 기준으로는 37%로 격감했다. 그리고 이런 하향 추세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이미 2012년부터 꾸준히 지속되어 온 것으로 앞으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종교에 관한 관심이 식는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부터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다음으로는 종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다. 여기에 신앙심이 없다는 것과 특정 조직에 얽매이는 것이 싫다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한마디로 종교를 가지게 된 동기를 교회나 절이 전혀 충족을 시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 나와서 구원받으세요.’ 하는 권고는 공허한 메아리만이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매우 혼합주의적이고 매우 현실적인 뉴에이지운동은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제 기독교에서 이른바 ‘건질 것’은 없다. 최후의 심판과 구원을 이야기하고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고, 윤리와 도덕을 이야기하지만, 그 어떤 분야에서든 교회가 모범을 보일 수 있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 인류의 최후는 누구나 알고 있다. 태양의 수명이 100억 년 정도인데 이제 50억 중년에 이르렀고 앞으로 50억 년 안에 적색거성과 백색왜성의 단계를 거쳐 소멸해 버린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20~30억 년 후에 소멸해 버린다. 그리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겨우 20만 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했고,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를 일으키고 핵무기를 생산하며 10억 년은 고사하고 100년도 안 되어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의 종교가 아니라,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수억 명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육한 종교라는 것도 다 알려졌다. 그리고 기독교는 탄생 순간부터 분열되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늘 권력자 편에 서서 약자를 탄압한 종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신과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살육하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역사를 전개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를 입에 달고 사는 모순적이고 위선적 모습을 여전히 보이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는 수백 개 기독교 파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단죄한다. 과연 그 많은 교파 가운데 누가 참된 교회요 예수의 제자란 말인가? 아무도 모른다. 세속의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다 그놈이 그놈이니 말이다. 그저 예수 교회라는 회사를 세우고 그 경영권을 독점한 성직자들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려고 애쓰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종교에 품었던 기대, 곧 영원한 진리, 영적 위안, 거기에 더한 현실적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을 교회 밖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유럽에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고 뉴에이지 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뉴에이지 운동의 흐름과 분야를 다 다루는 것은 방대한 작업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 여러 차례 나누어 이를 좀 더 깊이 다루어보겠다.(브런치에서 옮겨옴 : 본문중 뉴 에이지의 역사에 관한 부분은 일부 생략하였습니다)

글 :  Francis Lee  

출처  :  탈 기독교의 시대가 도래하나? (brunch.co.kr)

 

*뉴에이지(New Age)는 20세기 말엽 나타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적인 운동 및 사회활동, 문화활동, 뉴에이지 음악 등을 종합해서 부르는 단어이다.

기존의 사회, 문화, 종교에서 영적 공허를 느낀 사람들이 이를 탈피하려는 움직임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간 의식을 확장하고 내적 능력을 개발시켜 신비적인 우주의 차원에 도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신비주의 종교 영역과도 관계가 있다. 뉴에이지란 이름으로 서로 단합된 활동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정의하기 힘들다. 뉴에이지 운동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이 갖고 있는 속성이라면, 각자 개인적인 수련을 한다는 점이다. 범신론 적이며,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문화 상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작은 모임을 통해 만나기도 한다. 뉴에이지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뉴 위키 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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