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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예수에 대한 당시 역사가들의 증언

by 까마귀마을 2023. 8. 17.

백범 김구 선생이 돌아 가신 지 수 십년이 흘렀다. 젊은 세대들은 그를 직접 목격한 일이 없다. 하지만 애국자 로서의 그의 강렬한 이미지는 젊은 세대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앞으로 올 많은 세대를 통해서도 그는 기억 될 것이다. 백범이 실제로 존재 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 젊은 세대는 가장 먼저 그의 활동 당시의 신문이나 역사 기록을 지적 할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일본 경찰을 죽이고, 감옥에서 고종 황제의 국문을 기다렸는지는 당시의 형무소 기록이 가장 정확히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망구 공원 폭탄 투척의 배후로 주목되어 피신하는 과정은 당시 중국, 일본 아니 전 세계의 언론이 증언하고 있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증거는 객관적인 기록이 되겠다. 신문, 정부 기관의 문서, 중립적 역사 학자의 기록 등등이 그 예가 되겠다. 예수님이 살았던 당시에는 언론이나 신문은 없었지만 역사가들의 기록마저 없지는 않았다.  예수시대 당시 활동한 수많은 역사가 들의 엄청나게 많은 저서가 지금도 남아 있지만 몇몇 유대 역사가들의 증언을 제외하고는 예수의 흔적을  발견할수 없다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증언을 역사적 예수라 말하지만 성서에 기록된 예수는 신앙에 입각한 믿는자의 고백이지 연대나 장소등 역사적인 정확성과 체계적인 기록이나 문서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활동한 유대 역사가들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이나 문헌들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해 알아 보기로 한다.

 

유태 역사가들의 증언

i) 필로 (Philo of Alexandria)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BC 20 년에 태어나 AD 50 년에 타계한 것으로 유추되므로 예수님과 또 "바울"과 동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상당히 부유한 상류층 계급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요세푸스"의 그의 형제와 조카들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다. "필로"의 형제 "알렉산더"는 징세국의 고급 관리였으며, 한때 "아그립파" 왕에게 상당한 돈도 꾸어 주었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이 "알렉산더"의 아들, 즉 "필로"의 조카 "마르쿠스"는 나중에 "아그립파"왕의 사위가 된다.

비록 이집트에서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필로"는 자신이 유태인임을 잊지 않았다. 그의 모든 저술이 유대인의 경전 "토라"에 근간을 두고 있다. 희생 번제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 했었다고 스스로 적고 있다. 역사학자로서 그는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현재 대략 40 여편의 저술이 보관되어 있는데, 초대 교부들의 인용을 보면 그 외에도 대략 20 여편의 저술이 더 있다고 사료된다.

이상한 것은, 그 당시 결코 주류를 이룰 수 없었던 미미한 종교 분파인 "떼라퓻" 또는 "에쎄네" 파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한 바 있는데, 그의 온 저서를 통하여 예수가 언급된 곳은 없다는 것이다.

그의 기록 중 예수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이 있다. 그는 그 곳에서 유태인들의 흔한 이름들이었던, "예수" (Jesus) 와 "호세아" (Josea)의 다른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생존 시 예루살렘을 방문 했었다. 만약 예수가 복음서의 기록처럼 당시에 세인에게  알려지고 세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필로와 같은 인물이 예수를 간과 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도 분명 언급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ii) 저스투스 (Justus of Tiberia)

유태인 역사 학자로 AD 80 년 경에 "갈릴리" 지방에서 활동 하였다. 그는 평론가였으며 후에 소개할 중요한 유태 역사 학자 "요세푸스"의 라이벌이었다. 그의 저술들은 분실되었지만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플로티우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플로티우스"의 진술"

" 나는 "저스투스"의 저술을 읽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유대왕 연대기 (The Chronology of the Kings of Judah which succeded one another)였다. "저스투스"는 "갈릴리"의 "티베리우스" 도시 출신으로 "모세"에서 부터 시작하여 "트라잔" 황제 통치(AD98 - 117) 제 3년 까지의 역사를 기록 하고 있다. 그의 문체는 간결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그가 어찌 되었는지, 또 그가 행한 이적들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다. ......"요세푸스"가 그를 묘사한 바에 의하면 "저스투스"는 희대의 난봉꾼으로 돈과 쾌락의 노예였다. .... "요세푸스"를 여러번 모함 하였으나 "요세푸스"는 오직 그를 말로서 타일르고 처벌 하지는 않았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술을 평가 하기를 전반적으로, 특히 독립 전쟁과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부분이 심히 황당하며 비 역사적이라고 단언 하였다."

