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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客至(객지)손님이 오시다

by 까마귀마을 2021. 11. 22.

客至(객지)손님이 오시다

杜甫(두보)

 

舍南舍北皆春水 (사남사북개춘수)
但見群鷗日日來 (단견군구일일래)
花徑不曾緣客掃 (화경부증연객소)
蓬門今始爲君開 (봉문금시위군개)
盤飧市遠無兼味 (반손시원무겸미)
樽酒家貧只舊醅 (준주가빈지구배)
肯與鄰翁相對飮 (긍여린옹상대음)
隔籬呼取盡餘杯 (격리호취진여배)

 

집 남쪽과 집 북쪽은 온통 봄물인데

다만 보이는 건 날마다 떼 지어 오는 갈매기들

 

꽃길은 손님 맞으려 쓸어본 적 없는데
사립문 이제 비로소 그대를 위해 열었다오

 

밥상 위 음식엔 시장이 멀어 반찬이 변변찮고
한 동이 술은 가난한 집이라 묵은 탁주뿐

 

이웃집 노인과 상대하여 마실 생각 있으면
울 너머로 불러 남은 잔 다 비우세

 


집 남쪽이며 집 북쪽에 모두 봄물이 넘실거리는데 다만 떼 지어 물새들이 날마다 오는 것만 보일 뿐, 

도회의 번잡함이 없는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지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꽃길을 비질해 쓸어본 적이 없을 만큼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보잘것없는 초당(草堂)의 문을 지금 비로소 당신을 위해 열었습니다. 

밥상에 뜨거운 밥을 올리긴 했지만 시장이 멀어 반찬을 사오지 못해 먹을 만한 반찬이 두 가지도 안 됩니다. 

술동이의 술은 집이 가난해서 새로 빚지 못해 예전에 담근 탁주(濁酒)뿐이구요. 

하지만 내 집 이웃의 여러 노인들과 함께 마주하고 술 마시겠다면 울타리 너머로 불러서 남은 술까지 다 마십시다.

강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초가에 살고있는 선비집에 귀한 손님이 오지만 가난한 살림살이에 묵은술 밖에 대접하지는 못하지만 사립문을 열고 꽃잎을 쓸어 손님을 맞는 정성과 반가움이 절절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시라 여겨집니다.


이 시는 당나라 숙종(肅宗) 상원(上元) 2년(761) 봄 두보(杜甫)의 나이 50세, 성도(成都)에 머물고 있을 때 쓴 작품이다. 

시인의 생활을 기록한 작품으로 한가한 정취가 드러나고 진솔한 정감이 담긴 시로 잘 알려져 있다. 두보(杜甫)의 다른 시 賓至(빈지:아래 빈지 詩 참조)가 공경의 뜻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에 비해 이 시는 친밀감이 있다.

註.

客至(객지) : 제목에 최명부(崔明府)께서 방문해 주셔서 기뻐하며[喜崔明府相過]”라는 원주(原注)가 있는데, 

두보(杜甫)의 모친이 최씨(崔氏)였으므로 최명부(崔明府)는 두보(杜甫)의 외삼촌이라 하기도 하고, 라는 을 가진 현령(縣令)으로 보기도 한다. 명부(明府)는 현령(縣令)의 존칭이다.

舍南舍北皆春水(사남사북개춘수) :()는 시인이 성도(成都)에 새로 지은 초당(草堂)을 가리킨다. ‘春水(춘수)’는 초당(草堂) 주변에 흐르는 완화계(浣花溪)를 말한다.

但見群鷗日日來(단견군구일일래) : 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群鷗(군구)는 물가에 사는 은자(隱者)의 반려(伴侶)이다. 但見(단견)’이란 표현 속에 언외(言外)의 뜻이 있다.

緣客掃(연객소) : 옛사람들이 항상 길을 청소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환영의 표시라고 한다.

() : 崔明府(최명부)를 가리킨다.

盤飧市遠無兼味(반손시원무겸미) ()은 원래 뜨거운 음식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음식의 범칭으로 쓰였다. () ()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兼味(겸미)는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뜻한다.

舊醅(구배) : 예전에 빚은 탁주(濁酒)를 말한다. ‘()는 거르지 않은 술이다. 신주(新酒)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肯(긍) : 기꺼이 ---하다

隔籬(격리) : 울타리로 나뉜

呼取(호취) :()는 동사 뒤에 붙는 어조사로 쓰여 뜻이 없다. 呼取(호취) 불러와서라는 뜻으로 환취(喚取)와 같다. 두보의 江畔獨步尋花(강반독보심화) 시에 喚取佳人舞繡筵(환취가인무수연:가인을 불러 화려한 연회석에서 춤추게 하리라)’라는 용례가 보인다. 의 몇 가지 다른 예를 보면, 간취(看取) 보아 인식하다’, 유취(留取) 머물러두다’, 대취(待取) 기다리고 있다 정도의 뜻이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에서 인용)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 자호는 소릉야노少陵野老, 사람들이 그를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렀다. 하남河南의 공현鞏縣(지금의 허난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에서 태어났다. 당현종 천보天寶(742~756) 연간에 장안長安에 이르러 벼슬길에 나갈 것을 모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십여 년 동안 곤궁하게 살았다.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胄曹參軍이라는 작은 직위를 얻었으나, 곧이어 일어난 안사의 난을 맞아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좌습유左拾遺가 되었다. 그러나 직책을 버리고 촉蜀으로 들어가 성도成都에서 검남절도사 엄무嚴武 밑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을 지냈다. 

