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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待情人(대정인)

by 까마귀마을 2023. 5. 4.

待情人(대정인)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春風忽蕩(춘풍홀태탕) : 봄바람 홀연히 화창하고

明月又黃昏(명월우황혼) : 밝은 달 비추는 황혼 무렵에.

亦知終不至(역지종부지) : 그대 오지 않으실 걸 잘 알면서도

猶自惜關門(유자석관문) : 끝끝내 문을 닫아걸지 못하였습니다.

 

 

春風 : 봄바람.

忽 : 문득

駘蕩 : 화창한 모양

又 : 또.

黃昏 : 해가 뉘엿뉘엿하여 어두워질 무렵.

亦 : 그래도.

不止 : 그치지 않다. ~를 넘다.

猶自 : 여전히. 아직.

惜 : 애석하게 여기다.

關門 : 다른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꼭 거쳐야 할 단계.

 

*위의 詩는 제목이 "贈情人(증정인)" "春夕(춘석)" "春風(춘풍)"으로 되어 있는 자료가 있으며, 작자는 "雲楚 金芙容(운초 김부용)" "蔡小琰(채소염)"또는 작자미상으로 검색되고 있으며,

이 詩의 둘째구  明月又黃昏(명월우황혼)이  山日又黃昏(산일우황혼)으로 되어 있기도함

 

홀연히 봄바람이 불어와  마당 가운데를 가로질러 집안 가득히 화창하다.

해는 아직 서산에서 붉은 기운을 다 태우지 못하고 서성이는데 동쪽에는 벌써 하얀 보름달이 밤을 밝힐 준비를 하고 있다.

따뜻한 바람, 포근한 황혼, 어여쁜 달빛. 거기에 휘리릭 몰아가는 바람까지 뜰을 바라보고 있는 가슴에 설레임을 부추긴다.

그런데 왜 이다지도 허전하단 말인가?

홀로 맞는 봄바람도, 혼자 바라보는 석양도, 달빛도 오히려 차디차다.

기다려 봤자 오지 않을 님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에 차마 문을 닫아 걸지 못한다.

 

위의 詩 "待情人"의 작자로 알려지고 있는 雲楚 金芙容(운초 김부용)은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명기로 이름을 날렸으며 셋중에 용모로는 김부용이 가장 아름다왔다 한다. 우리에게 김부용이 알려지기는 고 정비석님의 " 미인별곡"에 의해 극으로 공연되면서이다.

김부용은 조선 정조 때 산수(山水)가 빼어난 대동강 상류인 평안남도 성천의 비난한 선비 집안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 하였던지라 일찍이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겨우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였다. 그러나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 다음해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게 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되었다. 어린나이에 양친을 다 잃은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退妓)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녀(妓女)의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16세 때 성천군 군민백일장에서 당당히 장원을 할 정도로 시문(詩文)과 가무(歌舞)가 남달리 뛰어나, 조선의 삼대시기(三大詩妓)중의 한사람으로서 그녀가 남긴 五江樓集(오강루집)에 무려 350여수나 되는 한문체의 명시(名詩)가 실려있다.

 

운초(雲楚) 김부용은 성천(成川)의 관기로  열아홉 살의 꽃다운 나이일때    연천(淵泉)김이양(金履陽)이 1811년 12월, 홍경래(洪景來) 난의 진압을 위해 함경감사에 부임하였다가 1815년까지 서북지방에 머물렀는데, 이때 운초(雲楚) 를 알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평안감사로 부임한 김이양의 나이는 77세였다. 19세의 기생과 77세 대감의 만남, 과연 둘의 사랑은 진실이었을까?

둘은 무려 58세의 나이차가 있었다. 두사람의 합방을 원한건 부용이라고 했다. 거두어 달라는 부용을 앞에 두고 대감이 한마디 했다. 욕심이 아닐까? 뜻이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세상엔 30객 노인도 있고 80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부용의 말이다.

