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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奉別蘇判書世讓 (봉별소판서세양)

by 까마귀마을 2021. 12. 15.

 奉別蘇判書世讓 (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와 이별하며)

 

月下梧桐盡 (월하 오동진)   달 아래 오동잎 다 지고

霜中野菊黃 (상중 야국황)   서리 속 들국화는 누런 자태 드러내네.

樓高天一尺 (루고 천일척)   누대는 높아 하늘과 한 척이요

人醉酒千觴 (인취 주천상)   님과 나 취했건만 오가는 술잔은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 (류수 화금냉)   흐르는 물은 내 가야금 가락 어울려 쓸쓸함을 더하고

梅花入笛香 (매화 입적향)   매화꽃 내음은 님의 피리 가락 서려 더더욱 향기롭네.

明朝相別後 (명조 상별후)   내일 아침 님과 나 서로 이별 후

情與碧波長 (정여 벽파장)    님 향한 사무치는 나의 정은 저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
 

위의 시는 황진이가 소세양과 이별할때 지은시로 알려지고 있다.

소세양은  이조, 호조, 병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당시 선비들은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 황진이와 하룻밤을 보내는게 최고의 자랑거리 이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소문은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 귀전을 울렸다. "나는 천하에 황진이라도 30일만 함께하고 헤어지겠다. 이를 실행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친구들께 호언장담하며 황진이한테 `석류나무 류(榴)' 한 글자만 적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황진이도 `고기 잡을 어(漁)' 한 글자로 답했다.

​소세양이 보낸 榴자는 석류나무류 자인데  이를 한자로 쓰면 碩儒那無遊가 되고 이를 풀이하면 `큰 선비와 놀아 보지 않겠는가?'라는 뜻이된다, 漁(고기 잡을 어)는 `고기 잡으려면 어부가 물에 들어와야지, 황진이와 놀고 싶으면 소세양 당신이 오너라.’ 주고받은 편지가 인연이 되어 소세양은 황진이의 부름을 받았다. 사랑에 깨 볶는 한 달이 되자 소세양은 떠나겠다고 했다. 소세양을 보내야 하는 이별주 앞에서 황진이는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이별시를 즉흥적으로 읊었다.  소세양이 이를 받아 읊조리고 나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여러 날을 더 머물렀다 한다. 동료들과의 약속을 집어던져 버린 것이다.

 

세간에는 소세양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황진이가 지어 보냈다는 "야사하" 제목의 아래 7언율시는 황진이가 지은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극작가 이자 작사가인 양인자씨의 창작품이며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을  김희갑씨가 작곡한것이 " 알고 싶어요" 란 대중가요이다. 가수 이선희가 불러 세간에 잘 알려진 노래이기도 하다. 

이은재 작가가 양인자( 서라벌 대학, 2011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대상, 작곡가 김희갑의 부인)씨의 허락을 받아 자신의 소설 "청사 홍사" 황진이 편에 삽입한것이 황진이가 지은 시로 잘못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야사하(夜思何)

蕭蓼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무슨 생각 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 나를 만나 행복 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마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 바쁠 때 생각해도 제 생각이 즐겁나요

暄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중종, 명종때(16세기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陳玄琴)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 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한다.

황진이는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 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황진이는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등이 있고 시조작품으로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내 언제 신의없어" "산은 옛산 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이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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