 

iii) 노인 플리니 (Pliny the Elder)

플리니라는 사람이 하나 더 있어서 노인 플리니, 청년 플리니로 구분해 불리운다. 그의 주요 저서인 "자연의 역사" (Natural History)는 37권으로 되어있고 그는 여기에서, 고대의 지식과 정보를 요약해 놓고 있다. 그가 다룬 분야들 중 몇 가지만 본다.

1. 천체 현상과 유성

2.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관한 지리 (Geography)

3. 인류학, 생리학

그 외 에도 육지 동물, 식물, 곤충, 조류, 포도주, 의약재, 각종 금속, 건축 자재, 보석등에 대하여 총 37 권의 책을 집필 하였다. 농장을 경영 하는 방법에 대 해서도 저술 할 정도로 그는 당시의 지식 체계를 총 망라 하고저 했다.

첫 번째 책에서 그는 동 시대의 모든 자연 현상 또는 천문학적 현상들을 수집하여 기록 하고 있다. 흥미 위주로 저술 하였으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도 충실히 모집 하여 기록 하고 있는데,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항은 하나도 없다. 즉 성경에 언급된 예수 탄생 당시에 나타난 베들레헴의 별, 예수 처형 시의 하늘이 어두워진 현상, 일식 현상?, 등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는 "폼페이" 를 멸망 시킨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시 사망 하였다. 화산 활동을 너무 열심히 관찰 하다가 피신 하기에 때가 늦어 버렸던 것 이었다.

 

그 외 수 십명의 저술가 들이 있었다. 그들의 저술은 현대의 한 도서관을 채우기에 충분한 양 이었지만, 모두 예수에 관한 언급에는 실패 하고 있다.

다음에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제시되는 예수 실존에 대한 증거들을 고찰해 보자. 이 증거들은 오랜 세월 비판 없이 범부들에게 받아 들여 진 것 들이다. 하지만 이 증거들은 기독교적 편견으로 물 들어져 있는 것같다. "요세푸스"의 진술 (Testimonium of Flavius Josephus)은 어느 정도 예외로 하더라도. 

 

i) 타시투스 (Tacitus)

로마의 역사가로서 그의 저서 "Annals"에서 "기도교인들"에 대해 언급 하고 있다. AD 64년의 로마의 대 화재 발생시, "네로" 황제가 "기독교인"에게 책임을 돌린 것,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단어가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시 "빌라도"에게 처형 당한 "크리스투스"(Christus)(라틴어로 그리스도)라는 인물에게서 비롯 되었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타시투스"의 진술, Annals 15.44 (AD 112)

"네로"는 본인이 로마 대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종식 시키고저 희생 양을 물색 했고 그 희생 양으로 가증할 범죄를 저지르는 "크리스쳔"이라 불리는 무리들을 택했다. 그 무리의 이름은 "그리스도" 라는 자 에게서 유래 되었는데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통치시 "빌라도"에게 처형 되었다. 잠시 제압은 되었으나 이 황당한 미신 분파는 다시 성행되었다. 원래 이 분파가 발생 했던 유대 지방과 온 세계의 황당하고 수치스러운 문화가 모여 들어 성행하는 "로마" 에서도. 이 문헌이 증거가 되기에는 너무도 미비하다.

그의 저서의 발행 연도는 AD 112년 경이다. 이미 예수 신화가 로마에도 널리 보급된 후의 일이므로, 그가 시중의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확률이 매우 크다.

예수 처형 당시 그는 세상에 출생조차 아니했으므로 이 기록은 그의 목격 담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로마 정부는 무수한 처형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었기에 "타시투스"의 언급이 객관적 기록이나 정부 문서를 토대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님 도 분명 하다.

