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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王維의 送別詩 5首

by 까마귀마을 2023. 8. 10.

送別 (송별)

山中相送罷 (산중 상송파) : 산 속에서 서로 배웅하여 보내고 쉬는 데
日暮掩柴扉 (일모 엄시비) : 날이 저물어 사립문을 닫았네
春草明年綠 (춘초명년록) : 봄철에 새로 돋은 풀은 내년에도 초록빛 비단이겠으나
王孫歸不歸 (왕손귀불귀) : 임금의 후손은 돌아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니

 

註.

相送 : 서로 배웅하여 보냄.

罷 : 쉬다.
日暮 : 날이 저물다.

掩 : 닫다.

柴扉 : 사립짝을 달아서 만든 문.
春草 : 봄철에 새로 돋아나는 부드러운 풀.

綠 : 초록빛 비단.
王孫 : 임금의 손자 또는 후손.

 

이 詩는 왕유가 친구를 이별하며 쓴 送別이란 제목의 詩 여러 首중 하나이다.

형식은 오언절구체로 짧지만 시는 조용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이 시는 친구를 이별하는 광경이나 슬픔으로 시작하지 않고 친구가 떠난후의 모습과 심정으로 시작된다.

다른 시에서 본 이별시와는 다른 구성이다. 도대체 이별이 슬픈 건지 아닌지 말하지도 않으며.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에 맡기는 것이다.

시인은 친구와 이별하고 날이 저물자 조용히 사립문을 닫는다.

오늘 아침까지도 그와 함께 있었던 집이다. 그러나 오늘 저녁 문을 닫음은 그는 가고 나만 안에 홀로 남아있음이다. 함께 살던 사람이 떠나버린 경험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어제까지, 아니 아침까지 그와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얘기하고 함께 했던 공간이 텅 비어버린 느낌을 말이다.

사립문이 닫힌 공간에 가득 찬 적막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정적을 응시하며 시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봄풀은 내년에도 돋아나 푸르련 마는 친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같아 친구와의 이별이 더 슬펐으리라.

3, 4구는 楚辭(초사 : 굴원· 송옥 등 초나라 사람들의 사부와 한나라 사람들의 모방작을 모아놓은 것으로, 전한시대 유향 편찬했다. 총집 중의 사부는 모두 초나라 지방의 문학양식과 방언음운을 사용했고, 또 그 지방의 풍물을 많이 묘사하여 짙은 지방 색채를 띠고 있음)의 초은사(招隱士)편을 보면 "왕손은 멀리 떠나 돌아오지 않고, 봄풀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라는 구절을 인용한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의 구성을 살펴보면 극히 평범한 소재의 구성이다. 언어 역시 화려한 수식하나 없이 자연적인 배열을 갖추고 있다. 운용방법 역시 대단히 소박하여 전환, 역전 등의 놀래킴도 없다. 그러나 시를 다 읽고 났는데도 그 진지한 감정의 여운이 이렇게 오래 남는 것은 왕유 특유의 필법과 도인의 품격을 갖춘 이별시이기 때문이리라. 친구의 소중함은 가까이 있을때 보다 헤어진 뒤에야 진가를 알수있는 법이다.(옮겨온 글 정리)

 

 

送別 (송별)

下馬飮君酒 (하마음군주) : 말에서 내려 자네와 술을 마시며

問君何所之 (문군하소지) : 어디로 가야하나 물었더니

君言不得意 (군언부득의) : 자네 말하길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歸臥南山 (귀와남산수) : 벼슬을 내놓고 남산의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내려 하네

但去莫復問 (단거막복문) : 부질없이 떠나니 더 묻지 않으리

白雲無盡時 (백운무진시) : 흰구름 끝이 없으니 좋으이.

 

註.

君 : 자네.

何所之 : 어디로 가나

不得意 :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다.

歸臥 :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지냄.

陲 : 끝간 곳, 또는 모퉁이

但 : 부질없이.

莫 : 말라.

無盡 : 끝이 없음.

時 : 때를 뜻하나 여기서는 좋다.

