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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예수보다 150년 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 (사해문서)

by 까마귀마을 2021. 11. 6.

예수보다 150년 앞선 에세네파의 메시아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사해사본

과학동아 1998년 8월호에는 사해사본에 대해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 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기독교인)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 아닐까." [과학동아 1998년 8월호]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Essenes)의 고문서이다.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 중 옛 카이로에 있는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중세시대에 쓰여진 다메섹 계약(Damascus Covenant)을 구하게 된다. 이 문서는 또 다른 이름으로 '자도크 문서'(Zadokite Faragments)라고도 명명 되었는데, 당시에는 이 문서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쿰란에서 사해사본이 발견될 때 동일한 문헌들이 제 4, 5, 6 동굴에서 발견 되었다. 다메섹 계약을 비롯하여 공동체의 규칙과 다른 문서들을 사해사본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 문서는 매우 다른 두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앞 부분은 경고가 담기어 있고, 뒤 부분에는 법규정인 율법에 대하여 언급이 되어 있다. 문서에 따르면,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바빌론 유수가 일어난 지 400년 후, 신(神)이 보내신 '의로운 선생'은 새로운 종파를 창설하여 세례를 베풀며 40년동안 가르쳤다. 

그는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었으며, 사악한 제사장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40년후에 종말이 다가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메섹 계약뿐만 아니라 사해문서와 함께 발견된 그들의 경전 주석서(페샤림)에서도 의로운 선생을 되풀이하여 계속 언급하고 있다. 에세네파는 일종의 은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으로 구약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주석)을 했는데, 그것과 관련해서는 '억지로 끼워 맞춘 예수신화'에서 소개한바 있다.

 

이 종파의 창시자인 ‘의로운 선생’은 BC 152년 요나단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했을 무렵의 인물로 추측되며, 사해 서북쪽에 있는 쿰란의 수도원은 요나단의 조카 요한네스 히르카누스가 통치 할 무렵(BC 135~104)에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와 같은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 데 비해, 에세네파는 금욕생활을 기반으로 한 영지주의자들 이었다. 이들은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세력이었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 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으로, 쿰란 수도자들은 사악한 제사장들이 봉직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에세네파는 AD 68년에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했으며,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인들의 약탈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추어졌다. 외경을 다룬 책인 ‘숨겨진 성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필사본에 나오는 사악한 사제는 마카베오 가문의 요나탄이나 시몬일 것이다. 선한사제는 정의로운 스승이다. 정의로운 스승에 관해서는 그 동안 논쟁이 많이 벌어졌다. 듀퐁-조머 보고서는 쿰란문서, 특히 정의로운 스승이 에세네파 안에 그리스도교의 싹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씨오더 H.가스터는 그러한 주장이 엉터리라고 반박했다. 구약과 신약 중간시기에 나온 많은 문헌이 묵시록(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고 은연중에 뜻을 나타내 보임'이라는 의미이므로, 묵시록이란 '묵시한 내용을 적은 글)적이고 메시아적인 점을 고려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의 출현이 의외는 아니었다.

 

유대교 비 경전들의 메시아적 성격 때문에 그 문헌들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이 수정을 거쳐 그리스도교화 하였다. 심하게 말하자면 위조되어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증거하려고 했다. 에세네파나 다른 유대교 종파가 그리스도교의 출현과 연결된다는 보고 견해에 전혀 무리가 없다." [윌리스 반스토운/숨겨진성서 1권/ 이동진 역 / 문학수첩 / P.264~265]

 

에세네파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유대인 역사가 필로(Philo Judeaeus)의 글과 요세푸스의 고대사 그리고 플리니(Pliny)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에세네파라는 이름은 처음 필로가 '거룩'이라는 뜻의 단어 호시오스(hosios)를 사용한데서 유래했으며, 이 종파를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와 비교했던 요세푸스는 에시(Essi)와 에세니(Esseni)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 종파를 따르는 추종자를 제외한 수도자들만의 숫자만해도 약 4천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결혼한 이들은 소득의 일부를 이 공동체에 지불했고 그들을 위해 옥수수와 식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유대교의 한 갈래로 영지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집단이었던 에세네파는 유대교의 제사장들이 지키던 정결법을 더욱더 강화 시켰다. 

유대교와는 다르게 흘러내리는 물에 몸을 담그는 세례절차를 거친 후에나 입교가 가능했던 에세네파는 동굴에서 철저한 금욕적인 종교 생활을 실천했다. 그들은 당시의 유대교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던 것과 다르게 일요일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성전에서 행해지는 피의 제사를 거부했다. 

