落花流水(낙화유수)
원래는 가는 봄의 풍경을 묘사 하였지만 후대에 뜻이 변하여 여러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쇠잔영락(衰殘零落).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쇠락해져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뜻을 담고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집단의 세력이 약화되고 생활여건이 전과 같지 않다는 비유, 그리고 중국에서는 전쟁이나 정쟁(政爭) 경기에서 패배한 사람의 처지를 비유하는 말로도 쓰여진다고 한다.
그리고 낙화유수란 말은 남녀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말로도 쓰였다. 짝사랑, 즉 '떨어지는 꽃은 마음이 있지만 흐르는 물은 무정하네 (落花有意 流水無情 낙화유의 유수무정)란 의미로 쓰이기도 했으며, 서로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하기도 했다.
落花流水라는 성어는 唐나라 시인 고변(高駢=고병)의 시(詩)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의 첫구절,
落花流水認天臺(낙화유수인천대)" 꽃이 떨어지고 물이 흐르니 세상의 넓음을 알겠구나" 에서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꽃이 떨어져 물위로 흐르다의 뜻으로 늦은 봄의 풍경을 나타내고 있으며 (고변의 詩 訪隱者不遇는 따로 올림)
또한 唐나라 시인 李群玉(이군옥)이 秦煉師(진련사)라는 은사가 岑公山(잠공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송별하면서 쓴 詩 "奉和張舍人送秦煉師歸岑公山(봉화장사인송진련사귀잠공산)의 마지막 구절.
"落花流水怨離襟 (낙화유수원이금)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떠나가는 게 원망스러워" 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이군옥의 詩는 아래 별도로 올림)
그리고 오대십국시대의 十國[십국] 중 하나인 南唐(남당)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인 이욱(李煜)의 사(詞) 낭도사(浪淘沙)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流水落花春去也 天上人間(유수낙화춘거야 천상인간)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봄이 가니 하늘의 인간 세계로다"(시 내용은 아래 따로올림)
또한 조선중기 문신인 최립(崔岦, 1539~1612)은 1594년 사행길에 명나라 무령 땅을 지나며,
‘殘雪斷氷今日路 落花流水去年村' (잔설단빙금일로, 낙화유수거년촌) '오늘 길엔 잔설에 얼음이 떠다녀도, 지난해 마을에는 떨어진 꽃잎이 떠갔었네' 라고 노래했다.(이형로의 고사성어로 보는 세상, 일부참조)
訪隱者不遇(방은자불우) 은자를 찾아 갔으나 만나지 못하다
落花流水認天臺(낙화유수인천대) 꽃 떨어지고 물 흐르는 데서 넓은 세상 알았거니
半醉閑吟獨自來(반취한음독자래) 반쯤 취하여 한가롭게 시를 읊으며 홀로 찾아왔네
惆愴仙翁何處去(추창선옹하처거) 슬프구나 선옹이 어디로 갔는가
滿庭紅杏碧桃開(만정홍행벽도개) 붉은 살구꽃과 푸른 복숭아 꽃만 활짝 피어 뜰에 가득하구나.
------ 高騈(고변)-----
*高騈(고병, 唐:821-887)
중국 당(唐)나라 말기의 절도사(節度使). 자는 천리(千里), 유주(幽州) 출생이다.
금군(禁軍)의 장교에서 출발하여 안남도호(安南都護)·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를 역임하였고, 당항(黨項)과 남소(南詔)의 토벌에 공적을 세웠다. 광명 2년(881년) 고병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자 최치원은 도통순관으로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7월 8일에 반란의 수장 황소를 꾸짖는 격문, 이른바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삼국사기》는 이때 최치원의 격문에서 "천하의 모든 사람이 너를 죽이려 의논할 뿐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는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그만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졌다고 적고 있다.
이 격문으로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당 전역에 퍼졌으며,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으로서서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병은 희종 중화 2년(882년) 정월에 출병할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제도행영병마도통직에서 파해졌지만, 이후로도 최치원은 고병 개인의 종사관으로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계원필경》은 바로 이때 최치원이 지은 글과 여러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황소(黃巢)의난 때는 절동(浙東)에 침공하는 황소군을 격파하여 푸젠 福建(복건) ·광둥[廣東(광동) 방면으로의 전진(轉進)을 한때 무력화시켜 관군의 총수가 되었다. 그러나 치소(治所) 양주(揚州)에 주둔한 채 장안(長安)을 점거한 황소군의 토벌에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형세를 관망할 뿐이었다. 결국 조정으로부터 반역의 의심을 받아 총수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본디 신선(神仙)·방술(方術)을 좋아한 그는, 그때부터 그 탐닉의 정도가 지나쳐 이상한 행동을 많이 하였고 마침내 부하에게 살해 당했다.
