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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by 까마귀마을 2023. 1. 9.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日照香爐生紫煙(일조향로생자연) 향로봉에 햇빛드니 물안개 자욱하고

遙看瀑布掛長川(요간폭포괘장천) 저 멀리 폭포수는 긴 강을 걸어 놓은 듯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내리꽂는 물줄기는 길이가 삼천 척인데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하늘 끝에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듯

                      ---- 李白(이백, 701~762)----

 

註.

廬山(여산) : 장시성(江西省) 구강현에 있는 명산으로 중국의 명승지이자 유명한 피서지

香爐(향로) : 여산의 한 봉우리, 모양이 향로처럼 생겼음

紫烟(자인) : 자색 안개

三千尺(삼천척) : 아주 긴 것, 당시의 1척은 약 31.1센티

九天(구천) : 하늘 가장 높은 곳, 하늘은 9층으로 되어 있다 생각했었다 함

 

여산(루산산)은 장시성 포양호의 서북쪽에 있는 경치가 수려한 명산이다. 특히 향로봉과 여산폭포가 절경이다.

광산(匡山)이라고도 불리는 여산은 중국의 명산 중 한 곳이다. 주(周)나라 때 광(匡)씨 성을 가진 일곱 형제가 이곳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는데, 그들이 거처한 오두막집(廬)이 변하여 산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의 강서(江西)성 구강(九江)시 북쪽에 있다. 북쪽은 양쯔강, 동쪽과 남쪽은 보양호이다. 작품에 나오는 향로봉은 여산 북쪽의 봉우리 이름이다. 운무가 자욱하게 낀 것이 마치 향을 피운 후에 올라가는 연기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백은 젊은 시절 협객이 되어 천하를 주유(周遊) 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시절에 본 여산(루산산)의 경치를 읊은 듯하다. 

햇빛을 받아 보랏빛 안개를 풍기면서 고요히 연기를 뿜고 있는 향로처럼 여겨지고, 기와 승에서 향로봉과 폭포의 원경을 포착하고, 전과 결에서 근접된 그 정경을 그려내고 있으며, 특히 결에서는 우러러 보는 폭포의 웅대함을 환상적인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시는 여산폭포의 장엄한 위용을 호방한 기개로 노래한 낭만적 서정시로서, 이백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명편으로 알려졌다. 폭포의 웅장한 스케일과 속도감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마치 선경(仙境)을 그린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로써 탈속적이며 낭만적인 시정(詩情)을 담아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는 작품으로 노장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고,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으며,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었다고 한다.

전반부는 멀리서 보는 광경이고 후반부는 가까이 다가가서 본 장관을 묘사했다.  이백이 지은 망여산 폭포는  2수 연작이다. 제1수는 오언고시이고, 제2수는 칠언절구이다.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향로산 폭포는 이백이 지은 두편의 시중 2편이다. 1수는 아래 따로 올립니다. 

여산은 예로부터 중국 문인들이 많이 다녀간 곳으로 중국문학의 산실이라 할 만한 곳이다.  중국 역사상 이 산을 다녀간 문인들이 남긴 문학 작품은 4,000여 수를 헤아린다고 한다.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제1수]

西登香爐峰(서등향로봉) 서쪽으로 향로봉에 오르니,

南見瀑布水 (남견폭포수)남쪽에서 폭포를 만났네.

掛流三百丈 (괘류삼백장)떨어지는 물줄기 삼백 장이라.

噴壑數十里 (분학수십리)수십 리 골짜기가 온통 물보라네.

欻如飛電來 (훝여비전래)느닷없이 번갯불 치는 것 같고

隱若白虹起 (은약백홍기)흰 무리 숨어 있다 일어난 것 같네.

初驚河漢落 (초경하한락)처음에는 은하수 떨어진 줄 알고 놀랐는데,

半洒雲天裡 (반주운천리)절반이 구름 속에 숨은 것 같네

仰觀勢轉雄 (앙관세전웅)올려다보니 생긴 모습 웅장하여,

壯哉造化功 (장재조화공)장엄함이 공을 들인 조화로구나.

海風吹不斷 (해풍취불단)바닷바람이 그치지 않고 부니,

江月照還空 (강월조환공)강에 비친 달빛은 다시 하늘 비치네.

空中亂潀射 (공중난종사)하늘에서 어지러이 튀는 물줄기,

左右洗靑壁 (좌우세청벽)좌우 양쪽에 이끼 낀 푸른 벽 씻어 내리네

飛珠散輕霞 (비주산경하)흩어진 물방울 날아 무지개가 되고

流沫沸穹石 (류말불긍석)흘러내린 물보라 바위에서 솟구치네.

而我樂名山 (이아락명산)나는 본래 이름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對之心益閑 (대지심익한) 명산을 대하자 내마음 더욱 한가해진다

無論洗塵顏 (무론세진안)이 물로 세상의 먼지 씻어버렸네.

無論漱瓊液 (무론수경액)신선들 마시는 물은 말할 것 없이,

且得洗塵顏 (차득세진안)이 물로 세상의 먼지 씻어버렸네.

