相思怨(상사원) 그리움에 대한 원망
人道海水深(인도해수심)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 말하나
不抵相思半(부저상사반) (내)그리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네.
海水尚有涯(해수상유애) 바닷물은 오히려 끝이라도 있으련만
相思渺無畔(상사묘무반) 그리움은 아득하여 끝도 없다네.
攜琴上高樓(휴금상고루) 거문고 들고 높은 누각에 오르니
樓虛月華滿(루허월화만) 텅빈 누각엔 달빛만 가득해
彈著相思曲(탄착상사곡) 그리운 맘 담아 상사곡을 타려는데
弦腸一時斷(현장일시단) 거문고 줄과 애간장이 한순간에 끊어지니...
---李冶(이야)---
<註>
相思(상사) : 남녀 사이의 일방적인 그리움으로 짝사랑을 뜻한다.
道(도) : ‘길 도’자로 ‘길, 말하다, 다니다, 가다’ 등의 뜻이 있다.
不抵(부저) : ‘소용없다, ~에 미치지 못하다, 쓸모없다, 뒤떨어지다’ 등의 뜻이 있다.
尙(상) : ‘오히려 상’자로 ‘오히려, 더하다, 숭상하다, 높이다’ 등의 뜻이 있다.
涯(애) : ‘물가 애’자로 ‘물가, 끝, 잡도리하다, 수변水邊’ 등의 뜻이 있다.
渺: ‘아득할 묘’자로 ‘아득하다, 작다, 1의 천억 분의 일, 끝없이 넓음’ 등의 뜻이 있다.
彈著(탄저) : ‘칠 탄, 나타날 저’자로 ‘(현악기를) 탄주彈奏해 보이다’는 뜻이다.
*위의 詩 相思怨 (상사원)을 어느분이 순수 우리말로 번역하였는데 노랫말이 너무 아름다워 옮겨왔습니다.
"사랑이 한이 되다"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다하지만
내 그리움의
절반도 되지 않아요.
바닷물은
그래도 끝이 있지만
내 그리움은
아득하여 끝이 없답니다.
거문고 들고
주루에 올라보니
누각은 비어있고
달빛만 휘황하네
그리움의 노래를
홀로 타노라니
거문고 줄과 애간장이
한순간에 끊어집니다.
*琴: 거문고 금 이지만 당시 당나라의 현악기의 이름을 몰라 거문고로 번역한것으로 여겨짐
님에 대한 그리움을 애절스럽게 진솔하게 표현한 시가 아닐까 싶다.
얼마나 사무치게 그립도록 사랑했으면 현과 창자가 일순간에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슬픔에 비유했을까...
작자는 당나라때 여류시인 李冶(이야)이다.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유 여성이었다.
이 詩 상사원(相思怨)은 가곡으로도 유명한 이은상의 시 '그리움'의 원형이기도 하다.
당시 다른 여류시인 들은 기녀이거나 이혼녀의 처지에서 말년에 도가에 귀의했지만 이야는 어려서부터 도교에 입문한 여도사로서 사회적 비난에서 빗겨나 팜므파탈(요부 또는 치명적 여자)의 마력을 시와 미모로 유감없이 뿜어냈다. 색시쌍절(色詩雙絶)로 소문난 이야는 전국의 한량 들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았다.
