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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竹里館(죽리관)

by 까마귀마을 2023. 2. 10.

 

竹里館(죽리관)

獨坐幽篁裏 (독좌유황리) 고요한 대숲에 홀로 앉아
彈琴復長嘯 (탄금부장소) 거문고 타고 시를 읊다
深林人不知 (심림인부지) 깊은 숲이라 사람들은 모르고
明月來相照 (명월래상조) 밝은 달만 찾아와 비추는구나
                ----- 王維(왕유)----

註,

竹里館 : 대나무 숲에 있는 집( 죽리관은 망천의 20경 중의 하나로, 호수 북쪽에 있는 죽림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집을 가리킨다)

幽篁(유황) : 그윽한 대숲

篁裏(황리) : 대숲속

彈琴(탄금) : 거문고를 타다

長嘯(장소) : 길게 휘파람을 불다, 여기서는 시를 읊조리다

'()'은 '서로'를 의미하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특정대상을 칭함, 즉 나 또는 이곳

相照(상조) : 비추어 준

 

중국 당(唐)의 대표적인 자연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오언절구의 시로 당시선(唐詩選)에 실려 있으며, 원제는 <죽리관(竹里館)>이다.

시인의 한적한 심경이 고요한 분위기 속에 잘 묘사되어 자연의 청아한 정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나는 홀로 깊고 고요한 대숲 속에 앉아있다.

거문고를 타면서 한가로이 옛사람을 배워 시를 읊조리니 이것이야 말로 자연속에서 누리는 즐거움이라 하겠다.

깊은 숲속에 사니 세속의 사람들은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할것이나 하지만 밝은 달만은 나를 알아 변함없이 비춰주고 있구나.

시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대나무 숲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거문고 소리, 시를 읊는 소리는 모두 청각적 이미지로, 각기 자연, 사물, 인간의 소리라는 차이를 지니면서도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것들이다. 달과 시적 자아가 서로를 비추는 것도 자연과 일체가 된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시는 자연 속에 동화되어 유유자적하게 생활하는 동양적인 삶이 은은한 필체로 묘사되어 있다.

작자는 평범한 시어를 이용하여 속세를 떠나 또 자연속에서 홀로 고아하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작가는 세속적 쾌락과 명예와 영달에 의한 행복보다는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면적 행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은둔 생활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려 했다.

표면상으로는 평범한 단어로 이루어진 네 구절의 시에 불과하지만, 그 단어들이 긴밀하게 결합하는 순간 작가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예술적 정취를 드러낸다. 이 시의 매력은 바로 글자상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미에 있다. 달빛이 은빛 가루를 뿌리고 있는 듯한 숲 속의 경치로부터 더없이 맑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신선이 사는 듯한 아름다운 숲 속에서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는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속세의 번뇌를 모두 떨쳐 버린 상태임을 말해 준다.

이 시가 가지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적 자아가 아름다운 자연을 관조하고 나아가 자연과 합일(合一)한다는 데 있다. 이 시에서도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를 훌륭히 활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왕유의 유명한 連作인 <輞川集>의 한 편이다. 망천집에는 다음과 같은 서문이 있다.

“나의 별장은 輞川의 산골에 있다. 거기서 놀만한 곳은 록채(鹿柴), 목란채(木蘭柴)...죽리관(竹里館), 신이오(辛夷塢)... 등 스무 곳이 있다. 친구 배적(裵廸)과 더불어 한가할 때 각 곳에 대해 絶句를 지어본 것이다". 망천집은 스무 곳에 대해 두 사람이 각각 5언 절구를 하나씩 지었으므로 모두 40수가 있다.

*輞川은 서안시 남쪽 終南山에서 발원하는 강 이름. 이 강가에 망천장 별장이 있었다.

 

왕유(王維/701-761)

자는 마힐(摩詰) 분주, 지금의 산시성 편양에서 태어 났으며 중국 성당 시기의 시인이며 화가이자 관료이다.

이백은 詩仙이며 天才, 두보는 詩聖이자 地才, 왕유는 詩佛이자 人才라 칭하였다. 시. 서, 화에 능통 하였고 산수전원시(山水田園詩)에 뛰어나 회화성이 뛰어나고 禪趣(선취)가 풍부한 시를 많이 썼으며 중국화의 양대산맥인 남종화(南宗畵)의 창시자임과 동시에 서예와 음악 등에도 정통한 보기드문 천재였다.

안록산 반군에게 잡혀 반강제적으로 관직을 맡았다가 난 평정후 하옥되어 죽을 뻔 한것을 동생 왕진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으며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의 감화를 받아 불교에 귀의 하였다. 그는 30대에 아내와 사별하고 줄곧 독신 생활을 하면서 불교의 선사상에 심취되어 관조적 생활을 동경하다 40세때 장안 남쪽 남정현에 있는 망천별서(輞川別墅)에서 친구 배적과 더불어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며 반관 반은 생활을 즐기며 살았다.

왕유의 작품은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구절에 다섯자씩 모두 4행으로 된 詩)가 일품으로 이 분야에 있어서는 당나라를 통털어 최고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소동파는 그의 작품은 그림과 같아서 시(詩)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詩)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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