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연이 있는 한시

醉後(취후) 술에 취해

by 까마귀마을 2023. 5. 22.

 

                                   醉後(취후)  술에 취해

桃花紅雨鳥喃喃 (도화홍우조남남)  복사꽃 붉은잎 비오듯 떨어질제 새들은 지저귀고,

繞屋靑山閒翠嵐 (요옥청산간취람)  집을 두른 푸른 산엔 여기저기 아지랑이,

一頂烏紗慵不整 (일정오사용부정)  머리에 얹힌 오사모는 제멋대로 비뚤어진채,

醉眠花塢夢江南 (취면화오몽강남)  꽃 만발한 언덕에서 취해 잠들어 강남 꿈을 꾸고있네.

                                        ----鄭知常(정지상)----

 

註.

紅雨(홍우) : 붉은 꽃잎이 비오듯 떨어져 내림을 나타냄.

喃喃(남남) : 빠르게 재잘거려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게 이야기함. 새가 지저귀는 소리.

繞屋(요옥) : 집을 빙 둘러 싸다.

嵐(람) : 푸르스름한 안개 같은 기운. 

翠嵐(취람) : 산을 에워싼 푸른 기운. 옅은 아지랑이를 이르기도함.

烏紗(오사) : 오사모(烏紗帽) 또는 사모(紗帽)라고함. 고려부터 조선시대  관리가 쓰던 검은 모자.

慵(용) : 게으를 용. 

慵不整(용불정) : 게을러 가지런하지 않음.

塢(오) : 언덕. 

花塢(화오) ; 꽃이 핀 언덕.

 

사방으로 집을 둘러 있는 푸른 산에서는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붉은 복숭아 꽃잎이 비처럼 흩날리는 속에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오는 봄의 어느 날. 

시인은 넘치는 봄의 흥취 속에 거나하게 술을 마신 채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는 언덕에 누워 단잠을 이룬다. 

세상의 굴레나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토록 가고 싶었던 강남을 꿈꾸면서.

 

이 시는 남호(南湖) 정지상의 대표 詩 중 하나인 醉後(취후) 술에 취해 라는 詩로, 이전부터 우리 문인들에 의해 수없이 거론되었던 名詩이다.
이 시에 대해 김종직은  靑丘風雅 (청구풍아)에서 “곱디고운 모습이 너무 심하다 "艶麗太甚"(염려태심)고 했고,
최자는 補閑集(보한집)에서 “이 시는 그림으로 여겨 볼 만한 시이다"此詩可作圖畫看也”(차시가작도화간야)라고

했으며, 신흠은 晴窓軟談(청창연담)에서 “놀랍도록 빼어나고 시어가 아름다워 우리나라의 시 중에서 비교  할  만한

시가 드물다 "警拔藻麗, 我東之詩, 鮮有其比”(경발조려 아동지시 선유기비)라고 했을 정도로 빼어난  詩임을 

인정받았다.

 

*靑丘風雅(청구풍아) : 조선전기 문신, 학자 김종직이 신라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126인의 한시 517수를 수록한 시선집.

 補閑集(보한집) : 고려후기 문신 崔滋가 이인로의 破閑集을 보충하여 1254년에 발간한 서화집.

 晴窓軟談(청창연담) : 조선 중기 신흠이 지은 시 비평집.


선인들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봄날의 그림 같은 풍경과 그 풍경 속에서 술에 취한 시인의 행위를 몽환적으로 그려낸 시이다. 비처럼 흩날려 떨어지는 연분홍 복사꽃 사이로 들려오는 지저귀는 새소리와 사방을 둘러 싱그러운 초록빛의 산 그리고 그 산에서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시인이 있는 곳을 환상의 공간으로 만든다. 

