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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漁 翁(어옹)

by 까마귀마을 2023. 2. 8.

 漁 翁(어옹)고기 잡는 늙은이 

漁翁夜傍西巖宿 (어옹야방서암숙)   늙은 어부 밤이 되자 강서쪽 바위 곁에서 잠자고

 曉汲淸湘燃楚竹 (효급청상연초죽)  새벽에는 맑은 상강 물 길어 대나무로 불을 지핀다

煙銷日出不見人 (연소일출불견인)   안개 걷히고 해 솟아올라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欸乃一聲山水綠 (애내일성산수록)   어여차 노 젓는 한 소리에 산과 물은 더욱 푸르다

回看天際下中流 (회간천제하중류)   머리 돌려 멀리 하늘가 바라보며 강 중류로 내려가는데

巖上無心雲相逐 (암상무심운상축)   바위 위에는 무심한 구름이 서로 쫓고 있다

                            

                                        ----柳宗元(유종원)----

註.

漁翁 (어옹) : 고기 잡는 노인

傍 (방) :  곁

西巖(서암) : 영주(永州, 지금의 호남성 영주시(永州市))의 서산(西山)

淸湘 (청상) : 밝은 상수의물 , 광서성 흥안현에서 발원, 호남성 동정호로 흘러든다.

楚竹 (초죽) :  초날 대나무
煙銷 (연소) : 연기같이 자욱한 안개가 걷힘
欸乃 (애내) : 배를 저을 때 힘과 흥을 돋우기 위해 내는 소리, 우리말의 '어여차' 정도
回看 (회간) : 머리를 돌려 바람봄

際 (제) : 사이
天際 (천제) : 멀리 하늘의 가장자리

逐 (축) : 쫓다/따르다

 

이 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유종원(773-819)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어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토로하기보다 경물 묘사를 위주로 하여 지극히 고요한 산수(山水) 자연의 일색(一色)과 한적한 어부의 일상을 조화롭게 그려냈다.

저 멀리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를 보자니 어부는 벌써부터 일어나 끼니를 때우고 서둘러 배 탈 채비를 하고 있나 보다. 어느덧 훤히 동이 트고 사물의 식별도 훨씬 용이해졌는데 어부의 모습은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끼이익! 단단히 힘을 주어 첫 노질을 했을 테니 자연 입 밖으로 ‘으라차!’ 하는 고함 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을 법하다. 고요히 숨 죽여 바라보다 일순간에 펼쳐지는 강산의 청량(淸亮)한 빛깔과 기운이 가슴 속까지 전율을 일으킬 정도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따라 어느덧 하늘 끝으로 떠나가고 있는 배와 그 뒤를 좇는 ‘무심(無心)’한 구름 또한 모두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다.

시인 유종원(773∼819)이 살던 시기는 혼란이 점차 가중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당나라는 말기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유종원 등 젊은 혁신그룹들은 망조가 든 나라를 개혁하기위해 805년 永貞革新(영정혁신)을 시도하였다.그러나 황제에 막 즉위하여 개혁을 지원하던 順宗(순종 )연호 : 永貞(영정)이 그해 805년에 환관들이 일으킨 정변으로 퇴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결국 영정개혁이 실패하였다.

이때 개혁의 주동적 역할을 하던 젊은 관료인 유종원· 왕숙문 등 8명이 805년 지방의 사마벼슬로 좌천되었는데, 이들을 八司馬(팔사마)라고 한다. 유종원도 좌천되어 永州司馬(영주사마)로 있으면서 그의 울적한 심경을 산수 간에 소요하는 고기 잡는 늙은이 ‘漁翁’(어옹)을 빌려서 나타냈는데, 자신의 청아하고 높은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천년의 논쟁을 불러온 詩, 유종원의 "漁 翁"

후세사람 송나라 동파거사 蘇軾(소식)은 이 시에는 奇趣(기취: 유별한 흥미)가 있다고 하면서 ‘뒤의 두 구절은 없어도 좋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수백 년 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소동파(蘇東坡)는 이 시가 기취(奇趣)로 충만하다고 크게 찬양한다. 그는 서유자후어옹시(書柳子厚漁翁詩)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는 '기취(奇趣)'를 종(宗)으로 하고, 반상합도(反常合道 : 일반적인 상식에 반하지만 도에 부합됨)를 취(趣)로 한다. 이 시를 음미해보면 기취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의 두 구절은 없어도 된다." 이 말에 숨은 의미는 마지막 두 구절은 삭제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남송의 유진옹(劉辰翁)은 반대의견을 표시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의 기택(奇澤)은 만당(晩唐 : 중국 唐詩가 지어진 때를 기준으로 마지막 시기)의 류가  아닌데, 바로 뒤의 두 구절 때문이다." 그후 어옹의 마지막 두 구절을 삭제 해야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역대 이래로 두 가지 의견이 대립했다.

