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간에서 평신도를 병신도라 부르는 걸까?
최근 필자는 몇 분의 형제님들로부터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에서 겪고있는 절박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메일들을 받았다.
실명을 밝히신 그 분들의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내용은 담임 목사님들의 탐욕적인 행태에 대한 신랄한 고발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그런 목사님들에게 무조건 맹종하고 순응하는 장로님들과 집사님들에 대한 절망감과 탄식이 공통적으로 많았다.
그 형제님들이 장로님들이나 주요 집사님들을 만나 "교회를 이렇게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담임목사님께 건의하여 이를 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을 꺼내면, 거의 다 완고하게 거절하거나 직접 가서 말해보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마치 꽉 막힌 절벽처럼 교회의 중직을 맡은 이 분들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물론 담임목사님에게 가서 직접 건의를 하면, 순종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내 교회이니, 싫으면 네가 떠나라"는 식의 답변이 거의 공식이었다고 한다.
목사에게 맹종하는 교인들
심지어 교인수가 350여명 정도인 어느 지방 소읍에 있는 교회에서는 목사가 연봉을 1억원이나 받고 있으며,
게다가 일반 교인들은 타기 어려운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부흥강사로 수시로 돌아 다니고 있다고 한다.
과연 소읍에서 연봉 1억원이 중류 가정의 수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교회 운영면에서도 마치 목사 개인 사업체처럼 왕같은 권력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생생히 알게 되었다.
이 모두가 그 교회 제직들과 교인들의 순응적인 협력과 지원이 없이는 가능하지 못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비단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수많은 다른 교회에서도 부패한 목사님들이 개인기를 마음껏 발휘하며 부정을 행하고, 활개치며 설칠 수 있도록 화려한 멍석을 깔아 주고 있는 충성된 일꾼들이 바로 이런 우직한 분들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담임목사님께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제직들과 교인들이 바로 이 글의 주제라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고자 한다.
지난 수십년간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어 냈다.
이제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는 교회가 줄줄히 늘어서고,
아울러 지방의 농어촌 지역이나 섬마을에 이르기까지 어디를 가도 교회가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와 교인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누구나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제는 이런 양적 성장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제대로 뒷받침이 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고속성장 과정에서 한국 개신교는 비판자들로부터 세가지의 명예스럽지 못한 별명을 선물로 받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이름이 '개독교'이며,
다음은 목사님들에게 주어진 '먹사'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평신도들에게 선사된 '병신도'라는 이름이다.
이것 또한 세계 교회사에 보기 드믄 수치스러운 이름들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하여튼 한국 교인들은 평범한 것은 절대 못 참는 것같다.
여기서 왜 개독교와 먹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이미 널리 잘 알려진 사실이기에 생략하고,
이 글에서는 이 병신도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몇가지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이 '병신도'라는 말은 사실 잘 아시는대로 우리가 사용해서는 안되는 비속한 단어이다.
그 말을 쓰는 자체로도 다른 분들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불구하고 비판자들이 이를 사용한 것은 '평신도'와 발음이 매우 비슷한데다가, 나름대로 '병이 들어 잘못된 신도의 상태'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해서 채용한 속어로 이해된다
어떤 분들은 빈병같이 속이 비었다는 의미로 한자어 '甁信徒'로 쓰시기도 하는 데, 그것도 역시 일리가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아울러 필자도 이 글에서 불가피하게 '병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어떤 특정인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의미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느 정도 일반화되어 알려지고 있는 용어이기에 부득이 쓰고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병신도를 키운 사람들
그러면 어떻게 평신도가 병신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까.
구태여 왜 이런 오명을 얻게 되었나.
필자는 그 답을 필연적으로 먹사님들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들을 키운 사람들이 먹사님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먹사'란 보통의 건전한 목사님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자신들의 철밥통으로 생각하고 사리사욕만을 채우는 목사님들을 의미함을 미리 밝혀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족목사님들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먹사님들은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평신도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제대로 깨달을수록,
자신들의 비지니스에 더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중세 교회 성직자들이 신도들로부터 성경을 빼앗아 못 읽게 만든 것과 똑같은 심리일 것이다.
어떤 시대에는 단순히 성경을 몰래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단으로 몰려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니,
정말 인간의 간악함과 그 무지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절망감마저 든다.
하여튼 먹사님들이 바라는 최고의 교인이란 자신들의 말에 잘 따르고 적당히 똑똑한 병신도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잘도이용한다, 아나니아 와 삽비라 ,
말라기의 십일조등 성경의 본뜻을 살짝 왜곡시켜 엉뚱한 뜻으로 현란한 입술로 성도들을 회유 협박하는 수법또한 능란 일색이다.