*鷺山(노산) 이은상이 지은 詩 "그리움 "
그리움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 천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라
님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
하늘이 땅에 이었다 끝 있는 양 알지 마오
가보면 멀고 멀고 어디 끝이 있으리요
님 그린 저 하늘 해 그릴수록 머오이다
깊고 먼 그리움을 노래 위에 얹노라니
정회는 끝이 없고 곡조는 짜르이다
곡조는 짜를지라도 님아 울림 들으소서
李冶(이야)
이야(李冶)의 자는 계란(季蘭)이며 중국절강성 서북에 있는 오흥(吳興) 출신으로 천보(天寶) 연간(742)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망년도는 대략 784년이라고 전한다.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타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시적 재능도 뛰어나, 5~6세 어느 날 부친이 이야를 안고 있었는데, 뜻밖에 시를 읊조렸다는 것이다.… 經未不架却 心緖亂縱橫 (경미불가각 심서난종횡) 때가 지나도 채워지지 않는 바구니, 이내 마음 어지럽기만 하다. 「장미를 읊다(詠薔薇)」라는 것이었다. 대번에 놀랜 부친은 부녀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며 내심 출가시키려고 결심을 했으나 이야는 가정에 매이는 것이 싫었다. 그 당시로서는 유교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도교(道敎)의 여도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야는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도교는 황제(黃帝), 노자(老子)를 교조로 하는 중국의 다신적 종교이다. 무위(無爲 )자연을 주지(主旨)로 하는 노장철학(老莊哲學)의 류(流)를 받들어,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가미하여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술(術)을 구하고, 부주(符呪), 기도 등을 행한다. 이러한 도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을 일컬어 ‘도사’라고 한다. 이야는 도교를 구실삼아 도사가 된 뒤에 여러 남성들과 접촉하면서 자유 분망한 생활을 시작했다. 여성이라는 속박과 유교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한 인간으로서 보다 자유롭고 당당해 보이고 싶었을까. 아니면 애욕의 화신이 되어 방탕하길 작심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관습을 거부하고 모든 속박에서 일탈하고 싶었을까.
가까이했던 고중무(高仲武)라는 남성은 이야를 평하길, ‘선비에게는 백 가지 행실이 있고, 여인에게는 오직 네 가지 덕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계란[이야]은 그렇지 못하다. 겉모습은 웅장한 듯하나, 쓴 시는 방탕할 뿐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야의 품행이 시에 비하여 미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생각이 남성을 뛰어넘었던 것일까. (사덕(四德)이란 : 즉 부덕(婦德,) 부용(婦容), 부언(婦言), 부공(婦工)을 말한다) 이야와 친했던 남자는 육우(陸羽)와 유장경(劉長卿)이었다. 육우는 차를 무척 좋아해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다선(茶仙)’이라고 불렀으며, 그가 다경(茶經)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야가 생활에 어려움이 있거나 병들어 누웠을 때마다, 이야를 찾아갔던 사람이 바로 육우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유장경은 이야를 가리켜, ‘여류시인 중의 호걸이다(女中詩豪)’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들 사이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여러 문사들이 모인 연회가 열렸다. 당시 유장경이 몹쓸 병에 걸려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이야가 먼저 운을 띄웠다. ‘산 기운은 해질 무렵이 아름다운가요(山氣日夕佳)?’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장경이 이를 받아, ‘온갖 새들이 기탁할 곳이 있어 기뻐한다네(衆鳥欣有托).’라고 답했다. 그러자 좌중에 있던 문사들이 박장대소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고 받은 두 구절은 모두 도연명 (陶淵明 365~427, 진나라 시인)의 각각 다른 시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엄격한 사회에서 여성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남성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배짱과 즉흥적인 시흥(詩興)이 얼마나 호방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자, 이야의 명성이 널리 펴져 궁궐에까지 알려졌다. 궁궐에 들어가서 후한 대접도 받았다. 그러나 이야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남겼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에 잡혀갔다는 설도 있다. 이 반란은 당나라 현종 말엽에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다. 천보 14년(755) 안록산이 먼저 군대를 일으키고, 사사명이 이를 계승하여 숙종(肅宗)의 광덕원년(廣德元年)에 사사명의 아들, 조의(朝義)가 죽을 때까지 전후 9년간이나 계속된 중국 역사상 유명한 큰 반란이었다. 현종은 촉나라에 망명하여 퇴위하고, 반란군도 내부 분열을 일으켜, 763년에 평정되었다. 이로써 당의 중앙집권제는 파탄에 빠졌고, 중국 고대사회의 종말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야가 이때 반란군의 장수에게 시를 지어 올린 것이 발각되어 덕종(德宗)에 의해 매 맞아죽었다고 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참으로 기구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이로인래 그녀의 작품은 흩어졌고, 『전당시(全唐詩)』에 그녀의 시 16수가 남아있다. 후세 사람들이 그녀의 시와 설도(薛濤)의 시를 합하여 『설도, 이야시집(薛濤 李冶詩集)』 2권을 합간했다.(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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