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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인가?

by 까마귀마을 2023. 9. 7.

'하나님 말씀'과 '목사님 말씀'

 

설교를 악용하는 목회자들

좋은 설교가 있는 반면에 나쁜 설교도 있다. 세습 목사의 설교도 있고, 횡령 목사의 설교도 있다. 게다가 표절 목사, 학력 사칭 목사, 성직 매매 목사, 뇌물 수수 목사, 불법 안수 목사, 성추행 목사, 그리고 사이비 목사까지 별의별 잡다한 인생들의 설교가 도처에 널려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교 속에 인용된 성경만이 하나님 말씀이다. 그래서 그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순간 설교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이 되거나, 심지어 '사탄의 가르침'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교회 역사를 보면 이러한 배도 행위를 한 설교자들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이런 아픈 사실을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 또한 자신이 신적 권위를 지닌 대리인이라도 된 듯 착각하며 설교를 남용하고, 마치 신접한 무당처럼 신도들 위에 군림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다

 

현대 예배에서 설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정말 막중하다. 대부분의 예배가 거의 설교 중심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의 위상 역시 강단의 높이 만큼이나 높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설교를 지나치게 중시하며 과신하는 '설교지상주의'는 '설교무오설'이나 '교황무오설'만큼이나 위험한 사상이다. 만일 누구라도 '설교=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아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여 전하고 가르치는 전달자일 뿐이다. 이는 마치 어떤 교수가 논어를 가르친다고 해서 그가 곧 공자를 대신하는 대리자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세상 누구에게도 '대리자'나 '중보자'의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 심지어 사도들조차 하나님의 대리자는 아니다.

그런데 중세 교황이나 사제들은 자신을 그런 신성한 대리자로 격상시켜 '하나님의 뜻'을 오도하고 종교적 월권을 행사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를 이용하여 세속적 권력까지 장악했다. 그래서 교황의 말이 성경적 권위를 대신할 정도였다. 그 결과 공교회는 무지한 오류에 빠져 영적 암흑기를 겪어야 했고, 세상 나라들은 소위 성직자란 자들이 군림하는 '기독교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 영육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중세 교권의 끝이 없던 타락은 설교자에 대한 바른 인식 부족에도 크게 기인한다. 그래서 교황이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무슨 무지한 말을 해도, 신도들이 그것을 반박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대언처럼 간주했다.

루터 시대의 '면죄부'가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교황이 면죄부 판매를 발표했을 때 그것을 성경적으로 제대로 해석하고 반박한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다. 많은 신도들은 오히려 서로 그것을 사기 위해 돈 싸 들고 달려갔다고 한다. 교회가 잘못 가르치면 어떤 황당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 준다.

 

설교를 악용하는 목회자들

 

바른 설교의 유익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설교 또한 매우 많다는 사실도 심각하게 인정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해야 한다. 현재 기독교 이단만 해도 무려 200만 명이 넘는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니 과연 그들의 설교는 또 오죽할까.

비단 이단들 설교만 문제일까. 그건 아니다.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정통이란 교회들의 설교 속에도 이단을 뺨치는 오류가 비일비재하다. 오늘날 여러 교단에서 우민화한 맹신도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무지몽매한 교권주의가 판치게 된 결정적인 배후가 바로 이 '설교 타락'임을 알아야 한다.

달콤한 말로 치장한 저질 설교는 저질 신도를 양산하고, 저질 신도는 결국 저질 목사를 옹호한다. 그리고 그 저질 목사가 또다시 기고만장한 저질 설교를 재생산하는 악순환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는 과거처럼 중세적 타락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요즘 성도들이 날마다 보고 있는 '한국교회 잔혹사'의 근원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아니 우리 목사님은 매주 성경적으로 바른 말씀만 가르치시는데요!" 물론 그럴 수 있다. 필자도 그런 설교자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바른 설교의 경우도 조심해야 한다. 일방적인 '편식 설교'를 늘상 애용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기복 설교'이다. 설교 한 편만 놓고 보면 크게 틀린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 보면 매주 "복 받으라"는 논리만 되풀이한다. '복'이라는 단어를 빼면 아예 설교도 안 되고, 기도도 안 될 정도로 심하다.

'축복'과 '성공'과 '감사'는 크게 노래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희생'과 '책임'이 누락되어 있다. 신도들의 '교회적 책임'은 항상 강조하여 헌금을 알뜰이 챙기지만, '가정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만날 "전도 열심히 하자"고 하며 교세를 늘릴 궁리는 하지만, 그 속셈은 따로 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십일조는 철저히 강조하지만, 목사 자신조차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힘에 지나도록"(고후 8:3) 바치지는 않는다. 무조건 '십분의 일'만 바치면 만사형통이고, 나머지로는 신나게 잘 먹고 잘살고 있다. 한국교회 내에 고액 연봉과 큰 재산을 자랑하는 '귀족 목사'들의 존재 자체가 이를 실증한다.

더구나 성경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8-9)고 엄중히 경고하는데, 기복 목사들은 이 구절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부자가 되라"고 한다.

 

'설교 맹종'은 무당 신앙

 

가장 한심한 부류는 마치 설교자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오도하거나, 또는 오직 목사에게만 설교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똑같이 허탄한 인생이 성경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은 남보다 더 특별히 거룩한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개인의 권위를 성스럽게 포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도둑질하는 사특한 행위이다. 아무리 크고 멋진 강단이라도 그것이 설교자를 저절로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강단은 구약의 제단이 아니다. 그건 단순히 설교의 편의를 위한 통나무 조각일 뿐이다.