 

한때 김대감이 호조판서의 교지를 받고 한양으로 올라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아리따운 부용을 두고 떠나는 대감이나, 하늘같이 믿고 살아온 대감을 보내야 하는 부용이나 서글픈 마음은 매한가지였다. 부용을 안쓰럽게 여긴 김 대감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妓籍)에서 빼내 양인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副室)로 삼았다가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부용과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몄다. 그 집을 녹천당(祿泉堂)이라 하였으며,  한강가의 별장  "일벽정"에 머물며 승경(勝景)을 유람하고, 남편인 김이양 벗들의 각종 연희에 참여하여 시·그림·음악·춤 등의 재능을 보인 예술인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함께한 여성 예술인이 경혜(景蕙)·경산(瓊山)·금원(錦園)인데, 이들은 모두 운초(雲楚)처럼 기녀에서 소실이 된 예술인들이다. 특히 운초(雲楚)·경산(瓊山)·금원(錦園)·경춘(瓊春)·죽서(竹西) 등 다섯 명은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라는 詩 모임을  결성하여 시를 짖고 감상, 향유하며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시대 볼수없었던 여성들의 詩문화 모임이기도하다.

한동안 서로 헤어져 멀리 떨어져 있던 부용은 주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외롭고 슬픈 마음을 달랠 방법은 오직 시를 짓고 그 시를 음미해 볼뿐이었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피를 토해내듯 애절함을 절절히 표현한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란 시를 지어 보냈을까. 이 시는 전형적인 한시(漢詩)의 틀을 벗어나 한자씩 짝으로 시작하여 두자, 석자...의 형식으로 이어져 18자, 36행으로 된 회문체(回文體)위에서 내려읽거나 끝에서 치읽어도 뜻이 통하고 음운이 맞는 한시의 시였다. 따라서 이 시를 횡으로 쓰면 탑 모양이 되었기에 보탑시(寶塔詩)라고도 불리며, 부용의 시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표적인 시라고 말한다. 부용상사곡은 아래 별도 올립니다

 

부용상사곡은 긴 詩로 가슴이 타들어가는 그리움의 눈물을 먹물삼아 탑을 쌓아가듯 한자 한자 공을 들여 써서 연모(戀慕)하는 대감에게 보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만나 서울로 올라와 15년이라는 삶을 함께해오던 중, 부용의 나이 33살에 김이양 대감이 92세의 일기로 사망 하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김이양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15년을 함께 지내오다 오늘 돌아가시니 백아가 이미 끊은 거문고 내 다시 끊노라" 라고 한것을 보면 부용에게 연천은 남편이기보다 재능을 인정해주는 지기였다고 볼수 있을것 같다. 김이양은 부용의 아름다움과 재기를 사랑했고 부용은 늙은 김이양을 잘 보살폈다. 김이양이 사마회갑( 과거급제 60년이 되는 해) 을 맞아 조상들의 성묘길에 운초를 부인 자격으로 대동하기도 하였다.

 

金履陽 (김이양)은 과거를 보기 전 젊은 시절에 몹시 가난하였다. 하루는 저녁도 거르고 잠을 청하는데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훔쳐갈 쌀이 없자 솥단지라도 뜯어가려고 하였다. 놀란 부인이 남편에게 말하자, 김이양은 "오죽하면 남의 솥을 떼어 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니 그냥 놔둡시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둑은 감동을 받아 솥을 두고 갔으며, 그 후 열심히 일하여 큰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의 장원급제 소식을 듣고 찾아가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이러한 전설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로 김이양은 아주 후덕(厚德)한 인물이었다.  또 김이양은 풍채가 뛰어나고 결기가 있으면서도, 시문(詩文)에 아주 능하여 한마디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호걸다운 인물이었다.

김이양이 이러하였으니, 나이어린 부용이 남자구실도 못하는 노옹(老翁)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지 훌륭한 인품만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부용은 부군이 살아있는 동안 부도(婦道)를 다한 내조의 공이 컸던바, 대감의 본처가 죽자 부실(副室)에서 자연히 계실(繼室)이 되어 초당마마의 존칭을 받았다.

그리고 부군(夫君)인 김 대감과 사별하여 청상(靑孀)이 되어버리자, 평생 정절(貞節)을 지킴은 물론, 오직 김 이양 대감의 명복을 빌고 또 빌면서 자탄(自歎)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한 세월 속에 부용의 식지 않은 가슴엔 시나브로 차갑고 쓸쓸한 바람결이 몰아쳐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시(漢詩)의 자음(自吟)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잠재우면서 16년을 더 살다가 49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을 마감하게 되었다. 부용은 임종을 하기 전 "내가 죽거든 대감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광덕산) 기슭에 묻어주오."라고 유언을 하였다.  

