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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七步詩(칠보시)

by 까마귀마을 2022. 10. 28.

칠보시(七步詩): 일곱 걸음만에 지은 시

 

煮豆燃荳  (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어찌 이리도 급하게 삶아대는가~

                              --- 조식(曹植)---

 

煮豆燃荳萁(자두연두기) 또는 煮豆燃萁(자두연기)란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는 뜻으로 형제끼리 서로 다투고 죽이려하는 아귀다툼을 한탄하는 말로 골육상쟁(骨肉相爭)과 상통하는 말이다. 이 말의 출전은 송(宋)나라의 문학가 유의경(劉義慶)이 쓴 일화집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전하는데 판본에 따라 두 가지 시(詩)가 전한다.

                         

  煮 : 삶을:자, 

  豆 : 콩: 두, 

  燃 : 사를 : 연,  

  萁 : 콩깍지 :

  本是 : 본래

  煎 : 달일 : 전

  太 : 심하다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위(衛)나라의 시조인 조조(曹操)는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과 함께 이른바 삼조(三曹)라 불리며,   건안문학(建安文學 : 후한 말기의 문학을 마지막 연호를 따서 건안문학이라 부름)을 꽃피운 문인이기도 하였다.

조식은 문재(文才)가 특출하여 조조가  맏아들 조비 대신 그를 후계자로 정할 생각까지 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이로 인하여 조비는 항상 동생인 조식을 경계하는 마음을 품었다.

 

조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조비(文帝)는 비록 왕위는 차지했지만 셋째 동생 조식(曹植)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다. 조비는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자랄 때 부친의 사랑을 많이 받은 동생 조식에게 항상 질투심을 느꼈다. 조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0세가 되면서 시(詩)를 지었고 문장(文章)도 뛰어났다고 한다.

부친(父親)인 조조(曹操)가 사망하자 왕위(王位)를 차지한 장남(長男) 조비(曺丕)는 동생 조식(曹植)을 지지(支持)했던 신하들을 모두 제거(除去)하고 조식(曹植)에게도 앙심(怏心)이 사라지지 않아 기회를 보아 동생 조식(曹植)을 없애려고 했다.

어느 날 왕(王) 조비(曺丕)는 동생 조식(曹植)을 궁정(宮廷)으로 불러 명(命)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너의 시재(詩才)를 자랑스러워 했으니 이 자리에서 일곱 발자국 걸어가는 동안 시(詩)를 지어 보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놀란 동생 조식(曹植)은 그래도 형(兄) 조비(曺丕)에게 시제(詩題)를 달라고 청(請)하여 시제(詩題)를 ’兄弟(형제)‘라고 받자  
조식은 일곱걸음을 떼며 즉시 시를 지었다.

 

‘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上煎何太急(자두연두기 두재부중읍  본시동근생  상전하태급)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콩은 솥 안에서 울고 있구나. 본래는 한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그토록 다급하게 달이는고

 

중국 문학사에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한 뿌리에서 자란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 상황에 빗대어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애간장을 끊는 눈물의 시를 들은 조비는 자신의 졸렬함을 뉘우치고 동생을 놓아준다.

인류역사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형제 간 피비린내 나는 살해극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형제간 분쟁은 주로 장자 승계의 원칙이 깨졌을 때 발생했다. 장자보다 동생 또는 이복(異腹)의 능력이 뛰어난 경우, 선왕이 장자가 아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하면서 이에 불복한 형을 중심으로 분쟁이 빈발했다. 이로부터 '자두연두기'는 형제간에 서로 다투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아주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 있는 사람은 칠보지재(七步之才)라 불렀으며, 뛰어난 문학 작품을 칠보시(七步詩)라 하였다. 

 

 

*골육상쟁(骨肉相爭) 

骨(뼈 골), 肉(고기 육), 相(서로 상), 爭(다툴 쟁).
뼈와 살이 서로 다툰다는 것으로, 형제(兄弟)나 같은 민족(民族)끼리 서로 다툼을 뜻한다. 뼈와 살이 서로 싸운다는 말로 동족끼리 서로 싸움을 비유하고, 뼈와 살이 서로 다툰다는 것이다.
비슷한 뜻으로 골육상잔(骨肉相殘), 동족상잔(同族相殘), 동족상쟁(同族相爭), 민족상잔(民族相殘), 형제혁장(兄弟鬩墻) 등이 있다.

 

칠보시는 2가지 판본이 있다.  

2가지 판본의 시가 전해진 이유와 2가지 판본의 시를 아래에 올립니다.