수도자들은 성(性)을 불결하게 여겨 상당수는 독신 생활을 했으며,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모두 함께 했는데, 이들의 생활은 중세시대 수도원과 비슷했다고 보면 되겠다. 육식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채롭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에세네파에게 독신을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성의 경우에는 예외를 두었다고 한다). 농사와 농지경작 그리고 가내업에 종사했던 그들은, 의복들과 신발들이 다 헤어질 때까지 입었고, 물물교환 이외에는 어떠한 상업적 활동도 불허했다. 특히, 에세네파는 병자들에 아주 큰 관심을 기울였고 방문자들에게 친절과 환대를 베풀었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여겼기에 노예제도는 천륜을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에세네파는 금욕적인 생활뿐만이 아니라 종말론에도 심취해 있었다. 전쟁 두루마리라 불리는 19개의 원주로 구성된 문서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의 전쟁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이 문서는 다분히 신학적인 내용이지만 마카비 시대에 경건한 사람들이 수행하였던 전쟁에 대해서도 간간히 언급하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의 40년간의 성전을 치른 후 메시아의 도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다윗 계통의 임금 메시아와 사독 계통 제사장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묵시 문학과 종말론적 기대에 찬 그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리라고 생각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의식에 따른 식사, 기도에서 두루마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에세네파는 오늘날의 유대교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에세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기독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에 등장하는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이나 산상수훈의 설교 내용은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된다. 

쿰란 문헌 속에는 "네 형제를 너 자신처럼 사랑하고, 가난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도우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의로운 선생이 "나는 참회하는 자를 치유하며, 단순한 자를 위한 지혜이며, 마음이 약한 자의 위로"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고유한 것으로 믿어지던 성령, 신의 아들, 복음, 새로운 약속(신약), 율법의 일들, 신의 교회, 의로운 신, 빛의 아들들 등의 표현도 이미 존재하고 있다. 

예수 가르침의 중요 부분 산상수훈의 묘사와 거의 같은 구절도 보인다. "지혜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고난을 겪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며 가난한 자, 배고픈 자, 근심 있는 자에게 영원한 삶을 약속하고 있다. 이미 예수에게 부여된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 그리고 신약 속에 예수가 직접 말한 것으로 되어있는 교훈들이 에세네파의 문헌 발굴로 인해 신학적 논쟁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또한 에세네파가 초기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집단적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이 그것이며, 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프스(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오버서(overseer)라는 에세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에세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쿰란의 텍스트 발견 50년을 맞아 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독일의 슈피겔지는 "예수가 가르친 교훈을 당시 유대교 안에서 찾아볼 수 없다던 종래의 주장은 이제 기독교 교리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에세네파의 창시자인 의로운 선생이 복음서속의 야고보(James)혹은, 세례 요한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에세네파의 의로운 선생은 그가 실존했다고 하더라도 BC 2세기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쿰란의 사해문서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인 공동체의 규칙은 초대 기독교와 중세시대의 수도원의 규칙서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숨겨진 성서의 저자가 공동체의 규칙에 대해 해설한 것을 아래에 옮겨보도록 한다.

"공동체의 규칙은 카이로의 에즈라 공회당에서 1896~1897년에 발견된 자도크 문서-다마스쿠스 문서와 그 내용이 비슷하다. 쿰란 문헌의 12세기 필사본인 자도크 문서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지시하는 규칙서인 것이다. 이러한 규칙서들과 유사한 것이 유대교 고대문헌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가 없고 다만 이와 비슷한 문헌들이,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 사이 그리스도교에서 교회규칙이라고 일컫는 것이 많이 나왔다. (게자 베르메스, 사해문서, 71페이지참조).

 

에세네파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시어도어 H.게시터는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게스터, 영어로 번역된 사해문서 35페이지 참조)

- 구성원들이 이 공동체를 부를 때 사용한 명칭은 팔레스티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사용한 교회라는 명칭과 똑같다. 공동체에는 거룩한 사람이 12명 있어서 이 사람들이 전반적인 지도를 했는데, 그리스도교의 열두 사도와 놀랍게도 상응한다. 12명의 거룩한 사람 위에는 고위 지도자 3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요한, 베드로, 야고보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세 기둥으로 지정된 것(갈라디아서 2:9이하)과 같다. 공동체는 또한 메바케림(감독자)이라는 정규 조직이 있었는데, 메바케림은 그리스어 에피스코피(주교)와 같은 말이다. 

공동체는 사막에서 길을 준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규정했는데, 이말은 세례자 요한이 자기 사명을 규정할 때 구약성서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윌리스 반스토운 / 숨겨진성서 제3권/ 이동진 역 / 문학수첩/ P.262~263]

 

 

사해문서의 숨은 뜻 예수보다 1백년 앞선 구세주?