그 가 "크리수투스" 외 에도 많은 이방 신들에 대 해서 마치 그 들이 실체로 존재한 양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기독교인들이 그의 진술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단편적인 발상인 것 같다. 그의 진술은 당시 시중에 유포된 예수 신화 또는 로마 정부의 기독교도 심문 과정을 토대로 씌어졌다고 보는 것이 주된 흐름이다.

 

ii)청년 플리니 (Pliny the Younger)

그는 AD 62년에 태어나 113년에 생을 마감했다. 예수님과 대략 30 년 간격을 두고 생을 시작한 셈이다. 전기한 노인 "플리니"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는 로마 인으로 소 아시아의 "비티니아" 지역의 총독을 지냈다 (AD 111 - 113). 탁월한 문장력과 웅변력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스스로 당시의 서신들을 모아 9 권의 책으로 편찬 하기도 하였는데, 그와, 당시의 "트라잔" 로마 황제 사이에 오고 간 공식 서한들이 10 번째 책으로 그의 사후에 발간 되었다. 그의 편지 중 그의 친구인 역사가 "타시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다. 여기서 그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에 대해 쓰고 있다.

이 편지들은 1 세기 당시 상황을 알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트라잔"황제와 교신한 공식 편지 중 "크리스쳔"이 언급된 편지가 있다. 이 "트라잔"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크리스쳔들의 죄과에 대해 조언을 구 하고 있으며, 모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면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Christ)를 저주 하였다며, 그 들의 처리 문제에 대해 지도를 요청 하고 있다. 그의 편지는 대략 AD 112 년 경 소아시아에서 씌어 졌다고 보인다.

 

"플리니"의 편지 1096-97 ) "트라잔"황제에게"

"황제 폐하, 확신이 서지 않는 사안들에 대해 폐하에게 문의 드립니다. 한번도 "크리스챤"들을 재판 해 본 적이 없기에, 어떤 행동을 어느 선 까지 처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이 별로 또 성 별로 차이를 두어야 할지, 또 전향하는 자들에게 사면을 내려야 하는지, ......처벌을 경고 하였는데도 완강히 전향을 거부한 자들은 처형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들 중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로 압송 하도록 하였습니다........무명의 투서들이 들어 오고 있습니다........"크리스쳔"임을 부정한 자들은, ....... 폐하와 우리 신들의 초상화에게 향과 포도주를 바치며 경배 하였는데, 그들은 석방 해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그들은 모두 폐하의 초상과 우리 신들의 형상에 경배 하였고 "그리스도"를 저주 하였습니다.........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 특정한 날을 정해 집회를 가지며, "그리스도"를 찬양 하기를 마치 신께 찬양 드리듯이 하며, 거짓말, 도둑질, 간통.....등을 행 하지 않을 것을 서약 하며............ 본인은 정치적 집회를 금지시킨 바가 있어.........집사 직분을 가진 두 여성 노예를 고문해 보았지만, 도가 지나친 미신 숭배 외에는 별로 특기할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수사를 보류한 채 각하의 가르침을 기다림니다........이 미신 분파는 도시는 물론 시골과 농장에 까지 번졌습니다. 하지만 이를 정상으로 회복시킬 길이 있습니다. .......전향의 기회가 주어지면 많은 신도들이 개과 천선 하리라 예견되는 바입니다."

 

"트라잔" 황제의 답신:

"내가 총애하는 "플리니"여, "크리스챤"으로 비난 받는 자들을 정밀 조사 하였다니, 그대는 매우 합당하게 행동 하였다........... 누구던지 "크리스챤"임을 부정 하고 우리의 신들게 경배 드리는 자들은 참회함으로 사면을 받게 하라. 하지만 나의 통치 하에서 무명의 투서는 용납되지 않음을 명심 하라. 이러한 작태는 위험한 선례를 남기게 되며 우리 새 시대의 정신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 왕래된 서신들이 역사적 실체로서의 예수를 증거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크리스천이라는 종파가 있었음과, 혹자가 처형을 면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저주 했다는 것 뿐이다. 그 외에 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 그의 행적은 어떠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당시 "그리스도"는 어느 특정 개인의 이름으로 씌여지지 않았다. 구세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 하며 직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관념적 용어로 쓰여졌다. 서신 중에 나오는 "그리스도"라는 단어 하나를 들어 예수 실존의 증거로 제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iii) 수에토니우스( Suetonius)

