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영조때 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菴) · 섬촌(蟾村), 본관은 여흥(驪興)이다.부친은 문충공 민진후(閔鎭厚), 모친은 현감 이덕로(李德老)의 딸 연안이씨(廷安李氏)이다. 1709년 16세에 칠원윤씨(漆原尹氏) 윤경적(尹景績)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민백첨(閔百諂) · 민백겸(閔百兼)과 두 딸을 두었다. 첫째사위는 김상묵(金尙默), 둘째사위는 유언호(兪彦鎬)이다.
관직은 171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21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721년 중부(仲父 작은 아버지) 민진원과 매부 김광택이 유배되는 등 일가에 화가 미쳐 여강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726년 봉릉참봉 및 세자세마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명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물러나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1743년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750년 통정대부에 올라 공조참의 겸 원손보양관이 되었다. 1751년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성균관좨주 · 세자찬선 · 원손보양관 등을 역임하였다.
민우수 서간
민우수는 글씨를 잘썼다
서풍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양송체(兩宋體 한석봉체에서 발전한 兩宋 (송준길, 송시열) 의 서쳬)와 밀접하다. 작품은 비문과 간찰( 안부, 소식, 용무따위를 적어 주고 받는글) 등으로 전하며 서체는 석봉체의 골격에 안진경체의 웅건장중미나 비후미가 가미된 서풍이다.
또한 1750년대 이후의 비문은 이전의 웅건함에 원필세로 부드러움을 더했던 서풍과 다르게 순봉세에 연단連(斷)이 없어 사뭇 장중하며 날카로우며 명확한 획법과 정밀한 짜임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비문은 1746년 <충민공이봉상묘비(忠愍公李鳳祥墓碑)>나 1750년 <송심묘갈(宋諶墓碣)>, 1750년 <송대립묘갈(宋大立墓碣)>, 1752년 <순창군수조해묘갈(淳昌郡守趙楷墓碣)> 등이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장령윤우정묘갈(掌令尹遇丁墓碣)>, <생원박이홍묘갈(生員朴以洪墓碣)> 등이 전한다.
간찰에 쓰인 행서와 초서는 조부와 친부의 영향 아래 조선 중 · 후기 간찰의 서풍을 보여준다.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근묵》 게재의 <행서간찰>은 필치가 활달하면서도 균형감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고종사촌에게 보낸 <초서간찰>은 내용 가운데 '밤에 서둘러 쓴다'고 했듯이 필치가 가늘고 빠르다. 저서로는 1799년 활자본으로 간행된 16권의 『정암집(貞菴集)』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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