남송의 엄우(嚴羽), 명나라의 호응린(胡應麟), 청나라의 왕사진(王士禛), 심덕잠(沈德潛)등은 소동파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들은 欸乃一聲山水綠 (애내일성산수록)에서 끝내버리면,  언외지의(言外之意 : 말에 나타난 뜻 이외에 숨어 있는 다른 뜻 )를 남길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두 구절을 더하면 말을 다 해버리는 것이 되어 여운이 남지 않는다고 본다. 엄우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했다: "동파가 후 2구절을 삭제했는데, 자후(유종원)이 다시 태어난다면 분명히 마음 속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반대파 진영에는 남송의 유진옹, 명나라의 이동양(李東陽), 왕세정(王世貞)등이 있다. 그들은 삭제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만일 마지막 두 구절을 삭제해 버리면, 이 시는 만당의 '기취' 시가들과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본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지막 두 문구를 삭제하면, 독자들은 쉽게 중점을 시의 예술적인 취미에 두게 되고, 유종원의 당시 처지나 마음 속의 울분을 배출하려는 본뜻은 읽지 못하게 된다고 본다.그렇다면, 마지막의 두 구절은 삭제 하는게 좋을까 놔두는게 좋을까

유종원의 이 詩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

유종원은 관료가정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유학을 숭상했으며, 모친은 불교를 믿었다. 유종원은 어려서부터 유학과 불학의 이중영향을 받는다. 그는 어려서 뜻을 이루어, 21살에 진사가 되어 관료사회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왕숙문(王叔文) 집단에 가담하여 정치혁신을 꾀하고 예부원외랑이 된다. 영정혁신(永貞革新)이 실패하자,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된다. 정치적 이상이 깨져버리고, 관료로서의 앞날도 막혀 버린다. 그리하여 고독과 울분을 발산하는 것이 바로 유종원의 영주10년간 작품의 주제이다.

<어옹>도 마찬가지로 고독과 울분에서 온 것이다. 다만 이 시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보였다.

유종원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영주에서의 일거일동을 누군가 수집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자신을 탄압하고 배제하는 정적들에게 보라고 이 시를 썼다. 나는 영주에서 잘 지내고 있다. 영주라는 곳은 비록 편벽한 시골구석이지만, 나는 자유자재로 잘 지낸다. 마시는 물은 너희들 것보다 맑고 깨끗하며(상수), 밥할 때 때는 것도 너희들 보다 훨씬 더 따져서 좋은 것으로 쓴다(초죽).보는 풍경도 너희들 보다 훨씬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은 하늘도 높고 땅도 넓어서, 내가 인생과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소동파의 기취해독]

시작부분의  漁翁夜傍西巖宿은 비교적 평범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汲淸湘(급청상)과 燃楚竹(연초죽)은 아취가 넘친다. 거기에는 초범탈속(超凡脫俗)의 의미가 숨어 있어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어지는 구절이다. 煙銷日出不見人, 欸乃一聲山水綠 이런 장면은 정말 남다르다. 남다른 수법은 원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야 사람이 보이는 것이고, 청산녹수가 보이는 법이다. 유종원의 붓끝에서는 청산녹수에 사람이 있는데, 마치 노래로 그를 불러낸 것같다는 것이다.

당연히, 유종원은 '기취'라는 층면에만 머물지 않았다. 고풍(古風)에 따라, 뒤의 구 두구절은 자신의 본 뜻을 나타냈다. 본뜻을 나타내는 것과 부합되도록, 유종원은 형식적으로 일부러 당시 유행하던 절구와 율시를 피했다. 오래된 육구체제를 쓴 것이다. 평측도 아주 마음대로 썼다. 이는 동류합오(同流合汚 : 세속에 빌붙어 야합하며 사는것 )하지 않겠다는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옮겨온 글)

 

 

유종원(柳宗元, 773∼819,)  唐말기, 자(字) 자후(子厚)] 하동[河東,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용지(永濟)] 지방의 명문 대족 출신이었다.  네 살 때 벌써 고부(古賦) 14편을 숙독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를 보여 ‘기동(奇童)’이라고 불렸다.그는 덕종 정원 9년(793)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고, 이어서 정원 14년(798)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해 집현전서원정자(集賢殿書院正字)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는 부패한 관리들이 정권을 전횡하는 정치적 암흑시대였는데 유종원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개혁하려는 열망을 품고 정치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순종(順宗) 영정 원년(805)에 조정을 장악하고 정치 개혁을 주도하던 왕숙문(王叔文)이 유종원의 이러한 의지를 알아보고 그를 일약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침해당한 환관(宦官)과 번진(藩鎭) 및 기타 보수파 인사들의 반격을 받은 순종이 물러나고 헌종(憲宗)이 즉위함으로써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고 불린 왕숙문의 정치 개혁이 100여 일 만에 끝나 버렸다. 영정혁신의 핵심 인사들은 모두 원지로 폄적(貶謫)되었고 그 이듬해에 영정혁신의 주도자였던 왕숙문이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유종원은 영정 원년(805) 9월에 소주자사(邵州刺史)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도중인 11월에 다시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때 유종원과 함께 영정혁신의 동지였던 유우석(劉禹錫)·위집의(韋執誼)·한태(韓泰)·진간(陳諫)·한엽(韓曄)·능준(淩準)·정이(程異) 등도 모두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마로 쫓겨났다. 이것이 이른바 ‘팔사마 사건(八司馬事件)’이다.


유종원은 약 10년 동안 영주에 머물면서 아열대 지방인 영주 지역의 이국적인 산수와 풍토를 몸소 겪어 보고 그곳 민중의 삶의 애환을 들여다본 후 그것을 시문으로 승화시켰다.
헌종(憲宗) 원화 10년(815) 봄에 유종원은 도성으로의 소환령을 받아 재기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안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해 3월에 바로 유주자사(柳州刺史)에 임명되었다. 그는 풍속도 다르고 말도 알아듣기 힘든 유주에서, 풍토병의 발병 요인이 되는 독기인 장기(瘴氣)와 싸워 가며, 농작물의 수확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학교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며, 노비를 해방해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선정을 베풀었다.
다시 5년이 지난 원화 14년(819)에 대사면령이 내려져 유종원도 조정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유주에 머무는 동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조서(詔書)가 유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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