그의 저서 "황제들의 생애"에서, 그는 "클러디우스" 황제가, "크레스투스" (Chrestus) 라는 인물의 선동 하에 사회 질서를 문란 시킨, 로마의 유태인들을 추방한 것을 서술 하고 있다. 그의 생존 연대는 AD 75-AD 150년으로 추정 되는데 상기의 추방은 AD 49년 경의 일 이었다. 이 추방은 사도 행전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사도 행전 18:2.  "아굴라"라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 (클러디우스 황제) 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수에토니우스"의 진술"

"크레스투스"라는 자의 선동 하에 유태인들이 지속적으로 혼란을 야기시키므로, "클러디우스"황제는 그 들을 로마에서 추방 하였다"

여기에서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지칭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크레스투스"는 그리스 언어의 "크레스토"(Chrestos)에서 전래 된 것으로 "쓸만 한, 이용 할만 한, 좋은" 의 뜻을 갖고 있으며, 당시 노예 계층에서 유행 했던 이름이다. 반면에 "크리스투스" (Christus)는 그리스 원어로는 "크리스토" (Christos)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를 뜻한다.

혹 철자 법이 틀리게 기록 되었다고 가정해도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예수는 AD 30 년경에 이미 처형 당했으므로 로마에 나타나 그곳의 유태인들을 선동 했을 리 만무하다. 또한 예수 처형 후 불과 20년 만에 로마에까지 그의 가르침이 전파되어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났다고 볼 수도 없다.

위의 문구는 예수와는 둘째치고, 기독교 조차 와도 아무 관계가 없는 기록으로 간주된다.

 

iv) 탈루스 (Thallus)

"사마리아"출신의 역사가로 "트로이" 전쟁 부터 AD 52년 까지의 역사를 기록 했다고 전 해진다. 물론 그의 저서는 실종되었고 예수를 언급한 부분이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전 해졌다.

AD 221 년경, 기독도인 "아프리카누스"는 예수 처형 당시 하늘이 어두워 진 것과 관련 해 다음과 같이 서술 하였다. 

"탈루스"는 그의 역사 저술의 세 번째 책에서 이 암흑을, 일식 현상으로 설명 했는데 나에게는 매우 이상스러운 설명이었다."

이상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예수는 유월절에 처형 되었다고 전 해지고. 유월절 주기는 일력이아닌 월력(음력)으로 계산되는 주기이며. 유월절 주기는 항상 보름달이 뜰 때이며. 보름달이 뜬다는 것은 지구가 달과 해의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일식은 일어 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천문학에서 역으로 계산해 올라가 보아도 그 당시 일식 현상은 없었다고 사료된다. 앞에 서술했던 노인 "플리니"와 연관해서 생각 하시도록.

 

v)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

전기 한 대로 "요세푸스"라는 인물의 기록은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예수가 활동 했다고 믿어지는 시기의 사회 상황에 관하여 아주 자세한 역사 기록물을 남겨 놓았다.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더듬어 가며 이야기를 전개 하고자 한다. 그의 생애는 그의 자서전도 있지만 가톨릭의 백과사전 ( Catholic Encyclopedia)에서 발췌 했다.

