寧爲千古藏踪鶴 不學三春巧語鶯 (녕위천고장종학 불학삼춘교어앵)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
---- 방한암선사----
'일제의 기세가 내리막길을 걷던 1942년, 경무국장 이케다(池田淸)가 총독부와 업무협의 차 현해탄을 건너온 길에 오대산의 한암을 찾았다. 한암을 설득, 불교계의 협력을 얻기 위한 속셈이었다. 이케다는 절을 올리기가 무섭게 한암의 속내를 떠보았다.
“이번 전쟁에서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한암 곁의 시자들 얼굴은 순식간에 흑빛으로 변했다. 덫을 놓은 이케다의 표정도 심각했다. 일제가 이긴다고 하면 아첨의 말이 될 것이고, 진다고 하면 앞으로 닥칠 핍박과 수난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방안을 꽉 채웠다. 한암은 그러나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덕(德)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결코 임기응변의 답이 아니었다. 이케다는 말문이 막혔다. 이 한 마디에 정신이 아득해진 그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산문을 나왔다. 백척간두(百尺竿頭), 한암의 상황이 그랬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한걸음 더 나아가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질 줄이야. 한암의 힘이었다. 고려의 나옹(懶翁)은 수행의 한 극점을 현애살수(懸崖撒手)로 표현했다.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손을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한암의 힘은 바로 그런 수행에서 나온 것이리라.
한암이 말한 덕은 정의까지 포함한다. 덕은 한암의 오도적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덕은 불교적 언어로 무위심(無爲心)이다. 한암을 연구해온 김호성(金浩星) 동국대교수는 “삶의 괴로운 현실은 부덕에서 비롯되며 덕을 베풀 때 세상은 바로 선다. 사람들이 자비를 실천할 줄 몰라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유위심(有爲心ㆍ차별 또는 인연을 일으키는 마음)이 자비의 실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무위심을 닦으면 자비심의 발로는 저절로 이뤄진다는 게불교적 사유다”고 말한다. 한암선의 특징을 무위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암선사는 온양 방(方)씨이며 속명은 중원이다, 법호는 한암(漢巖)이고, 본관은 온양이다.
흔히 방한암선사로 불리며, 경허성우와 함께 근세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승려로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한암중원(漢岩重遠ㆍ1876~1951) 그를 사문의 길로 이끈 단초는 ‘반고씨(盤古氏)’였다. 부친은 한학자이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9세 때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읽던 중 ‘태고에 반고씨가 있었다’는 구절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도 답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의문을 간직한 채 성장 한 그는 21세 때 금강산 유람에 나선다. 그리고 삭발을 결심한다.
금강산 장안사 행름(行凜)에게 출가한 그는 3번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을 밟는다. 출가하던 해 신계사에서 보조(普照)의 수심결을 읽다가 초견성(初見性)의 법열을 맛본다. 한암은 이후 경허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경허는 바람이었다. 숨바꼭질 하듯 경허를 찾아 전국을 떠돈지 2년 만에 경북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서 극적인 첫 대면을 한다. 한암은 어느 날 경허의 금강경 설법을 듣게 된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을 비상(非相)이라고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사비상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구절을 듣고 “안광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눈에 우주 전체가 훤히 들여다보였으며 듣고 보는 것이 모두 나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고 한암은 두번째 깨달음의 순간을 적었다. 경허는 “한암이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인가한다.
‘남 만공(南 滿空) 북 한암(北 漢岩).’ 경허의 소멸이후 한국불교를 이끌어간 둘의 위상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만공은 충남 수덕사, 한암은 강원상원사를 중심으로 일방의 종주가 됐다. 경허선의 세계에서 둘의 위치는 각별하다. 무엇보다 한암은 스승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지성과 안목이 탁월했다.
수제자 만공이 1930년 스승의 생애를 정리하는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의 집필을 한암에게 맡긴 이유도 다 그런데 있다. 경허는 1900년 겨울 해인사에서 한암과 해후, 한철을 함께 보낸 뒤 전별송을 짓는다. 경허는 이 무렵부터 잠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허는 전별송에 서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고 적고 시 한수를 덧붙인다. 성행이 질박하고 학문이 고명한 후학을 만난 스승으로서의 기쁨과 애정의 표시였다.