 

판 본 1 

 

煮豆持作羹(자두지작갱)   콩을 삶아 국물을 내고 

漉菽以爲汁(녹숙이위즙)   걸러서 즙을 만드네

萁在釜下燃(기재부하연)   콩깍지는 가마솥 아래서 타고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안에서 우네

本自同根生(본자동근생)   본디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다지도 급한가.

 

판본 2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이 가마솥 안에서 울고 있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원래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리도 급히 볶아 대는가.

 

* 2가지 판본의 시가 전해진 유래

서기 220년 정월, 예순 여섯 살의 조조(曹操)가 병사했다. 태자인 조비(曹丕)가 위왕(魏王)이 되었다. 

그 해 10월 조비는 이미 망해 실권은 없고 명목만 유지하던 후한의 헌제(獻帝)를 협박하여 황제의 지위를 빼앗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위나라 문제(文帝)가 되었다. 한 때 조조는 조식(曺植)의 문학적 소양을 높이 사고 태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근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된 바 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조비는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조식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했다. 조비는 자신보다 학식이 뛰어나고 정치지향적인 동생이 자신의 황제 지위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제거할 방법을 모색했다. 조식도 형 조비가 자기를 해칠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는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마침 조식이 조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음을 빌미로 임치후(臨淄侯)로 봉해져 변방에 있던 조비를 수도로 소환하였다. 그리고 조식에게 형제라는 시제를 주며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완성하라고 하였다. 만약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완성하지 못하면 큰 벌(사형)을 내릴 것이라 하였다. 이에 조식이 읊었다는 시가 바로 이 유명한 칠보시.

이 시가 처음 등장한 문헌은 위진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편집한  세설신어(世說新語). 여기에는 위 문제 조비가  동아왕(東阿王)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즉 사형을 받을 것이라 하자, 이에 조식이  판본 1의 시를 지어 읊으니, 황제인 조비가 심히 부끄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이 시는 문선(文選)의 주석에 등장하는데 주석을 단 이선(李善) 판본 2의 네 구로 된 시를 소개하고 있다. 

조식의 사후 1100년이 지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의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다시 픽션을 가미하여 이 시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도 판본 2를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 칠보시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전개돼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과연 조식이 지은 것인가 하는 점과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칠보시를 짓는 장면이 사실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첫째, 조식이 활동하던 건안(建安) 시대에는 칠보시와 같은 오언시가 아직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하였고, 정사인 삼국지(三國志)와 조식의 사후에 편찬된 조식집(曺植集)에 이 시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둘째,세설신어(世說新語)는 위진시대에 활약하던 인물들의 일화 등을 기록한 글인데, 세설신어에서는 이 시가 언제 어떤 연유로 지어졌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 

셋째, 세설신어에서 조식을 동아왕(東阿王)으로 칭하고 있는데, 조식이 동아왕으로 봉해진 시기는 조비가 죽고 조카인 조예(曹叡)가 명제(明帝)로 보위를 이은 후라는 점 등을 들어 신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현대 중국의 문학가이자 극작가인 궈모뤄(郭沫若) 칠보시를 상세하게 고찰한 결과 억지로 갖다 붙인 요소가 다수 있다. 그 까닭은 후세인들이 조식을 동정하고 조비에게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소설이 만들어 졌다고 생각한다. 만약 조비가 조식을 죽이려고 했다면 하필 시 짓기를 구실로 삼아 그를 핍박했겠는가? 조식이 문재가 뛰어나다는 것을 조비가 모를 리 없다. 게다가 진짜 죽이려고 했다면 시를 지었다고 해도 여전히 죽일 수 있었는데, 어찌 심히 비꼼만 당하고 부끄러워만 했겠는가? 

따라서 이 시의 진실성은 비교적 적다.”라고 말했다. 또한, 저명한 문화사학자인 상하이대학의 위치우위(余秋雨)교수는 조비가 유치한 장난 같은 잔혹한 연극을 대소 신료들이 도열하고 있는 궁전에서 벌일 정도로 멍청한 인물은 아니다. 게다가 조식의 문학 창작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런 시를 짓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시가 당시의 상황을 비유하기에 제격이고, 악부(樂府)시의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식의 자필 문장이 확실하나 창작 시의 연극 장면은 아마도 후세인들이 꾸며낸 것이며, “판본 2는 위작이며 칠보시의 원문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상의 논의에서  판본 1이 조식의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고, 판본 2는 위작이며, 걸음을 걸으며 시를 짓는   삼국지연의의 장면이나 드라마의 장면은 허구라는 것이다.(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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