그는 AD 37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명문 성직자 가문을 잇는 그의 혈통은 외가 쪽으로는 "마카비" 왕조와도 닿아 있다. 비상한 기억력, 판단력을 겸비한 그는 명문의 교육까지 받았다. 어린 나이에 이미 당대의 주류를 형성 했던 정치 종교적 집단인 "바리새"파, "사두개"파, 및 "에쎄네"파를 두루 섭렵 하였다. 입신 양명을 위해 그는 "바리새"파에 가입 하였지만 그들의 종교적 가르침이나 정치적 관점을 수용 하지는 않았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그는 AD 64년에 로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감옥에 갇힌 한 유태인의 사면을 "네로" 황제에게 탄원하기 위함이었다. 황제의 처 "사비나"의 환심을 삼으로 그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로마 대제국의 선진 문명을 접한 그는, 유태인의 선민 의식과 종교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이방 문화를 거부하는 유태인들의 노력을 쓸모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돼, AD 66 년에 유태인 대반란이 시작되었다. 독립 운동 초기에는 그도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반란에 반대 하였다. 하지만 반란 세력이 득세 기미를 보이자, 다른 성직계급의 인물들과 반란군에 가담하였고, "갈릴리"지방의 총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반란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요세푸스"는 그의 정치적 외교적 그리고 군사 전략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주력 부대가 "안티옥"에서 "갈릴리"로 밀려 왔고, 6 주간에 걸친 사투 끝에 물과 식량이 바닥났다.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많은 유태 애국자가 죽음을 맞았지만, "요세푸"스는 입구를 봉쇄한 물 저장 탱크에 숨어 화를 면했다.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로마 총 사령관, "베스파시안"의 언질을 받고 나서야 물 탱크에서 나온 그는 장군과 장군의 아들 "티투스"가, 곧 로마의 황제 격이 되리라고 예언 하며 목숨의 보존을 꾀 했다. 하지만 장군은 그를 옥에 가두었다.

AD 69년 "베스파시안"은 실제로 황제에 오르게 되고, 그제야 "요세푸스"를 사면 하게 된다. 그후 그는 황제와 이집트까지 동행 하였고,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유태 반란을 징벌 할 때에 그와 동행 하였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고 짓 밟히는 사건의 목격자인 셈이다. 그는 유태인들에게 항복 할 것을 권했고, 성전이 함락 당한 후에는 "티투스"와 "로마"로 돌아와 연금도 받고 "주데아" 지방에 토지도 하사 받는다.  왜 많은 유태인들이 그를 매국노로 변절자로 낙인 찍는지 이해를 할수있다.

뒤를 잇는 "티투스" 황제, "도미티안" 황제, 모두 그를 총애했다. 덕분에 그는 저술에 전념 할 수 있었다. "트라잔" 황제 통치하에 세상을 떠났다. AD 101년 경이다.

 

그의 저서는 그리스어로 씌어 졌고 유다이즘과 이방 문화의 중간 노선을 표방한 관계로 유태인들은 그를 원칙이 없는 자 또는 위선자로 부른다.

그의 첫 번째 저서로는 "유대인 전쟁"이 있다. 여기서 그는 AD 66-73년에 일어난 독립 투쟁사를 기록 하고 있다. 이 기록이 아주 세밀한 것은, 본인 자신이 그 전쟁의 와중에 중요 인물로 활동 했기 때문이다. 이 책중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두 번째로 그의 자서전이 있다. 자신의 출생 배경 부터 시작 해서 자신의 합리화와 미화를 꾀하고 있다.

세 번째의 책 "유대인 연대기" (Jewish Antiquities)다. 이 책이 바로 우리 관심의 초점이다. 예수에 관한 구절이  현존하는 이 책의 모든 복사본들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담"과 "이브"로 시작되어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 시대, 출애굽을 망라하며 독립 전쟁 직전 (AD 66년) 까지의 유태인 역사를 서술 하고 있다. 책 뒷 부분에 문제가 되는 예수 인용구가 있는데 그 내용들을 보기로 하자.

