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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昭君怨(소군원)

by 까마귀마을 2023. 5. 8.

昭君怨(소군원) 소군의 원망

 

漢道初全盛 (한도초전성) ()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朝廷足武臣 (조정족무신)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何須薄命妾 (하수박명첩)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辛苦遠和親 (신고원화친)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掩涕辭丹鳳 (엄체사단봉)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銜悲向白龍 (함비향백롱)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單于浪驚喜 (선우낭경희)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無復舊時容 (무복구시용)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胡地無花草 (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春來不似春 (춘내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 (자연의대완)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 (비시위요신)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東方虯(동방규)-----

 

註.

薄(박) : 엷을.

何(하) : 어찌.

須(수) : 모름지기, 꼭.

丹鳳(단봉) : 중국 섬서성 지명.

銜(함) : 재갈, 입에 물리다.

白龍(백룡) : 백제성.

單于(선우) : 흉노가 자기네 추장을 높여 이르던 말

胡地(호지) : 오랑캐 땅.

衣帶(의대) : 옷과 띠.

緩(완) : 느슨해질.

非是(비시) : -이 아니다.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80년대 공화당 총리를 했던 김종필 씨가 박정희 독재(獨裁) 정치가 종식이 되고 3김 시대가 왔는가 싶었는데, 신군부가 12/12 사태로 한국 정치가 새 군부로 넘어가자 당시 정치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라 하며 심중의 불편함을 내비쳤다. 그때부터 정치권에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 되었다.

중국 4대 미인이라는 王昭君이 흉노족의 왕에게 시집 가게된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 문학에 수많은 소재로 쓰였졌다. 

동방규의 시도 그중 하나이다.  "春來不似春"  당나라 시인 東方虯가 지은 "昭君怨(소군원)"(소군의 원망)이란 3首로 된 시 3수에 나오는 구절이다.

 

落雁 (낙안) 즉 기러기가 떨어졌다는 왕소군의 미모를 가르키는 말로 그녀가 비파를 연주할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미모에 놀래어 날개짖을 멈추어 그만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왕소군(王昭君)의 이름은 장(嬙), 자(字)는 소군(昭君)으로서, 남군(南郡)의 명망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딸을 가진 그녀의 부친 왕양(王穰)은 사위를 고르는 데 남들보다 한층 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딸은 스무 살에 가까워졌다. 

그때 한나라 원제가 양갓집 규수를 골라 궁중의 빈어(嬪御-임금의 첩)로 삼겠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이에 아버지와 함께 귀주성 관아로 출두한 왕소군은 일백 수 십 명의 여자들과 함께 도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수많은 여자들을 일일이 살펴보는데 지친 원제는 직접 면접을 보는 대신, 여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그 가운데 선택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에 모연수(毛延壽-인물 초상화의 명인)를 비롯한 10여 명의 화공들은 환관과 시종들이 고른 여자 1천 여 명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 한 환관이 찾아와 화공에게 뇌물 바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단칼에 거절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 환관은 원제가 왕소군의 초상화를 추켜들자, “그 여자의 양쪽 뺨 위에 검은 반점이 세 개 있습니다. 

그러한 여자는 자신의 부군(夫君)에게 반드시 해를 끼친다고 하옵니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 말이 왕소군과 같은 고향 출신인 장숙정(張淑貞)이라는 빈어의 귀에 들어갔고, 장숙정은 왕소군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며 위로했다.
왕소군이 황제의 방문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채 궁전 나인(內人)에 머물러 있던 중, 