어떤 도적이나 거짓 목사가 강단에서 제법 근엄하게 설교를 잘한다고 해도, 도적이 그 순간 갑자기 '거룩한 제사장'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설교를 잘해도 도적은 그냥 도적이고, 가짜는 계속 가짜일 뿐이다.

특히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는 표현은 매우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굳이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남용하는 이 말은 "설교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거나 오직 "목사에게만 선포권이 있다"는 것처럼 오도할 때가 많다. 또한 교권주의적으로 크게 악용되어 목사에게 부당한 권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본래 설교자의 권위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권위로 스스로 자증하고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제사장이나 무당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유일한 권위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군대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일개 연락병이 명령권자인 장군 행세를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이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겸손해야 한다. 특히 강단에서 악쓰며 호통치는 일부 목사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 없다. 자기가 뭔데 감히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에게 야단을 치며 소리를 지르나. 오만불손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예배 오염의 주범이 바로 이런 권위주의적 설교라고 생각한다.

말씀에 권위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권위가 있다는 것이지, 그것을 전하는 설교자가 그렇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설교자 역시 설교에 합당한 어느 정도의 자격과 권위가 있어야 하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인 것처럼 위세를 부리는 것은 매우 잘못된 행위이다. 설교자의 권위 또한 스스로 자신이 주장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회중이 부여해 주는 것이어야 옳다.

 

'말씀 선포'는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 말씀' 대신에 '교황님 말씀'과 '신부님 말씀'을 따르다 망했다. 따라서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잘 분별해야 한다. 성경을 모르는 교인은 언제나 위선적인 설교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되어 있다.

아울러 설교란 '목사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부 귀족 목사들이나 부실 목사들처럼 강단에서 사사로이 '사설'과 '잡론'을 펼치면 안 된다. 특히 설교를 사람 많이 모으고 감동 주어 헌금 많이 걷기 위한 인위적 수단으로 오용하는 자들도 적지 않은데, 그건 예배와 회중을 모독하는 반기독교적 행위이다.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용서를 받아야 할 초라한 죄인이고, 다른 형제들을 섬겨야 할 종이며, 날마다 주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성도일 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공교회는 모든 설교자들의 임기를 정하고, 그들이 행여라도 바른 설교에서 벗어날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무능한 장로와 집사들이 이런 중요한 책임을 제대로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한국교회가 갈수록 부패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말씀 선포'는 목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성도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교단에서 신학을 전공한 목사를 설교자로 세우는 것은 단지 교회의 일반적인 질서를 위한 것이지, 그게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필요한 경우 회중이 동의한다면 장로나 집사나 교사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다.

그래서 단지 직업 목사의 설교만 허용하는 현행 설교 제도는 어린아이가 장성한 후에도 오로지 '이유식'만 먹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균형하고 어리석은 독선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는 양날의 검

 

한국교회 일부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은 단지 목사만이 하나님과 교인 사이에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무슨 특별한 권한을 별도로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중세적 성경관이다.

더구나 필자가 본 바로는 오로지 성경만 해석해 주는 정상적인 설교는 매우 드물다. 도리어 고작 성경 몇 구절 읽어 놓고는 줄곧 '목사님 말씀'만 잡다하게 늘어놓는 설교가 비일비재하다. 지금 그릇된 설교로 공교회를 온통 '맹신 집단'이나 '사교 집단'으로 변질시킨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설교자는 평생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 치고, 성경의 진리를 모르는 교인은 평생 사람의 말에 사기당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 무지한 목사는 평생 외식하며 살고, 성경에 무지한 신도는 평생 엉뚱한 자들에게 돈 바치며 산다.

귀중한 설교 시간에 성경의 가르침 이외에 회중의 흥미를 끌 만한 다른 잡된 '무속 신앙'이나 '기복 신앙'을 혼합하여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도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배교'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늘 두려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뛰어난 말솜씨와 기발한 예화로 청중을 웃기거나 울리며 감동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좋은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그냥 인간의 잔재주에 의한 웅변이나 무당 굿거리일 뿐이다.

진정으로 좋은 설교란 인간의 잡설을 최대한 배제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장 쉽게 잘 풀이해 주는 설교이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집사들의 설교가 언제나 그랬다. 사실 진짜 하나님 말씀은 스스로 성경을 펴면 성도 누구나 어디에서든 직접 들을 수 있다. 아무쪼록 앞으로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동네 강아지도 안 물어 갈 그 쓸데없는 '특권 의식'을 철저히 버리고, 겸허히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사역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설교는 양날의 검과 같다. 바르게 쓰면 '보배'이고, 잘못 쓰면 '독배'이다.

 

"사도들의 교회에서는 설교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이 어떤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않았다. 개종한 모든 성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고, 모든 은사가 있는 성도가 회중에서 기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은 어떠한 영적 계급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또한 신약성경은 하나님과 일반 성도 사이를 매개하는 특별한 신분의 제사장을 알지 못한다." - 필립 샤프 (Phillip Schaff, History of Christian Church Vol 2, p.118)

 

글 : 신성남 집사·<어쩔까나 한국교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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