"유태인 연대기" 20 번째 책 9장 1절 (이하 "형제"구절로 부르기로 한다)

"유태 지방의 행정 장관 "페스투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황제는 "알비누스"를 그 후임으로 파송 한다. 그 와중에 "아그립파" 왕이 "조셉"의 대 제사장 직을 박탈하고 "아나누스"의 아들 또 다른 "아나누스"를 그 자리에 임명한다..... 그는 "사두개"파로 범법자를 다루는데 매우 엄하였다. ........그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하여 "산헤드린" (Sanhedrin - 바빌론 유배 이후 생겨난 제사장, 법관들의 회의로 종교적 문제, 사법, 형법을 다루는 최고 기관)을 소집 한다. "페스투스"는 죽었고 "알비누스"는 아직 노상에 있음을 기회로, 그는 즉 구세주라 칭함 받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 (야고보)"와 몇몇 다른 인물들을 산헤드린 앞에 소환한다. 그들을 정죄 하여 돌에 맞아 죽게 한다. 의식 있는 시민들이 이를 못 마땅히 여겨 왕에게 탄원하고, 그중 몇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고 있는 "알비누스"에게 마중을 나가, 그에게 행정 장관의 동의 없이 소집 된 산헤드린의 불법성을 고한다. ..... "알비누스"가 대노하여 서신을 보내자, "아그립파" 왕은 "아나누스"의 대 제사장 직을 박탈하니 그가 대 제사장 직을 수행 한 지 3 개월 만이다. 그 뒤로 "댐네우스"의 아들 "예수"(다른 예수임, 당시 예수라는 이름은 상당히 흔한 이름 이었음)가 대 제사장이 된다"

문제의 구절만 다시 본다

"즉 구세주라 불리는 예수의 형제 제임스 (.... brought before them the brother of Jesus, who was called Christ, whose name was James) 이 짧은 구절 속에 나타나는 예수는 성경 상에 나타나는 예수를 지칭 하고 있는 것 같다. "구세주라 불리는" 구절과 "...형제 야고보" 의 구절이 그것을 입증 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또 하나의 구절을 보자. "연대기"를 통 털어 예수 인용구는 이 두 구절 뿐 이다.

"유태 연대기" 18 번째 책 3장 3절 ( "요세프스의 증언이라 하며 이하 "증언" 구절로 부르기로 한다)

" 이즈음, 놀라운 일 들을 행하며 진리를 기쁨으로 받는 이들의 선생이었던 관계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현자였던 예수가 있었다. 그는 많은 유태인과 이방인들을 끌어 모았다. 그는 구세주였다. 우리 중에 주요 인물들의 요청에 따라서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처형 했을 때, 그를 사랑 했던 이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미리 부활과 수 만가지 그에 관한 이적들을 예언 한 대로, 그는 제 3일에 살아 나서 그들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크리스천이라는 집단은 오늘날 까지 존속되고 있다."

얼마나 자세한 서술인가!

영어로 다시 보고 쉬운 우리 말로 다시 풀어 읽어 보자. 영어 해독에 문제 있으신 분은 해석만 보아도 무방하다.

Antiquities 20.9.1:

"Now there was about this time Jesus, a wise man, if it be lawful to call him a man, for he was a doer of wonderful works, a teacher of such men as receive the truth with pleasure. He drew over to him both many of the Jews, and many of the Gentiles. He was the Christ: and when Pilate, at the suggestion of the principal men amongst us, had condemned him to the cross, those that loved him at the first did not forsake him, for he appeared to them alive again the third day, as the divine prophets had foretold theses and ten thousand other wonderful things concerning him; and the tribe of Christians, so named from him, are not extinct to this day"

"그 무렵에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워낙 이적도 많이 행하고 훌륭한 선생이어서, 사람이라고 여길 수 가 없을 것 같다. 만약에 사람으로 분류 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현인이었다. 많은 유태인과 이방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심복 하였다. 그는 구세주 였던 것이다. 우리가 빌라도 총독을 움직여 그를 십자가에 매 달았지만, 그는 3일만에 부활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 앞에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이루어 졌다. 크리스토의 이름에서 연유된 크리스천이라는 무리들이 이런 연고로 오늘 날 까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와 얼마나 정확히 부합되는 묘사인가?

이 두 구절로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은, 중립적 객관적인 역사 학자인 요세푸스에 의해 증명된 것은 아닐까?

대답은 "글쎄요?"이다.

우선 이 구절들에 대한 논란의 역사적 배경을 "골드버그"의 서술로 먼저 간단히 훑어 보자.

 

"유태인 연대기"는 AD 93년에 로마에서 발간 되었다.