기원전 33년, 흉노의 제 14대 선우(單于-황제)인 호한야(呼韓邪-흉노를 통일한 인물)가 한나라에 ‘왕후가 될 사람을 한인(漢人) 가운데서 골라 보내 달라’는 요청을 사신 편에 보내온다. 동시에 선우는 황금 100근, 하얀 구슬 10쌍을 원제에게 바쳤다. 그러나 당시 흉노로 시집가겠다고 나서는 궁녀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액정령(掖庭令)이라는 선발 관리가 ‘자진하여 흉노에게 가겠다고 나선 여인이 있다’는 보고를 원제에게 올린다. 초상화를 보니, 반년쯤 전에 환관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리따운 용모를 지녔음에도 얼굴에 반점이 있다 하여 물리쳤던, 바로 그 여인! 황제는 그 뜻이 갸륵하여 큰 송별잔치를 열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왕소군의 모습을 처음 본 원제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육궁(六宮-황후궁 이하 부인들의 다섯 궁실)의 여인들마저 낯빛을 잃고 말았다. 환관에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황제는 왕소군으로 하여금 자기 곁에 머물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이를 거절한다. 조국(한나라)이 흉노에게 신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얼마 후 황제의 사신이 와 그녀의 지위를 황희(皇姬-‘황제의 딸’이란 뜻)로 올려주고 영안공주에 봉한다는 뜻의 친서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왕소군의 마음은 ‘문란한 후궁의 지위에서 벗어나,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만 넘쳐났다.
드디어 길을 떠나는 날. 황제는 황제의 마구간에서 기르던 명마(名馬) 10필, 낙타 4마리, 비단옷, 여우 모피로 만든 옷 등을 선물로 내려 보냈다. 도읍을 떠날 때, 소군은 곡 하나를 연주하여 이별에 대한 기념으로 삼았다고 한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기 위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의 곡을 연주하자, 남쪽으로 날아가던 한 무리의 기러기가 왕소군의 미모에 날개짓을 멈추어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선우는 한나라 황실의 사위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을 당한다. 대신 황실 궁녀 5명을 하사받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왕소군이었다는 것. 이때 황제는 후궁 가운데 가장 못생긴 사람을 보내고자 하였고, 이에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던 왕소군이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왕소군의 미모를 확인한 황제가 크게 화를 내며 모연수의 목을 쳐 죽이고 시체를 거두지 않았으며,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고 한다.
한편, 흉노족에 끌려간 왕소군은 호한야 선우의 총애를 받아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는 훗날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다. 또 왕소군은 두 명의 딸을 더 낳았다. 장녀의 이름은 운(雲)이고, 차녀의 이름은 당(當)인데, 후에 이들은 모두 흉노의 귀족에게 시집을 갔다. 특히 큰딸은 흉노에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기원전 31년. 재위 28년 만에 호한야가 죽자, 왕소군은 모국인 중국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나라 원제의 뒤를 이은 성제(成帝)는 흉노의 역연혼(逆緣婚, 배우자의 한쪽이 죽으면, 죽은 자의 가족 중에서 배우자를 정하는 혼인형태) 관습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결국 왕소군은 ‘왕이 죽으면, 그 본처의 자식이자 다음 후계자가 될 이와 결혼해야 한다.’는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의 배다른 아들 복주루약제 왕과 결혼하였다. 그와의 사이에서 다시 딸 둘을 낳았으며, 그녀 자신은 ‘평화를 이끌었다’는 의미의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해졌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하여 남편이 죽은 후 자결했다고도 한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이 괜히 나오진 않았던 것 같다.”
“어디 그게 여자의 잘못이겠는가? 또 얼굴이 예쁘다고 모두 불행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남자들이 가만두질 않으니....”
왕소군의 경우에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멀리 이국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것은 아닌지? 
황량한 초원뿐인 흉노의 땅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땅을 그리며 느꼈을 왕소군의 감정을, 당나라 시인 동방규는『소군원』(昭君怨-‘소군의 원망’이라는 뜻)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나라는 융성한 때여서
조정에는 무신들이 많이 있는데
어찌하여 박명한 여인에게
슬프고 괴로운 화친을 시키나

​소군이 구슬 안장 추어올려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는 눈물이 흐르네
오늘은 한나라 궁궐의 사람인데
내일 아침에는 오랑캐 땅의 첩이로구나

눈물을 가리고 궁궐을 떠나
슬픔을 머금고 백용구로 나아가네
선우는 놀라며 한없이 좋아하지만
다시 옛 모습은 돌아오지 않으리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짐은
몸매를 관리해서가 아니라네

만 리 밖 멀고 먼 변방의 성에
첩첩산이라 가는 길 험난하네
머리 들어 해를 바라볼 뿐이니
어느 곳이 장안(長安-한나라 당시의 수도. 현재의 시안)이런가”

글 : 강성률 작가(일부 보완)

 

* 동방규(東方虬) : 당나라 때의 시인.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고, 측천무후 때 좌사(左史·사관)를 지낸 사실만 전해짐.

 

동방규에 이어 이백도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시를 남겼다.

 

王昭君

其一

漢家秦地月 (한가진지월)  한나라 시절 옛 진 땅에 떴던 달은

流影照明妃 (유영조명비)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

一上玉關道 (일상옥관도)  한번 옥관도에 올라

天涯去不歸 (천애거부귀)  멀리 멀리 떠나간 뒤 돌아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 (한월환종동해출)  한나라 달은 다시 동해에 떠오르건만

明妃西嫁無來日 (명비서가무래일)  서쪽으로 시집간 명비는 돌아올 줄 모르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장한설작화)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蛾眉憔悴沒胡沙 (아미초체몰호사)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사라지는구나.

生乏黃金枉畵工 (생핍황금왕화공)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잘못 그리게 하더니

死遺靑塚使人嗟 (사유청총사인차)  죽어선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其二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소군이 아름다운 옥안장을 얹어놓고

上馬涕紅頰 (상마제홍협)말에 오르니 붉은 뺨엔 눈물이 가득.

今日漢宮人 (금일한궁인)오늘은 한나라의 궁녀지만

明朝胡地妾 (명조호지첩)내일 아침엔 오랑캐의 첩이라네.

 

 * 靑塚(청총) :  땅에 묻힌 왕소군 무덤의 풀이 겨울에도 누렇게 시들지 않고 초록빛을 뛰어 붙혀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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