사람들이 그를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부르는 까닭이다. 만년에는 온 가족이 동쪽으로 옮겨갔는데, 도중에 기주夔州에서 

2년을 머물다가 삼협三峽을 나와 악鄂, 상湘 일대를 떠돌다가 가난과 질병으로 세상을 떴다. 

두보는 성당盛唐의 시기를 거쳐 당의 국력이 쇠퇴하는 시기를 살았는데, 그의 시에는 불안한 사회와 어두운 정치 현실, 

그리고 백성의 질고를 노래한 것이 많아서 그의 시는 한편으로 시사詩史로도 불린다. 

두보는 같은 시기를 살았던 시선詩仙 이백李白과 더불어 당을 대표하는 시인의 하나로 꼽히며 시성詩聖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는데, 신악부新樂府의 길을 열어 신악부운동의 발전을 촉진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오칠고장편五七古長篇은 시와 역사로 읽히며 시가예술에서 높은 성취를 이뤄냈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 꼽히는 그는 이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병칭되었다. 140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두공부집杜工部集》이 세상에 전한다

 

 

두보의 자세한 생애

두보는 중국 당시대 시인, 정치가이며 이백과 더불어 시성이라 불리는 중국 최고의 시인이다.

두보는 당 현종 즉위년인 712년 오늘날의 하남성 장안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두심언(杜審言)은 당대 유명한 시인이었고, 아버지 두한(杜閑)은 뜻을 이루지 못한 서생이었다. 두보의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혹은 소릉야로(少陵野老)로 후세에 두소릉(杜少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는 장안의 남쪽 근교에 있는 두릉 땅에 선조가 살았기 때문이다. 만년에는 공부원외랑을 지내 ‘두공부(杜工部)’라고도 불렸다.

두보는 일곱 살 때 이미 〈봉황시〉라는 시를 짓고 아홉 살 때는 글씨를 쓰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는 조부가 저명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두보가 창작에 뜻을 두게 된 데는 어린 시절 조부의 영향이 큰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 집을 떠나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보는 시작(詩作)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과거에는 수차례 불합격했다. 그는 스물네 살 때 첫 과거시험을 보고 낙방했다. 이때는 간신 이임보(李林甫)가 정권을 전횡하고 있을 때라 공정하게 선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보는 이때까지는 크게 낙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 황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라는 충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보는 이후 다시 한 번 더 유랑을 떠나게 된다.

두보는 약 30세가 되던 741년에 양씨와 결혼한 후 단 한 번도 첩을 두지 않았다. 부인 양씨는 현모양처로 두보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지극히 궁핍한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두보의 곁을 지켰으며, 두보는 그런 아내를 염려하고 그리워하는 시를 짓곤 했다.

두보가 살던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는 것이었다. 하여 두보도 더 이상 가난을 못 이겨 미관말직이라도 얻을 양으로 746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장안은 재상 이임보의 횡포와 양귀비의 일족들이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며 부패할 대로 부패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보는 출사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그는 스스로 노자의 후손이라고 칭하는 당 황실에 잘 보이고자 도교를 칭송하는 〈삼대례부(三大禮賦)〉를 지어 현종에게 올려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올라 경세제민(經世濟民,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두보는 결국 임용되지 못했고,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두보는 장안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어려운 생활을 하는 가운데, 집권자들이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반면 백성들의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는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장안 시절 두보는 분명 불행한 생활을 했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눈은 그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이때 정부와 관료를 비판하고 현실의 참담함을 표현한 명작들이 창작되었다. 〈여인행(麗人行)〉에서는 양귀비의 사치와 향락을 통해 절대 권력자의 방종을 고발했고, 〈병거행(兵車行)〉에서는 어린 나이에 출정하여 마흔이 넘도록 전쟁터에서 고통을 겪는 백성의 원망을 한 병사의 입을 통해 표현했다. 두보 개인에게도 아픔이 찾아왔다. 자식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은 것이다. 이에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 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 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라는 명구로 세상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