고려대학교 김인수 교수는 이를 잘 지적하여 "목회자에게 의존하도록 성도를 양육하는 것은 목회자에게는 안정적이고 좋을지 모르지만,
성도는 병신도가 되고 하나님의 교회는 병들어 갈 것이다"
라고 이미 한국교회에 단호하게 경고한 바가 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먹사님들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자신의 멋진 비지니스로 알기 때문에,
교회의 운영이나 목회의 초점이 항상 양떼의 양적 성장과 털깍기에 맞추어져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양들의 영혼에는 사실 크게 관심이 없다.
오로지 양들의 숫자와 몸집만 크게 키워 철따라 털을 깍아 수입을 올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의 내용이 매우 다양한 것같고 제법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나,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선교하자!로 귀결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들의 교회에서는 선교도 구제도 봉사도 다 결국은 비지니스 확대를 위한 멋진 명분이며 도구일 뿐이다.
교회의 사역의 일부를 떼어내어 목사개인의 사역으로 만들고 그걸 빙자하여 자기의 안위와 가족의 허영과 사치와 물욕과 명에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
명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열정을 바치는 것이다.
불순한 열정,!!!과연 누구를 위한 열정인가?
열정이 아닌 자기 충족를 위한 열광이라면 틀린 말일까?
만일 어느 교회가 도둑질이나 악행을 가르친다면, 바보가 아닌 한 누가 그 교회에 출석을 하겠는가.
우리의 영리한 먹사님들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래서 자신들을 경건하며 능력있는 성직자처럼 가장하고,
교인들에게 다양한 신앙프로그램과 그들을 크게 감동시킬만한 그럴 듯한 사업들을 제시한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거창한 해외선교, 예배당 건축, 총동원 전도, 미자립교회 돕기, 불우이웃 돕기, 그리고 기타 봉사 활동들이다.
어찌보면 그 자체로는 거의 비난받을 일이 없는 정상적인 사업들이다
그리고는 현란하고 멋진 화술로 때로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교인들의 순수한 신앙심에 호소한다, "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으로 우리 한번 해보자! 순교적 각오로 나가자!". 그런 후에 양념으로 세계가 어쩌고 민족이 저쩌고 하며 헛바람을 조금 더 넣어주면, 대부분의 순진한 교인들은 가슴이 뜨거워지며 거기서 게임이 끝나버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참으로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수법같지만,
소위 믿음이 좋다는 교인들일수록 더 잘 넘어간다. 항상 좋게 생각하라고 긍정적인 생각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일천번제 헌금을 하면 자식이 잘되고
주의종을 잘모시면 자식이 잘된다.는둥
요즘의 자식사랑이 유별난 세태를 잘도이용한다.
참으로 유치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 수법같지만, 소위 믿음이 좋다는 교인들일수록 더 잘 넘어간다.
그 마음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에서 오래 생활하다보면 매우 지각있는 극히 일부 교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자연스레 목사에게 맹종하는 병신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얼핏 들어도 크게 틀린 것같지 않은 말인데다가 집단적으로 하도 자주 최면을 거니,
나중에는 거의 무비판적으로 먹사님의 말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먹사님들은 인기 탈렌트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설교도 매끄럽게 매우 잘 하시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이 그들이 참된 목사인지 아닌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을 경우가 많다. 심지어 처음에는 순수하게 잘하시다가, 배가 부르고 명예를 조금 얻더니 변절되는 목사님들도 적지 않은 것같다. 아니 근자에 들어서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상당수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년간 편안히 호의호식을 즐기시더니 아예 단체로 동맥경화라도 걸린 듯,
양심이 뻣뻣하게 굳어져서 진리마저 버린 변절자들을 우리는 한국교회내에서 날마다 보고 있는 것이다.
목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하여튼 병신도를 한마디로 정의 하라면,
믿음이 있기는 있는데 스스로 독립적인 신앙인격이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먹사에 의존해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라고 단정해도 큰 오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은, 먹사를 열심히 따르는 것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병신도들에게는 몇가지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유형 교회 그 자체를 매우 신성시한다.
따라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거나,
목사를 '주의 사자'처럼 믿고 높게 대접하며 맹종한다.
당연히 교회의 모든 행사나 프로그램에 무비판적으로 적극 참여하며 헌신적으로 활동한다.
둘째로,
십일조나 기타 헌금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잘한다.
남들이 적게 내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성격이 착실하며, 자신들이 다른 교회 교인들보다 매우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누가 자신들의 교회를 조금이라도 비판을 하면 정색을 하고 변호한다. 다음으로,
자신들의 먹사 수준에 걸맞게 세속적인 성공과 성취를 크게 평가하며 그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더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아쉬운대로 병신도 명단에 준회원으로 당당하게 등록할 수 있는 기본자격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먹사의 제자'로 길들여져 있다는 점이다.