북해에 높이 뜬 붕새의 날개 같은 포부(捲將窮髮垂天翼ㆍ권장궁발수천익)
변변찮은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 (謾向槍楡且幾時ㆍ만향창유차기시)
이별이란 예사라서 어려울 게 없지만 (分離尙矣非難事ㆍ분리상의비난사)
뜬 세상 흩어지면 또 다시 언제 보랴 (所慮浮生杳後期ㆍ소려부생묘후기)
스승의 심정을 헤아린 한암도 답시를 쓴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 (霜菊雪梅纔過了ㆍ상국설매재과료)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 없을까요 (如何承侍不多時ㆍ여하승시부다시)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있는데 (萬古光明心月在ㆍ만고광명심월재)
뜬 세상 뒷날의 기약은 부질없습니다 (更何浮世謾留期ㆍ갱하부세만유기)
한암은 평북 맹산 우두암에서 보림을 하다 계오(契悟ㆍ깊은 깨달음)를 이룬다. 서른 넷의 나이였다.
“스님은 오도송에서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 홀연히 눈이 밝았으니
이로좇아 옛길이 인연 따라 맑네
누가 와서 조사의 뜻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바위 아래 울려대는 물 소리는 젖지 않았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글 끝의 ‘岩下泉鳴不濕聲(암하천명불습성)’이 어떻게 조사의 뜻이 될 수 있습니까.”
“네 뜻이 아닌 고로 조사의 뜻이니라.”
“스님께서 속서에 능하다는 사실을 익히 들었습니다.”
“내가 그대를 수행인이라고 잘못 부를 뻔했구나.”
한암이 상원사에서 수좌 운봉(雲峰)과 나눈 법담이다.
비수를 품은 듯한 험구의 교환이다. 운봉이 조실 한암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자 한암은 “이 밥 도적아”하는 투로 맞받아친다. 한암은 제자들의 파격적인 도전도 마다 않고 수용, 저마다 근기에 맞게 지도했다. 그의 문하에서 효봉(曉峰) 탄허(呑虛) 동산(東山) 보문(普門) 등 숱한 거목들이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경봉(鏡峯)과는 서로 호형 호제하며 깊이 사귀었다.
寧爲千古藏踪鶴 不學三春巧語鶯(녕위천고장종학 불학삼춘교어앵)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지는 않겠다.”
한암이 봉은사 조실 자리를 털고 상원사로 들어가면서 시자 용명(龍溟)에게 들려준 말이다. 한암은 다시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간 것이다. 한암은 1941년 조계종의 첫 종정에 추대된다. 31본산 주지들은 한 국불교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총본산을 두기로 결정한다.
종명(宗名)은 권상로 등 당대 석학들에 의뢰, 조계종으로 정했다. 한암은 “중벼슬은 닭벼슬만도 못하다 하였거늘 나 같은 늙은 중에게 감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명리에 초연한 수행자였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한암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스님의 덕이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 1951년 신묘년 음력 2월 14일 -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 이 다함을 알고 물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사진 앞에 있는 경상(經床)은 김현기 거사가 가져다 놓았으며 벽에 쳐져 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로 두른 것이다.
한암 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一鉢錄)」 한 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 으로 재간행하였다.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1876.3.27 강원 화천출생, 속성은 온양 방(方)씨, 법호 한암,
1897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 수심결 읽다 1차 개오
1899 성주 수도암에서 경허의 설법 듣고 2차 개오
1910 평북 맹산 우두암에서 3차 개오
1926 오대산 상원사 주석
1931 경허의 행장 편찬
1941.6.4 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 받아 광복 때까지 역임
1951.3.22 세수 75, 법랍 54세로 열반
'나의 취미 생활 > 한문서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竹里館(죽리관) (0) | 2023.02.10 |
---|---|
楓橋夜泊(풍교야박) (2) | 2023.01.28 |
望廬山瀑布(망여산폭포) (0) | 2023.01.09 |
秋夜雨中(추야우중) 가을밤 비는 내리고 (0) | 2023.01.03 |
松茂栢悅蕙焚蘭悲 (송무백열 혜분난비) (2) | 2022.12.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