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黃鶴樓(등황학루) 황학루에 올라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 이미 황학 타고 가버리어,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 땅에 공연히 황학루만 남았구나.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 년 두고 헛되이 흘러갔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맑은 냇물 저쪽엔 한양의 나무들이 역력하고,
春草萋萋鸚鵡洲(춘초처처앵무주) 봄풀은 앵무주에 무성히 자라 있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는데 고향은 어디쯤인고?
烟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안개 낀 강 물결은 나그네의 시름만 깊어가네.
------崔顥(최호)-----
註.
晴川(청천): 맑은 하늘 아래 냇물.
歷歷(역역): 하나하나 뚜렷이 잘 보이는 것.
漢陽(한양): 湖北省 漢陽府.(호북성 한양부) 武昌과 長江을 사이에 두고 서쪽 기슭에 있다.
萋萋(처처): 무성한 모양.
鸚鵡州(앵무주): 무창의 남쪽 강 가운데 있다.(주(洲)는 물속에 흙이 퇴적되고 하여 생긴 육지를 말함)
鄕關(향관): 고향.
중국 역사상 詩 문화가 가장 왕성한 시기가 唐때 였다. 그리고 唐詩의 두 거봉은 아무래도 시선(詩仙)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이백과 시성(詩聖)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두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선인 이백이 호북성 무한의 장강변에 있는 누각 황학루에 올라 주변 경치를 둘러본 뒤 그 감상을 시로 남기려고 붓을 들어 막 시를 쓰려고 하다가 앞쪽에 걸려 있는 최호의 시 登黃鶴樓를 보게 된다.
이 시를 한참 보고 있던 이백이 "눈앞에 훌륭한 경치가 있지만 쓸 수가 없네, 이미 최호의 시가 머리위에 있노라" ( 眼前有景道不得,崔颢题詩在上頭 안전유경도불득 최호제시재상두) 라고 하며 붓을 던졌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최호의 이 시는 명시로 알려져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이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는 장소다.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에는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찾아와 황학루를 예찬하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최호(崔顥)가 쓴 시 <등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최호(崔顥)는 이 시 한편으로 천고에 이름을 남긴 시인이 되었다
宋代(송대)의 嚴羽(엄우)는 그의 滄浪詩話(창랑시화)에서 ‘唐人(당인)의 七律詩(칠률시)는 崔顥의 黃鶴樓로서 첫째로 삼아야 한다’고 極讚(극찬)하였다.
그후 이백은 남경(예전의 금릉)에 있는 봉황대(鳳凰臺)라는 누각에 올라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라는 시를 쓰게 되는데, 마지막 구절에서 ‘결국 구름이 해를 가리니, 장안이 보이지 않아 시름겹게 하네’(總爲浮雲能蔽日,長安不見使人愁)라고 하여 최호가 황학루에서 사용한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使人愁)를 사용하여 최호의 시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물론 남의 싯구를 차용한다고 하여 그 시의 품격이 떨어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모택동 같은 경우는 옛 시인들의 싯구를 자주 차용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지요. 그렇다고 모택동의 시가 품격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 *李白이 지은 詩 "登金陵鳳凰臺"는 아래 별도로 올립니다.)
왕년에 신선이 황학을 타고 가버리고, 그 자리에는 황학루만 외롭게 남아 있네.
황학은 한번 간 뒤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고, 천여년의 세월동안 흰구름만 남아 있구나.
한양의 나무가 햇빛 속에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장강변의 앵무주는 풀이 더욱 무성하네.
석양을 바라보며 나의 고향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니, 강위의 자욱한 안개가 더욱 사람을 시름짓게 만드네.
黃鶴樓
황학루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황학루 터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주인은 수시로 와서 공짜 술을 즐기는 한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 없이 환대했다. 어느 날 먼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 벽에 귤 겁질로 황학 한 마리를 그려 줬다.
그리고 도사는 "손님이 올 때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시오.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실제로 주인이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할 때마다 황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10년 뒤 도사가 돌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황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훗날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누각을 세우고 黃鶴樓라 하였다 한다.
黃鶴樓는 우한의 랜드마크 장시성 난창의 등왕각(滕王阁), 후난 성 웨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원래는 233년 삼국 시대에 오나라 왕 손권(孙权)이 촉나라 유비(刘备)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였다.
지금도 황학루 가장 높은 곳에는 당시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 있다. ‘촉천극목(楚天极目)’이라 적힌 편액이 그것인데,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의미다.
처음에는 3층 28m 높이로 세워졌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누각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황학루는 1884년 청나라 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85년에 재건한 것이다. 높이가 55.47m로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내부는 9층으로 이뤄져 있다. 애석하게도 목조 건축물을 철근과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예스런 멋은 사라졌다.
崔顥(최호704?-754)
당나라 변주(汴州: 河南省 開封) 사람. 開元11년(723) 進士에 及第한 後 사훈원외랑(司勳員外郞)을 지냈다.
어려서는 대단히 부염경박(浮艶輕薄)하였으나 만년에는 기풍있고 뼈있 는 시를 썼으며 崔顥詩集을 남겼다.
登金陵鳳凰臺(등금릉봉황대) 금릉 봉황대에 올라
鳳凰臺上鳳凰遊(봉황대상봉황유) 봉황대 위에는 봉황이 놀았거늘
鳳去臺空江自流(봉거대공강자류) 봉황은 가고 누대도 비고 강물만 절로 흐르네.
吳宮花草埋幽徑(오궁화초매유경) 오나라 궁터는 풀꽃이 우거져 오솔길을 덮었고
晉代衣冠成古丘(진대의관성고구) 동진의 귀족들은 낡은 언덕의 무덤이 되었구나
三山半落青天外(삼산반락청천외) 삼산은 청천 밖으로 반즘 걸렸고
一水中分白鷺洲(일수중분백로주) 장강은 백로주(白鷺洲 모래톱)에서 갈라져 흐르는구나
總爲浮雲能蔽日(총위부운능폐일) 뜬구름이 온통 햇빛을 가리니
長安不見使人愁(장안불견사인수) 장안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시름 젖게 하누나
------李白------
'사연이 있는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落花流水(낙화유수)의 유래 (2) | 2023.05.23 |
---|---|
醉後(취후) 술에 취해 (1) | 2023.05.22 |
昭君怨(소군원) (2) | 2023.05.08 |
待情人(대정인) (2) | 2023.05.04 |
春盡日 ( 봄이 끝나가는 날) (1) | 2023.04.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