 

친구가 은둔처로 떠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친구가 그 곳에서 '흰구름'과 함께 생활하기를 축원하는 유유자적한 풍류의 정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처럼 은자의 세계를 노래하면서도 자연 관조적이고 낙천적인 풍류의 정신이 잘 집약되어 있는 점이 왕유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送別 (송별)
送君南浦淚如絲 (송군남포루여사) : 남포에서 자넬 보내고 눈물이 실 같았고

君向東周使我悲 (군향동주사아비) : 자네는 東周로 향하고 나로 하여금 슬프게 하네

爲報故人憔悴盡 (위보고인초췌진) : 고인에게 급히 가게 되어 까칠하기가 한도에 이르렀고

如今不似洛陽時 (여금불사낙양시) : 지금은 낙양 때와 같지 않다네.

 

註.

東周 : 주나라가 견융의 침입으로 지금의 뤄양 부근으로 도읍을 옮긴 뒤 붙인 국호.

使 : 하여금.

報 : 급히 가다.

故人 : 죽은 이.

憔悴 : 까칠하다.

盡 : 한도에 이르다.

如今 : 지금. 이제. 오늘날.

 

 

送綦毋潛落第還鄕(송기무잠낙제환향) 과거에 낙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무잠을 송별하며

 

聖代無隱者(성대무은자) 태평한 시대엔 은자(隱者)가 없어

英靈盡來歸(영령진래귀) 인재들 다 조정으로 모여들고

遂令東山客(수령동산객) 동산에 숨어사는 이조차도

不得顧採薇(부득고채미) 고사리 캐며 살지 못하게 하였구나

旣至金門遠(기지금문원) 장안에 온 뒤 금마문(金馬門) 멀어졌지만

孰云吾道非(숙운도도비) 누가 우리 길을 그르다 할 것인가

江淮度寒食(강회도한식) 강회(江淮)에서 한식절 지냈는데

京洛縫春衣(경락봉춘의) 낙양에서는 봄옷을 짓고 있다

置酒長安道(치주장안도) 장안의 거리에서 술자리 마련하고

同心與我違(동심여아위) 마음의 벗 그대와 헤어지게 되었네

行當浮桂棹(행당부계도) 그대는 곧 노를 저어 가서

未幾拂荊扉(미궤불형비) 머지않아 사립문 두드리겠지

遠樹帶行客(원수대행객) 멀어지는 나무들 나그네 데려가고

孤城當落暉(고성당락휘) 외로운 어느 성엔 석양이 비추리라

吾謀適不用(오모적불용) 우리 계획이 어쩌다 쓰이지 못했을 뿐

勿謂知音稀(물위지음희) 지음(知音)이 적다고는 말하지 말게나.

 

註.

綦毋潛(기무잠) : 綦毋(기무)는 성이며 潛(잠)이 이름이다.

英靈盡來歸(영령진래귀) : 현재(賢才)들이 모두 조정에 임용됨을 뜻한다.英靈(영령)은 걸출한 인재를 일컫는다.

東山客(동산객) : 은자(隱者)를 비유한다.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 은거한 데서 유래된 말로, 동산(東山)은 회계(會稽)에 있다.

採薇(채미) : 伯夷(백이) 叔齊(숙제)가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金門遠(금문원) : 한무제(漢武帝)가 대완마(大宛馬)를 얻어 그 모습을 동상(銅像)으로 제작하고 서문(署門)에 세워 두었다. 그러므로 금마문(金馬門)이라고 이름하였고, 줄여서 금문(金門)이라고 하였다.금마문이 멀어졌다.’고 한 것은 과거시험에 낙방했음을 뜻한다

江淮(강회) : 강수(江水)와 회수(淮水)이다. 기무잠은 형남인(荊南人)이기 때문에, 강수(江水)와 회수(淮水)는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寒食(한식) : 명절의 하나이다. 동지가 지난 뒤에 105일이 되는 날인데, 양력으로 4월 5일이나 6일쯤 든다. 예전에 나라에서는 이날에 종묘와 각 능원에 제향을, 민간에서는 조상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한식(寒食)이라는 명칭은, 이날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는다는 옛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京洛(경락) : 낙양(洛陽)이다.

長安道(장안도) :장안(長安)은 당(唐)나라의 수도로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이다.

同心(동심) : 뜻을 같이 하는 친구를 가리킨다.

行當(행당) : 곧, 즉시.

適(적) : 偶然의 뜻이다.