奉和張舍人送秦煉師歸岑公山(봉화장사인송진련사귀잠공산)
仙翁歸臥翠微岑(선옹귀와취미잠) 선옹이 푸른 잠공산에 돌아가 누우니
一夜西風月峽深(일야서풍월협심) 하룻밤 서풍에 달은 골짜기에 깊어라
松徑定知芳草合(송경정지방초합)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 향기로운 풀 가득
玉書應念素塵侵(옥서응념소진침) 서간이야 읽지만 세속의 어지러움 없어
閒雲不繫東西影(한운불계동서영) 한가로운 구름 사방에 그림자 걸어매지 않는데
野鶴寧知去住心(야학녕지거주심) 들의 학이 어찌 떠나고 머무는 마음 알리
蘭浦蒼蒼春欲暮(난포창창춘욕모) 난포의 물 푸르니 봄도 저물려고 하는데
落花流水怨離襟(낙화유수원이금) 떨어지는 꽃과 흐르는 물 떠나가는 게 원망스러워.
------ 이군옥(李群玉)------
浪淘沙(낭도사)
簾外雨潺潺 春意瀾珊 (염외우잔잔 춘의란산) 주렴 밖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니 봄날의 정취 흩어져 조잔하고
羅衾不耐五更寒(나금불내오경한) 비단 이불로도 오경의 추위를 견딜 수 없구나.
夢裏不知身是客 一晌貪歡 (몽리부지신시객 일향탐환) 꿈속에서 나그네 신분을 잊고 한바탕 환락을 탐하였으니
獨自莫憑欄(독자막빙란) 홀로 난간에 기대지는 말아야지.
無限江山 別時容易見時難 (무한강산 별시용이견시난) 강산은 경계가 없어도 이별하기는 쉽고 만나기는 어렵나니
流水落花春去也 天上人間 (유수락화춘거야 천상인간 ) 흐르는 물에 꽃잎 떨어지고 봄마저 가는데 하늘에 오르는
인간이로다.
----- 李煜(이욱)------
*李煜(이욱, 937. 8. 15-978. 8. 13]
자는 重光(중광) 호는 鐘隱(종은) 오대십국시대의 十國(십국) 중 하나인 南唐(남당)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다.
宋太祖(송태조) 趙匡胤(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하고, 세력을 확대해오자, 이에 겁먹은 이욱은 당제국에서 江南國(강남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가 아닌 '國主(국주)를 자처했으나, 조광윤에게 나라가 멸망당함.
남당이 망한 후 개봉에 끌려와서 살다가 宋 太宗(송 태종) 재위 기간 생일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우미인'이란 詞(사)를 지었다가 이에 격노한 송 태종에게 독살당했다고하는데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해있음에도 한가로운 시나 지으며 문화에만 관심을 쏟은 暗君(암군)으로 결국 송에 의해 무력침공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죽지못해 살아가며 몰락한 왕족의 비운을 실컷 겪다가 마지막 남아있던 오월국이 송에 합병되던 바로 그 해 자신의 생일인 7월 7일, 송태종(송태조 동생)이 보내온 생일 축하주를 마신 후 칠전팔도(일곱번 구르고 여덟번 거꾸러짐)하여 죽었다.
또는 송태종이 '故國不堪回首(고국불감회수)의 사구를 읽고 크게 노한 나머지 약을 내려 자진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황제로서의 능력은 실격자로, 국정을 제대로 살피는 것보다는 문학 작품을 짓고 부르는 데 더 열중했다한다. 때문에 시인으로서는 일류급이었지만, 황제로서는 삼류라는 평가조차 과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황음무도 하거나 자신의 취미를 위해 백성을 혹사 시키거나 가혹한 징세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욱이 사망한 것을 들은 옛 남당 백성들이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 예술가 황제로 송휘종 조길과 함께 이름이 높고, 예술 때문에 나라를 망친 황제로 또 함께 이름이 높다.
실제로 그는 시문에 조예가 깊고 書畫(서화)와 음률에 정통한 만능 예술인이였다.
그러나 송 휘종이 천부적인 예술가적 재능을 지닌 황제로서 자기 취미를 위해 백성들을 혹사시킨 반면에, 이욱은 자기 취미를 위해 혹독한 징세를 하거나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서도 예술적인 면에서 일대 종가를 이루어 송대 문학가 4인방을 꼽으면 꼭 들어갈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다.
송나라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송대 문학가 4인방에 들어갈 정도로 문학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는데 그중 '詞(사)의 명인으로 유명하고, 훗날 송나라에서 태동하게 되는 宋詞(송사)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한다.
낙화유수 하면 나같은 노인에게는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라는 남인수의 노래가 먼저 떠 오르네요.
낙화유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紅桃花)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포구
보내고 가는 것이 풍속이더냐
영춘화(迎春花)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 소식을 편지로 쓰자
落花流水
당시 최고의 반열에 있었던 문학가인 조명암이 가사를 쓰고 이봉룡이 곡을 붙혀 당대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1942년에 발표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이기도 하다. 노래의 원 작사가인 조명암이 월북해서 금지곡이 되자 박남포가 개사하여 불리게 되었다. (박남포는 박창오, 추미림, 진방남, 반야월의 또다른 이름이다.)1962년 남인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낙화유수처럼 세상을 떠났다며 낙화유수 노래와 남인수의 떠남을 연계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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