굳이 이 공간을 분석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의 색감 대비,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인위적인 소리와 행위를 배제하고 새소리와 흩날리는 꽃잎의 움직임만을 강조하는 인위와 자연, 유성(有聲)과 무성(無聲), 정태(靜態)와 동태(動態)의 대조로 이루어진 환상의 공간이라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초봄 흩날리는 벚꽃 아래에 한 번이라도 서 있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공간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공간에서 시인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흥을 풀어낸다.
거나하게 취해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는 언덕에 누워 자는 것으로 말이다.
시인이 이 공간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신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시인의 모습을 언제나 위태로운 자신의 정치적 상황과 너무나 대조되는 풍경에서 북받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라고 볼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그보다는 그저 환상적인 봄 풍경에 느꺼워진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시인 정지상이 이 공간에서 관리를 상징하는 오사모 조차 멋대로 팽개친 채 거나하게 술 마시고 흐드러진 꽃 속에 누워 자며 강남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오사모를 내팽개쳐 두는 것은 세상의 시선과 권위에서의 탈피를 뜻하고,
강남을 꿈꾼다는 것은 이상향의 추구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강남은 원래 양자강의 남쪽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이곳이 토지가 넓고 비옥하며 물산이 풍부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어서, 이전부터 낙원 혹은 이상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이 시에서도 강남은 특정한 지역을 의미하기보다 정지상이 꿈꾸는 세상, 살고 싶고 가고 싶은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을 것이다.

이 시를 읽다 보면 정지상이 마냥 부러워진다. 그가 이런 풍경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무엇 때문에 술을 마셨는지, 꿈꾸는 강남은 어떤 곳인지 모르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안다고 하더라도 부러운 마음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인데, 그것은 이런 풍경 속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술에 취해 자면서 자신이 그리는 강남을 꿈꾸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 : 윤재환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 (시중유화 화중유시)” 당나라의 시인이자 남종(南宗) 산수화(山水畵)의 창시자이기도 한 왕유(王維)의 시와 그의 그림에 대한 송(宋)나라 시인 동파(東坡)의 평(評)이다. 하지만 어찌 왕유의 시에만 그림이 있으랴. 봄날의 풍경을 몽환적으로 묘사한 정지상의 이 詩도 수채화로 곱게 그려 대청 마루에 걸어두고 싶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겠는가?  때는 신록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춤추는 계절의 여왕 5월,  이 아름다운 계절, 하루라도 세상 시름 다 내려놓고 꽃은 다 졌지만 싱그러운 연 초록 아래서 술에 취해 강남 꿈을 꾸어보자....

 

*정지상(鄭知常)

다 알다시피 정지상(鄭知常:?-1135)은 묘청과 함께 서경천도 운동을 주도하다가, 김부식에 의해 처형 당한 고려의 시인이다. 우리 오천 년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쓴 시인이라면 送人(송인)과 위의 詩 醉後(취후)를 지은 정지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본관이 서경(西京)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며, 처음 이름이 지원(之元)이었으며  1114년 예종 9년에 문과에 급제했다는 정도밖에 정지상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다.

정지상에게는 최후의 기록만 존재한다인종13년(1135), [고려사절요]가 전하는 그의 최후이다.

 “김부식이 여러 재상과 상의하기를,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김안・백수한등이 가담하고 있으니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서경을 평정시킬 수 없다" 하니,여러 재상들이 그렇게 여기고, 정지상 등 3명을 불러서 그들이 이르자  은밀히 김정순에게 말하여 무사로 하여금 3명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을 벤 뒤에 비로소 위에 아뢰었다.

정지상의 처형 이유는 묘청의 난 때 여기에 가담한 혐의다. ‘지상이 내응한다’는 말은 이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는 구구한 말이 뒤따랐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이에 이르러 정지상이 내응 한다고 핑계하고 죽인 것이다"

라고. 실로 이 기록은 고려 시대로 부터 전하는 두 라이벌과 관련된 세인들의 입소문의 결정판이다.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김부식과 정지상 사이의 숙명적 관계가 정사(正史)에까지 오르자 세상은 누구나 이를 믿게 되었다.

'사연이 있는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臨江仙 (임강선)  (2) 2023.06.10
落花流水(낙화유수)의 유래  (2) 2023.05.23
崔顥의 登黃鶴樓  (3) 2023.05.12
昭君怨(소군원)  (2) 2023.05.08
待情人(대정인)  (2) 2023.05.0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