93년에 발간된 원본들에도 문제의 "형제"와 "증언" 구절이 들어 있었을까? 연대기는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원본들의 권말에는 "티투스" 황제가 직접 서명을 해 주었고, 발간을 윤허 하였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 원본들이 아니다. 

원본들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세대에 전해 내려 온 것은 이 원본을 베껴 쓴 복사 본들이다. 그나마 가장 오래된 복사본도 10세기 경의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거의 1000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손을 거쳤는지, 얼마나 충실되게 우리에게 전달 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과연 1세기 말의 연대기와 10세기에 만들어진 복사본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당시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이고 당연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 이었음을 명심 하시라.

 

요세프스 기록에 대한 학자들의 비평.

230-250년 : 기독도 저술가 "오리겐"이 처음으로 "형제" 구절을 인용하다. 또 그는 "요세푸스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 하다. "증언"구절에 대해서는 "오리겐"은 모르고 있었다. 즉 "오리겐"이 읽었던 "연대기"에는 "증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324년 : 추기경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증언" 구절을 인용하다. 이 내용은 현존하는 복사 본들의 내용과 거의 다름이 없다.

10세기 : 아랍 역사 학자 "아가피우스"가 "증언" 구절을 인용 하다.

"아가피우스"는 아랍인 기독교인이었으며 추기경이었다. 그의 인용구는 "유세비우스"의 인용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기독교 취향이 훨씬 제거된 그의 인용 구를 쉽게 풀어서 다시 보자.

"유태인 통치에 관한 저술에서 유태인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즈음 예수라 불리는 현자가 있었다. 그의 행실은 의로웠으며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많은 유태인과 이방인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빌라도"가 그를 처형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제자 직분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예수는 3일만에 부활 해 그들 앞에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는 아마도 선지자들이 예언 했던 구세주였던 것 같다"

16세기 : 1500 여년 동안 아무도 의심 하지 않아 오다, 16세기에 들어 와서야 "조셉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증언"구절의 진위를 의심 하기 시작 하였다.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 이었다.

17세기 : "리차드 몬테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 였다"라는 구절이 훗 날 기독교도가, 복사 과정에서, 덧 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 하다.

1737년 : "위스튼"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 하다. "요세푸스"가 유태인 기독도 이었을 수 도 있다고 하다. 따라서 "증언"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 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 하다.

18세기 - 20 세기 초반 :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 되었다고 주장 하다.

1929년 : "대커리"가 위조 설을 지지 하다. 그는 또 "누가 복음"과 "연대기"에 공통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요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얘기 하다.

1931년 :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 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 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 하다.

1941년 :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 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 하다고 주장 하다.

1954년 :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 뿐이며 나머지는 정확 하다고 주장 하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 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년 : "콘젤만"이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증언"의 공통성을 발견하다. 따라서 "증언"전체가 기독교도에 의해 위조 됐다고 주장 하다.

1963년 :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 하다고 단정 하다.

1971년 : "파인스"가 9-10 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 (상기한 "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 하다.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 하다.

1973-1983년 :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 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하다.

1984년 :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 체계를 이용 하여 "증언"의 문체를 분석 하다.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증언"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 하다.

1991년 :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 하다. 즉 세 군데 만 위조 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 하고 있다.

1995년 : "골드버그"가 "증언"과 누가 복음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 (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 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 하다. 따라서 "증언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 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다는 것이다.

"골드버그"의 연구를 보실 수 있다. 컴퓨터를 동원하고 통계학의 개념들을 이용 하여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다. 물론 그의 연구 결과는 예수 신화 설과 상치된다.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원본 그대로 라면, 그 자체로 예수의 실체적 존재는 객관적인 역사 학자 요세푸스에 의해 증거 되기 때문이다. 다음 기고에서 조금 더 다루어지지만 최근 성경 탐구의 수준을 직접 보시고 싶은 독자의 접속을 권함.

이제 대략 논란의 역사를 보시고 독자 제위는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 거의 모든 학자들이 부분적이건 전체적이건 위조가 있었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다.