김이양의 후손들은 김이양의 묘가 올려다 보이는 곳에 그를 묻어 줬다. 운초 김부용의 묘가 천안 광덕산에 있는 연유다. 

 

                                                       김부용의 묘

相思曲 / 雲楚 金芙蓉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香閣鍾鳴夜
鍊亭月上時
依孤枕驚殘夢
望歸雲 遠離
日待佳期愁屈指
晨開情札泣支
容貌憔悴把鏡下淚
歌聲鳴咽對人含悲
銀刀斷弱腸非難事
珠履送遠眸更多疑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부용상사곡 / 운초 김부용

 

이별하옵니다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읍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읍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을 어찌 그리 신의가 없읍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리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읍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아타깝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 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 계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읍니까
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는 강을
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外 그녀의 詩 몇편을 올립니다.

 

사절정(四絶亭) 네가지 뛰어난 정자

亭名四絶却然疑(정명사절각연의) 정자이름이 어이하여 사절인가

四絶非宜五絶宜(사절비의오절의)사절보다 오절이 마땅할것을

山風水月相隨處(산풍수월상수처)산과 바람 물과 달이 어울린데다

更有嘉人絶世奇(경유가인절세기) 절세가인이 더 했으니 오절이라네

 

勝妾容(승첩용)  내 얼굴보다 고운가

容花發滿池紅(부용화발만지홍) 연꽃이 가득피어 물 가득히 붉고나

人道芙蓉勝妾蓉(인도부용승첩용) 사람들은 연꽃이 나보다 곱다하네

今日偶從堤上過(금일우종제상과) 오늘 우연히 둑위를 거니는데

如何人不看芙蓉(여하인불간부용) 어찌하여 사람들은 꽃은 안보고 나만 보는가

 

待情人(대정인)

春風忽태蕩 (춘풍홀태탕)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는데

山日又黃昏 (산일우황혼) 서산에는 또하루 해가 저문다

亦如終不至 (역여종부지) 기다리는 님 소식은 끝내없어도

猶自惜關門 (유자석관문) 그래도 아쉬움에 문을 못닫네

 

春風(춘풍)

垂楊深處依開窓 (수양심처의개창) 수양버들 늘어진 창을 열고 기대서니

小院無人長綠苔 (소원무인장녹태) 님없는 뜰엔 푸른 이끼만 길게 자라네

簾外時聞風自起 (렴외시문풍자기) 주렴 밖에 가끔 바람이 절로 일어서

機回錯認故人來 (기회착인고인래) 님이 오시나 속은 것이 몇번 이던고

 

哭淵泉老爺(곡연천노야) 연천 낭군을 곡함
風流氣槪湖山主(풍류기개호산주) 풍류 있고 기개 높아 충청지방 으뜸이요
經術文章宰相材(경술문장재상재) 경술 깊고 문장 빛나 재상의 재질이네
十五年來今日淚(십오년래금일루) 15년을 함께 살다 지금에 눈물 지니
峨洋一斷復誰裁(아양일단부수재) 갈라진 산과 바다 그 뉘가 다시 맺나.

 

 

芙容花

 

부용화는 중국 중부 지방이 원산지이며 꽃 말은 " 정숙한 여인"이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1일 단명화이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고 朝開暮落花(조개모낙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로 8-10월에 흰색, 연분홍색, 붉은색 꽃이 핀다.

한편으로 부용화를 三醉芙容(삼취부용)이라 하는데 이는 아침에는 흰빛을, 점심때는 흰꽃에서 붉은색으로 변하고 저녁에는 深紅色(심홍색)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에는 일본이 무궁화를 대한민국의 꽃이라 짖밟으며 말살정책을 펴자 독립군들이 만주에서 부용꽃을 보며 애국지심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부용은 원래 연꽃으로 연못에서 피는 꽃은 수부용화, 들이나 산에서 피는 부용화는 목부용화로 구분하여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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