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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楓橋夜泊(풍교야박)

by 까마귀마을 2023. 1. 28.

 

楓橋夜泊(풍교야박)  풍교에서 밤에 배를 대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 지자 까마귀 울고, 하늘에는 서리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강가의 단풍나무, 고깃배의 등불을 마주하며 시름에 잠 못 이루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가 묵고있는 뱃전 까지 들려온다.

                         ----- 장계 (張 : 唐)----


달도 기울고 까마귀 울어대고, 

밤새 내린 서리는 스산함을 더하고,

배 안의 나그네는 강가의 단풍나무와 고기잡이 배들의 등불에 잠 못 이루는데,

멀리 한산사의 종소리가,

머물고 있는 배전까지 울리어 나그네의 시름을 더한다.

낯선 객지에서 바라본 늦가을 밤의 정경과 수심 가득한 나그네의 심정을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다

 

서예를 하는 사람이면 한번쯤은 들었거나 써본적이 있는 장계의  楓橋夜泊 (풍교야박 : 풍교에 배를 대다)입니다.

당의 시선이라는 이백, 시성이라는 두보는 수많은 시를 남겼지만 장계는 이 한편의 시로 그들의 반열에 오르고 지금도 중국, 일본의 초교, 고교 교과서에 이 시가 실리어 알려 지므로 중국및  일본등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풍교와 한산사를 찾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너무나 잘 알려진 좋은 시입니다.

시인은 몇 차례의 과거에 낙방하고 처량한 심정으로 낙향중 지금의 소주, 운하에 놓여진 풍교라는 조그만 석교아래 여객선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지은 시입니다. 풍교는 한산사 앞, 운하(運河)에  있는 보기만 해도 정감이 가는 조그만한 아치형의 다리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한산사의 범종은 청나라 말에 일본이 약탈해 갔다가 1907년, 속죄의 뜻으로 일본인들이 모금하여 새로운 범종을 만들어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사찰의  2층 누각에 오르면 주변의 소주(蘇洲)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운하, 석교, 나무, 낮게 깔린 지붕들이 연연히 이어져 있고  한산사는 단아한 자태에 색조 또한 선명하여 고찰로 보기에는 너무 젊은 사찰처럼 보이지만 이유를 알아 본즉 한산사는 창건 이래 5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청말 광서황제 때 새로 지어졌으며 사찰의 외벽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는 황제가 다녀갔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한산사(寒山寺)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인 502년에 창건된 고찰입니다. 본래 이름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名塔院)이었으나 당나라 정관 연간에 두 명의 기승(奇僧)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에 의해 이름이 알려지면서 이름을 한산사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으며 전성기 때는 말을 타고 다녀야 할 정도 광대한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합니다. 

한산사와 풍교가  유명하게 된 동기는 과거에 3번씩이나 낙방한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풍교라는 석교밑에 여객선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쓴 풍교야박(楓橋夜泊 풍교에서 하룻밤을 묵다)이란 7언절구의 한시(漢詩)때문입니다.  

청 나라 강희제가 이 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풍교로 친히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풍교는 다리 이름이 유명해지고 사찰보다 더 알려지면서 남송 시절에는 한때 한산사 풍교사로 불렸던 적도 있었다 합니다.  좋은 시 한 편의 주는 전방위적 영향력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상징이라 생각됩니다.

 

장쑤성 (江蘇省) 쑤저우(蘇州) 한산사 (寒山寺) 입구에 있는 풍교는 강남 지방과 베이징을 잇는 운하(運河)위에 걸려 있으며 이 다리는 장계가 다녀간 이후 무너지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런저런 이유로 멏 번씩 없어진 한산사 범종도 이 시 때문에 복원되어 옛 종소리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합니다.

글 꽤나 쓰는 수많은 서예가들이 시대를 달리하며 풍교야박 이 시를 인근 여기저기에 새겼고 그 탁본은 풍교및 한산사를 찾는 관강객의 인기 상품이 되어 옛사람과 현대인을 이어주는 다리 노릇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득한 옛날 조그만 석교아래  뱃전에서 하릇 밤 묵었던 한 시인과의 인연이 일천수백년 세월 동안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모양 없는 영원한 다리가 되고 있습니다.

 

장계(張繼)

자가 의손(懿孫)이며, 양주(襄州 = 현 호북(湖北) 양양(襄陽)) 사람이다. 

생몰연대(生沒年代)는 정확히 모르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도 별반 알려진 것이 없다 천보 12년(753)년에 진사가 되어 검교사부낭중(檢校祠部郎中) 등의 벼슬을 지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일찍이 시명(詩名)을 얻어 유장경, 고황(顧況)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유품으로 『장사부시집(張祠部詩集)』이 전해지고 있다

5만여 수의 시를 수록한 『전당시(全唐詩)』에 그의 시가 30여 수 수록돼 있는데 다른 시들은 볼 만한 것이 없고 오직 이 시 한 편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아마 이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그는 잊혀진 시인이 됐을 것이다.「풍교야박」이 유명해진 것은 일차적으로 시 자체의 예술적 완성도 때문이겠지만, 이 시를 둘러싸고 일어난 후대의 논쟁과 여러 가지 일화들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송나라 구양수(歐陽修)는 그의 저서 『육일시화(六一詩話)』에서 이 시를 매우 강하게 비판했다.

즉 한밤중에 절에서 종을 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아름다운 시구(詩句) 만들기에만 급급해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 시를 짓는다는 것이 그의 논지다. 그래서 이 시에 ‘어병(語病: 어폐)’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후 이 시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중에는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뱃전에 들려오네”라는 구절과 “달 지고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이라는 구절을 들어서 ‘밤에 우는 까마귀도 있느냐?’ ‘새벽에 지지 않고 한밤중에 지는 달도 있느냐?’는 등의 논란이 수없이 있어 왔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쑤저우의 어느 절에서 밤중에 종을 쳤다는 사실을 고증하기도 했고, 밤에 우는 까마귀와 밤중에 지는 달도 사실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렇게 거듭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거듭된 논란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풍교야박」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당나라 무종(武宗)이 이 시를 무척 좋아해 죽기 1개월 전 당대 제일의 석공을 시켜 돌에 새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시비(詩碑)는 저세상에 가져가서 내가 감상할 것이니 후대에 이 시를 다시 돌에 새기는 자가 있으면 천벌을 받으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풍교야박」 시비를 무종의 능에 순장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천벌을 받으리라’는 무종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송나라 왕규(王珪)가 이 시를 돌에 새겼고 명나라 문징명(文徵明)도 시비를 만들었지만 두 사람은 ‘천벌’을 받지는 않았다. 문징명의 시비가 마모되어 그 후 청나라 유월(兪?)의 글씨로 다시 만든 비석이 지금까지 전한다. 공교롭게도 유월은 시비를 만든 그해 12월에 죽었다. 그뿐 아니라 1900년대 들어 전영초(錢榮初)라는 사람이 이 시를 석각(石刻)한 직후에 급사했고, 「풍교야박」의 작자와 같은 이름의 현대 시인 장계가 이 시를 돌에 새긴 이튿날 죽었다고 한다. 과연 천벌을 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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