신화파에서는 전체가 다 위조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1. 먼저 께름직 한 것은 "연대기"의 복사 본들이 전부 기독교인들의 관리 하에 전수 되었다는 것이다.

2.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은 왜 "요세푸스"의 저술을 인용하지 않았는가? 초대 기독도들은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각 종파로 부터 많은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 실존과 그의 놀라운 기적들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받았고, 이러한 과정은 본인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좋은 증거물을 제시 하지 않았다.

"증언"구절은 324 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용 되었다.

"형제"구절은 그전에 "오리겐"에 의해 230-250년 사이에 와서야 처음으로 인용 되었다.

연대기가 발간된 게 93년경 이니까 거의 140-250년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기독교 변증가들은 연대기를 읽지 않았을까? 

연대기는 초대 기독교도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그 책을 읽었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도, 무수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인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읽었던 사본에는 문제의 구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백년이 넘도록, "요세푸스"의 저술을 잘알고 있던 초대 교부들은 상기의 증언 귀절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동 구절이 "요세푸스"의 저술에 있었다면 그들은 도전자들과의 논쟁에서 그것을 재빨리 인용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동 구절은 그 저술에 없었다. "요세푸스"를 읽어 본 "오리겐"도 "요세푸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서술했다. 동 구절은 기독교 최초 역사가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언급 되었다. 동 구절은 그의 조작으로 사료 된다. "유세비우스"는 신앙의 명분 아래 문서 변조를 지원 하였고 "요세푸스"외의 여러 저술가들의 책들도 변조 시켰다" - 마샬 거빈 (Marshall J. Gauvin).

3. "오리겐"은 "형제"구절은 읽었는데 "증언"구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 따라서 "증언" 구절은 그 후에 첨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4. "요세푸스"의 책 "유태인 전쟁"은 "안티오쿠스"의 예루살렘 점령 부터 AD 70 년의 예루살렘 함락 까지의 내용을 "유태인 연대기" 책에서 그대로 복사하고 있다. "빌라도"가 군중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 등 다른 부분들은 거의 동일하게 서술 되었는데 "유태인 전쟁"에서는 유독 상기의 예수 인용구들만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5. "유세비우스" 추기경이 처음으로 인용한 "증언"은 "조셉 웰레스"에 의하면 본인 스스로의 작품 이었다고 한다. "조셉 웰레스"는 많은 연구 끝에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하던 문서 변조의 행태를 캐어 낸 인물이다. 그는 문서 변조의 대표자로 "유세비우스" 추기경을 꼽았다.

"유세비우스" 본인의 말을 보자.  "우리의 구세주에 관하여, 내가 이미 생산(?) 해낸 이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 하다. 하지만 유태인 "요세푸스"를 여분의 증인으로 이용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Eusebius, Evamgelical Demonstration, Book III. p.124)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솔직한 고백인 셈이다. 이래서 "조셉 윌레스"는, 기독교의 문서변조를 증명하기가 "예상 밖으로 쉬웠다"고 하였다. "문서변조의 증거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교부들 자신의 서술과 가톨릭의 교회사에 적나라 하게 들어나 있다"는 것이었다. 

"조셉 웰레스"의 저서 "기독교의 문서 변조" ( Forgery in Christianity) 와 "성경은 신의 말씀인가?" ( Bible, Is it God's words ?) 두 권을 추천 한다. 

독실한 기독도 였던 그는 변호사로써, 법학자로써 바쁜 와중에도 성경을 깊이 공부하였다. 상기의 예수 인용구가 부분 위조인가 전체 위조인가에 대한 논쟁은  "얼 도어티"와 "피터 커비"두 사람의 불꽃 튀는 논쟁에서 볼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진지한 학구파로써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요세푸스" 건에 관한 논쟁은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라고 솔직히 저의 의견을 말씀 드린다. 어떤 획기적인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 질 때 까지는 훌륭한 논쟁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논란이 있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요세푸스"에 의한 증거는 불 충분한 것 임을 지적 하고 싶다. 증거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한 이상 "요세푸스"의 저술은 더 이상 액면 그대로 채택 되어서 는 안된다는 것이다.(옮겨온 글 일부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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