이종호/동아일보 조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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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서에 적혀있는 많은 내용이 해독됐다고 해서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독을 정확히 하고 과학적인 조사를 완벽히 했기 때문에 수수께끼가 더욱 깊어진 예가 있다. ‘사해사본’(死海寫本)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고대 사본은 1947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됐다. 이 사본이 유태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고문서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종교의 창시자는 ‘이스라엘의 구세주’ ‘정의의 교사’ ‘이사야의 고뇌에 찬 종’ ‘하나님의 아들’ 등의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괴로운 죽음을 맞을 운명에 처했다.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흉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활해 세계를 구원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린다. 그는 인내와 인간성과 형제애, 자선과 빈곤을 가르치며 새로운 계율과 정의와 세례, 그리고 성찬(聖餐)을 만든다.

동굴에서 발견된 비밀사본 '사해사본'이 발견된 사해 그처 쿰란의 동굴.

이 사람이 누구냐고 퀴즈에 낸다면 거의 모두 ‘예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해사본’에 적혀 있는 이 사람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오직 ‘구세주’라고만 표기돼 있으며, 천국을 만들기 위해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민하는 사람을 구원해주는 인물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사람을 예수라고 단정한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 구세주가 예수보다 1백50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는 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리스찬이 믿는 예수는 오직 단 한사람의 인물이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미 그 이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설교된 것을 예수가 되풀이한 것이 아닐까.

사해문서가 발견된 것은 우연이었다. 1947년 5월 염소를 돌보던 무하마드라는 소년이 염소 수를 헤아리다가 한마리가 부족한 것을 알고 염소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바위틈에 뚫려 있는 동굴에서 고대의 항아리를 발견했다.

동굴은 길이 8.5m, 폭 3m, 그리고 천장이 3m나 되는 꽤 큰 공간이었다. 동굴 안에는 높이가 60cm 정도 되는 큰항아리가 여러개 있었는데, 그 안에 44cm의 폭에 8m나 되는 길다란 두루마리가 엉켜있었다. 소년은 이상한 글자들이 깨알처럼 적힌 8개의 두루마리를 꺼내들고 동굴을 나섰다. ‘구약성서’의 원본인 쿰란의 사해문서가 발견된 순간이었다. 사해문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 있었다.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자 사해 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됐다.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브오는 사해문서를 처음 발견한 소년과 함께 벼랑으로 갔다. 신부는 두루마리가 발견된 곳 주위로 에세네교파가 살아있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며, 그런 엄청난 보물이 단 한군데의 동굴에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에도 이조실록을 4부로 만들어 분산해 보관했듯이 귀중한 것일수록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러 곳에 흩어 놓았으리라는 추측이었다.
브오 신부의 지적은 옳았다. 그는 동굴을 열개나 더 찾아냈고, 그 안에서 수백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동굴에서 종교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와 마찬가지로 유태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구세주 또는 정의의 사도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율법과 제사와 같은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워 유대 율법서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모두 함께 했다. 초기 기독교의 형태가 불교에서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것과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에세네파의 생활이 그랬다. 대부분이 남자인 신도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해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으며, 윤리와 종교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엄격한 삶을 살았다.

이들은 최후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믿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의식에 따른 식사에 이르기까지, 기도에서 두루마리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영광스러운 새 시대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에세네파 교인들은 2백년 동안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전달과 읽기만을 계속한 것이다.

기원전 수백년에 제작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던 세상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이 되자 이들은 ‘어둠의 아들들’이 아닌 로마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사해동굴의 문서들은 이때 로마인들의 약탈을 피해 동굴 속에 감춰진 것이다.

‘사해사본’ 중 완전한 것을 정리하니 6권으로 추려졌다. 사해의 두루마기에는 ‘에스더서’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있었다. 메시아의 서, 하박국의 주석서(註釋書), 계율의 지도서, 라메크의 묵시록,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과의 전쟁 등도 수록돼 있었다. 이 사본들은 제목만 알려졌고 실물은 사라졌던 것이다.

사본들이 쓰여진 연대가 문제가 되자 여러 고대 문헌을 통해 연대를 추정하는 한편 사본의 재료인 양피지에 대한 화학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략 기원전 400-500년 사이에 책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사용된 언어는 기원전 100년에 사용된 것이었다.

여기서 대담한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유태교의 한 분파인 에세네교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신으로 기원 전후에 상당히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 또는 정의의 사도로 알려진 에세네교의 교주와 거의 같은 방법으로 사망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에세네교의 교리가 접목됐다. 그리스도교가 예수라는 인물 한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몇년 간 활동으로 성립됐다기 보다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에세네교의 교리를 예수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이면서 급속도로 성장한 것이 아닐까.[1998년 8월 과학동아 Copyright 2000 동아 사이언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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