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居(산거)
李仁老 (이인로)
春去花猶在 (춘거화유재)
天晴谷自陰 (천청곡자음)
杜鵑啼白晝 (두견제백주)
始覺卜居深 (시각복거심)
봄은 갔으나 꽃은 오히려 피어 있고
날이 개었는데 골짜기는 절로 그늘 지도다
두견새가 대낮에 울음을 우니
비로소 깊은 산 속에 있음을 알았다
杜鵑 : 子規(자규)라고도 한다. 우는 소리가 매우 처량한데 전설에 의하면 촉제 杜宇(두우)가 신하에게 쫓겨나 타향에서 원통하게 죽어서 그의넑이 환생하였다고 한다. 우리 말로는 접동새라 한다. 국어사전에는 소쩍새로 되어있다.
天晴 : 하늘이 맑음
卜居 : 점을쳐서 살곳을 정하다. 거주할곳을 선택하다.
이 詩는 이인노가 무신정변시 피신한 반룡사에 머물때 지은 시로 알려지고있다
봄날이 갔는데도 꽃은 아직 피어있고
하늘이 맑은 백주 대낮인데도
골짜기는 어두컴컴하여
두견새가 밤인줄 알고 울고 있으니
반룡사가 깊은 곳에
자리 잡았음을 비로소 알았다고 시인는 읊고있다.
왜 산에서 사느냐고 묻자 이백은 笑而不答心自閑이라 말하며 그가 사는곳이 別有天地非人間이라 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산속이 따분하고 무료할수도 있다. 특히 세상살이를 경험한 사람에게 산속 생활이란 정말 단순하고 지루할지도 모른다. 특히 세상적인 욕심과 목표를 가진 사람이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속과 분리된 깊은 산속살이는 더 답답하고 힘든 곳일수도 있다.
시인은 세상의 분란을 피해 깊은 산속의 절에 잠시 머물면서, 세상에서의 봄은 이미 지나갔지만 아직 지지않은 꽃을보고 더디가는 산속의 봄을 느끼며 골짜기가 깊어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여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 울음에 머물고 있는 이곳이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임을 새삼 깨달았나 봅니다.
*반룡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전국에 하나가 아닌것 같다, 검색해 보면 경북 경산과 고령에 반룡사란 사찰이 있다고 나온다, 이인노가 머문 사찰은 아마 고령의 반룡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인로(李仁老)고려때 문신이다
본관은 경원(慶源).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다.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 ;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 : 이인로·오세재·임춘·이담지·조통·황보항·함순 등 7현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진나라 때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시주를 벗삼았던 죽림칠현을 본떠 모임을 가짐으로써 죽림고회라 불렀다.)’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忤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 ;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 ; 뜻의 묘함)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 새로운 뜻)를 중시하였다.
이인로는 『은대집(銀臺集)』·『파한집』을 짓고 『쌍명재집』을 편찬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파한집에는 자작시가 많이 들어 있는데, 자작시만 들어 있는 것도 13화(話)에 이르고 있다. 또한 그는 용사(用事) 위주의 시론을 전개했다. 즉 시를 지음에 있어서 용사의 정묘함을 제일로 쳤으나,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험벽(險辟 : 뜻이 어렵고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이런 글자가 들어 있으면 시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함)한 용사는 배격했으며, 남의 문장을 본떠서 형식을 바꾸어도 새로운 뜻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좋은 시란 표현기교가 뜻을 따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갈고 닦는 공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천연미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