755년 양귀비의 양자인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장안과 낙양을 비롯한 중원 지역을 모두 수중에 넣었다. 당 현종은 장안을 빠져나갔고, 백성들 함께 피란길에 오른 두보는 갖은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어느 시골집에 자리를 잡았다. 두보는 태자 이형이 영무에서 숙종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다 도중에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일 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이때 두보는 〈춘망(春望)〉을 지었다. 〈춘망〉에서 두보는 조정이 정치를 잘못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국토와 백성이 고통받는 시대를 슬퍼했다. 동시에 그 옛날 자신감이 넘치던 젊은이는 온데간데없고 상념에 젖어 가족을 그리워하는 백발의 서글픈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아래 춘망詩 참조)

757년 간신히 장안을 탈출한 두보는 팔꿈치가 다 드러나 해진 홑두루마기를 입고 낡은 삼신을 신고 숙종을 찾아갔다. 그는 좌습유라는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일 년 만인 758년에 화주(華州)의 사공참군이라는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삶의 본질이 절대 권력에 의해 파괴되어 고통받는 현장을 고발한 대표작 ‘삼리삼별(三吏三別)’, 즉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 〈신혼별(新婚別)〉, 〈수로별(垂老別)〉, 〈무가별(無家別)〉 등이 탄생했다.

759년 그는 전쟁과 기근을 피해 사천성의 성도로 피신했다. 친구인 엄무(嚴武)가 후원자가 되어 주었고, 그는 부근에 초당을 마련하여 비교적 안정적이고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두보의 시풍은 이때 또 한 번 변화를 겪는다. 나라와 백성을 향한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자연과 함께하는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는 시들이 많아진 것이다. 쉰 살이 가까워진 두보의 심경 변화는 〈춘야희우(春夜喜雨)〉에서 잘 드러난다.(아래 춘야희우詩 참조)

그러나 두보의 만년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엄무가 죽고 난리가 나자 그는 사천 지방을 전전하다가 766년에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도착했다. 768년에는 다시 강릉을 거쳐 악양에 이르렀다. 이 당시 두보는 이미 폐병, 중풍, 학질, 당뇨병의 후유증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등 심신이 쇠퇴한 상태였으며 가난은 극에 달했다.

769년에는 배에 거적을 얹어 지붕을 만든 배를 집 삼아 동정호를 떠돌아 다녔다. 쉰아홉의 나이에 두보는 아무도 모르게 고생스러운 일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홍수로 인해 고립되어 열흘을 굶은 두보에게 뇌양 현령이 소고기와 술을 보냈는데, 이를 모조리 서둘러 먹어치우는 바람에 그날 밤 복부가 부어올라 죽었다는 설이 있다. 이외에도 그가 물에 빠져서, 독에 중독되어서 혹은 오랜 뱃생활로 인해 병들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가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는 고도의 예술적 표현력이 발휘된 율시와 절구를 완성하여 중국 근체시를 집대성했고, 그가 남긴 시는 당 대부터 후대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시성’으로 존경받았다. 특히 결혼 이후 장안 시절 지어진 두보의 시는 사회시적 성격이 강하다. 두보는 나라와 백성에 대한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시대 상황을 고민하여 당시 가혹한 사회 현실을 비판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장편 고체시(古體詩, 글자나 글귀의 수가 일정하지 않고, 운을 맞추는 것도 법칙이 없는 비교적 자유로운 한시들은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에서 ‘시사(詩史)’라고도 불린다.(백과사전에서 옮김)

 

 

빈지(賓至) (손님이 오시다)

 

患氣經時久 (환기경시구) : 폐병을 앓아 시기가 지난지 오래되어

臨江卜宅新 (림강복택신) : 강가에 새로이 집을 지었다네

喧卑方避俗 (훤비방피속) : 시끄럽고 비속한 곳을 피하니

疎快頗宜人 (소쾌파의인) : 조용하고 상쾌하여 사람살기 적당하네

有客過茅宇 (유객과모우) : 어떤 손님이 나타나 내 초가집을 지나가니

呼兒正葛巾 (호아정갈건) : 아이 불러 칡건을 바로잡게 하였네

稀菜甲 (자서희채갑) : 스스로 가꾼 드문드문한 채소를

小摘爲情親 (소적위정친) : 조금 뜯어 옴은 정든 사람들 위함이라네

 

 

春望(춘망)

 

조정은 망했어도 산하는 그대로 인데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성 안은 봄이 되어 초목이 무성하네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시대를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한 맺힌 이별에 나는 새도 놀라는구나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봉홧불은 석 달이나 계속 오르고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여라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흰 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져                 白頭擾更短 (백두소갱단)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비녀도 못 꼽겠네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春夜喜雨(춘야희우)

 

좋은 비는 계절을 알고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

봄이 되니 곧 내리기 시작한다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

바람 따라 이 밤에 살짝 스며들어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신다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

들판 길 구름 낮게 깔려 어둡고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강 위의 배는 불을 외로이 밝혔다    江船火燭明 (강선화촉명)

이른 아침 분홍빛 젖은 곳을 보니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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