知音(지음) : 상대방이 연주하는 음악의 뜻을 알아듣는 것으로, 서로 마음을 알아줌을 비유한다. 옛날 백아(伯牙)가 마음속에 높은 산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鍾子期)가 이것을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높고 높음이 태산과 같다.[善哉 峨峨若泰山]” 하였으며, 마음속에 흐르는 물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가 이것을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너르고 너름이 강하와 같다.[善哉 洋洋若江河]” 하였다. 《呂氏春秋》 〈孝行覽第二 二曰本味〉

 

이 시는 기무잡(綦毋潛)이 낙제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다. 낙제자를 위로한 시는 당시(唐詩) 가운데 매우 보편적인데, 왕유의 送綦毋潛落第還鄕은 시의(詩意)가 진실하고 간절하며 정감이 풍부하다.

기무잠은 자가 효통(孝通)이며 형남(荊南) 사람이다. 그의 나이 34(開元 14, 726)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新唐書(신당서)》 〈藝文志(예문지)에 기록이 보인다. 기무잠은 왕유가 지은 이 시에 고무되어 진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태평시대에는 은자가 없는 법이니, 현재(賢才)들은 모두 조정으로 모여든다. 이때에는 사안(謝安)처럼 동산(東山)에서 은거하는 인사들이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아가지 않도록 한다. 그대가 장안에 와서 과거에 낙방하여 금마문은 오히려 저렇게 멀어지고 말았지만, 누가 우리들의 이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겠는가? 기회를 만났지만 성취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대가 고향을 떠나 과거에 응시했을 때는 강회(江淮)를 지나며 그곳에서 한식(寒食)을 보냈는데, 지금 장안과 낙양 일대는 또 봄옷을 지을 때가 되었다.(江淮寒食(강회한식) 京洛春衣(경락춘의)는 산 넘고 물 건너 와서 서울에 1년을 머무르고 나서야 비로소 돌아가게 됨을 말함)

오늘 나는 장안의 거리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그대를 전별하니, 뜻을 같이 하는 친구와 헤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곧 배를 타고 가서 오래지 않아 고향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겠지. 먼 곳에 있는 나무는 멀리 가는 나그네를 데리고 가고, 그대가 이르는 어느 외로운 성에는 석양의 남은 빛이 비추리라. 우리들의 지모(智謀)가 비록 한때에 쓰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知音이 적다고 탄식하지는 말게나!(옮겨온 글 정리)

 

 

送劉司直赴安西(송류사직부안서) 안서로 부임하는 유사직을 보내며
 

絶域陽關道 (절역양관도) 머나먼 이역 양관 가는 길은

胡沙與塞塵 (호사여새진) 오랑캐 땅의 사막과 변방의 먼지 뿐이리

三春時有雁 (삼춘시유안) 봄에는 때로 기러기 있다 해도

萬里少行人 (만리소행인) 만 리 먼 길에는 행인도 없으리

苜蓿隨天馬 (목숙수천마) 개자리는 천마를 따라 들어왔고

葡萄逐漢臣 (포도축한신) 포도는 한나라 사신을 따라 왔네

當令外國懼 (당령외국구) 응당 외국이 두려워하도록 해야하고

不敢覓和親 (불감멱화친) 화친은 도모하지 말아야 하리

 
註.

劉司直 : 사직은 관명으로 각 지방을 순찰하여 형벌의 형평성을 감독하는 역활

絶域 : 먼 지역, 서역

苜蓿 : 개자리, 말먹이 풀, 서역서 들여옴

天馬 : 서역의 명마

葡萄 : 서역이 원산지

不敢 ; 감히 하지못함

覓 : 탐하다

和親 : 왕실과 혼인 맺는것

 

그 外 왕유가 지은 송별시중 송별시로 唐詩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위성곡 (渭城曲) 또는 마지막 구절의 ‘양관(陽關)’이란 단어를 따서 ‘양관곡(陽關曲)’으로도 부르는 즉 送元二使安西 (송원이사안서)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위성곡은 저의 블로그 위성곡을 검색하시면 상세한 내용을 알수 있습니다.

  블로그 주소 :  渭城曲 (위성곡) (tistory.com)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 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734년에 수도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에 올랐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중난 산[終南山]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왕유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왕유의 예술은 당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그림 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채택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나,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생존시에 설경산수화로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 輞川圖>라는 화권(畵卷)이다.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기록상 그의 작품에서 발묵(潑墨) 기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것을 함께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세에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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