且諧宿所好 (차해숙소호)또 내가 오래 바라왔던 것이니,

永願辭人間 (영원사인간) 여원히 인간세상 떠나고 싶어라.

이 백(李 白)(701-762) : 盛唐의 詩人.

字는 太白, 號는 靑蓮(청연) 또 스스로 酒仙翁(주선옹)이라했다. 中宗 長安 元年(701, 신라 효소왕 10년) 사천성에서 났다.

출생과 본적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그가 촉(蜀) 태생으로, 모친이 꿈에서 태백성(太白星, 금성)을 보고 출산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왔다는 설로, 이는 아버지 이광(李廣)이 서역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태어났다는 설과 부친이 서역의 부유한 상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백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단 젊은 시절 촉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살에 벌써 詩書에 통하고 百家書(백가서)를 탐독했다 스물다섯 살 무렵 촉을 떠나 양양, 형주, 무창, 금릉(金陵), 양주 등 장강 연안 지역을 유람하며 시 창작의 제재를 얻었다. 그는 안릉(安陵)에서 10년 정도 머물러 살 때 맹호연(孟浩然, 고독한 전원생활을 즐기고,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긴 시인)과 교류했다. 이백은 서른다섯 살 무렵 안릉을 떠나 북쪽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산동 연주(兗州)의 조래산(徂徠山)에서 도사 공소부(孔巢父), 배정(裵政) 등 네 사람과 함께 머물며 술로 나날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6명을 ‘죽계육일(竹溪六逸)’이라고 불렀다.

이백의 유람 생활은 두 가지로 읽힌다. 단순한 유람 생활이었다는 설과 출사를 위해 명사들과 교류했다는 설이다. 이백은 당시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문장력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어도 왕족이나 제후 등 권세가들에게 청탁하지 않고는 출사하기가 힘들었던 때로, 천성이 청렴했던 이백에게 출사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742년 이백이 회계에서 머물며 교류했던 도사 오균(吳筠)이 현종의 부름을 받고 궁에 들어갔다. 오균은 현종에게 이백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이에 이백은 장안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망하던 출사를 하게 된 것이다.

장안에 도착한 이백은 오균의 소개로 고관 하지장(賀知章)을 알게 되었고, 그에게 자신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장은 이제야 이백과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백을 ‘적선인(謫仙人)’이라고 칭했다. 이백은 현종을 알현하고 다시 한 번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 천자의 조칙을 기초화하는 일을 하는 관직)에 임명되었다.

조정에 나간 이백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마음껏 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관직은 유명무실한 직책으로 현종은 그가 관리로서의 재능이 아니라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펼쳐 주길 바랐다. 이백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노령의 현종은 애첩 양귀비와의 환락에 빠져 있었고, 조정은 온통 비열한 소인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에 당 조정에 실망한 이백은 맘껏 술을 마시고, 미친 듯 행동하며, 장안의 술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어느 날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침향정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는 흥을 돋우기 위해 이백을 찾았고, 이미 고주망태가 된 이백이 사람들에게 억지로 끌려왔다. 현종은 친히 이백의 술기운을 깨우고, 양귀비에게 손수 먹을 갈게 했다. 그는 취기를 빌어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지었다.

이백이 단숨에 아름다운 시를 짓자 크게 기뻐한 현종은 이백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이백은 당대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환관 고력사가 자신의 신을 벗기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일로 이백은 고력사의 원한을 샀으며, 양귀비 또한 자신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비연(趙飛燕, 한나라 성황제의 황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미인으로 여겨진다)에 빗댄 것 때문에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

양귀비나 환관 고력사 등 권세가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킨 이백은 결국 현종에게 중용되지 못했다. 이백은 주색에 빠진 현종에게 환멸을 느껴 744년 장안을 떠났다. 이 시기 이백은 두보(杜甫)를 알게 되어 그와 우정을 나누며 시를 교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안을 떠난 후 이백은 10여 년간 산동에 거처하면서 유람 생활을 했다.755년 이백이 명승 노산에 머무를때 안사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헌종의 아들 영왕 이린이 난을 제압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겠다며 강남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백은 이린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태자 이형이 이린을 견제하고자 먼저 왕위에 올라 숙종에 올랐다, 후에 숙종의 명령으로 곽자의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자 이린을 도왔던 이백은 옥에 갖히게 되었다. 이백은 곽자의 와의 친분으로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귀주 야량으로 유배를 떠났다. 야량을 향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이백은 도중에 사면 통지를 받고 풀려났다. 그후 이백은 금릉 선성등 장강 중하류 지역을 유람했다. 그는 만년에 친족인 이양빙에게 의탁했고 762년 임종을 맞을때 시문이 적힌 초고를 이양빙에게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백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달빛이 은은한 저녁에 취해 우저기(牛渚磯)에서 홀로 뱃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백이 하늘을 보니 거울 같은 얼음이요, 몸을 숙이니 강물에는 밝은 달만 있는 것이 아닌가. 이백이 흥에 겨워 강물 속의 달을 건지려다 그만 배에서 떨어져 익사했다는 것이다. 술과 시를 사랑했던 이백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다음백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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