먹사에게 배운 내용대로 따라 하는 것은 잘하는데 자기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판단해서, 실천하는 성숙한 신앙인격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이 분들 대다수는 성경 지식은 적지 않으나 심한 편식으로 인하여 영양 불균형 상태의 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을 배워도 헌신과 헌금을 통하여 복받고 잘된다는 부분을 주로 배우고 또한 그 깊이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 전체에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러다보니, 이들 병신도와 먹사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교회들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 아닐 수가 없다.
먹사들은 갖은 명분과 핑계를 만들어 욕심을 채우고,
병신도들은 이를 아주 좋게 여기며 따라가는 그야말로 속 터지는 일들이 빈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먹사는 병신도들을 양산하고,
그런 병신도들은 먹사의 악행을 지원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병맛 교회들의 한 단면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평신도를 깨운다!'
고 신바람이 나서 열심히 제자훈련도 하고 바쁘게 보냈는데,
요즘은 깨울 평신도들마저도 별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전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다 스스로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병신도들이 주변에 널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의 평신도들은 순박했던 편이 아니었나 한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스스로 독실한 신앙인인데다가 설탕만 주로 먹고 자라서 단소리가 아니면 잘 듣지를 않는다.
어쩌다 쓴소리를 좀 하면,
대부분은 성경까지 잘 인용하시며 오히려 매우 예리하고도 따끔한 충고들을 거침없이 되돌려 주시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가끔은 말도 안되게 횡설수설하시는 찌질이님들도 더러 계시기는 하다.
하여튼 과거에는 조용히 주무시던 평신도를 깨우는 것이 큰 일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몽유병에 취한 듯이 스스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병신도를 깨워야만 하는 암담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물론 이는 훨씬 더 어렵고 힘드는 일이 될 것이다.
요즘의 병신도들은 매우 완고한데다 스스로 똑똑하며 나름대로 정연한 논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에서 깊은 매트릭스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삼허를 모아 놓은 종합예술품
널리 알려진대로,
사랑의교회 전임 옥한흠 목사님은 지난 30여년 동안 제자훈련을 하시는 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삼허현상(三虛現像)을 예리하고 아프게 지적하셨다고 들었다.
그 삼허란 바로
허상(虛像), 허수(虛數), 허세(虛勢)라는 세가지 환상과 신기루라고 하셨다.
어떤 분은 그 유명한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통해 한국교회를 각성시켰던 대표적 논리가 바로 "이 삼허에 속지 말라, 삼허를 추구하지 말라, 삼허의 악마성에 붙잡히지 말라"라고 할 수도 있다고 요약해 주시기도 했다. 필자도 이런 논리는 문제의 핵심을 꿰뚤어 보신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었으며 올바른 방향 제시였다고 크게 공감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자훈련을 매우 잘 했다고 모두가 제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제자훈련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제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란 점이다.
그러나 이점이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크게 비판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사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나 시스템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완벽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팀에 따라 좋은 제자가 많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부분적인 실패가 두려워,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제자훈련 자체는 매우 훌륭한 시도이며 그런 시도는 충분히 위로와 격려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난 한 세대에 걸쳐 사랑의 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렇게 평신도를 깨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에, 다른 한편에서는 탐욕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수많은 먹사님들이 거대한 양산체제를 갖추시고 자기 교회의 평신도들을 아예 단체로 병신도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비극이 병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와서 보니, 놀랍게도 이들이 대량생산한 병신도들이야말로 앞에서 언급했던 삼허를 다 모아 놓은 종합예술품처럼 보이기마저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병신도들은 앞으로 한국교회의 큰 짐이 될 것이 확실시 된다. 만약 이 문제를 적절히 해소시키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사회의 큰 지탄을 받고 전도의 문이 더욱 좁아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여튼 한국교회는 이렇게 깨어난 평신도들과 시한폭탄같은 병신도들의 혼재 속에서 지난 30여년을 숨차게 달려온 결과, 이제 심은대로 결실을 맺기 시작해서 그 열매들을 다양하게 보여 주고 있다. 요즘 전국 여러 교회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바로 그 열매들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크게 유감스러운 것은 그런 열매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니, 비교적 견실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교회들의 교인들마저 매우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나머지 다른 교회들은 오죽하겠는가. 아예 나머지 뚜껑을 열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인 것이다.
루터와 칼빈이 그랬듯이
여기까지 병신도의 형성 과정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검토해 보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분기점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의 순박했던 평신도를 깨워야 하는 시대는 점차 지나가고, 앞으로는 고도의 매트릭스에 빠진 완고한 병신도를 깨워야 하는 더욱 어려운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이 병신도 문제는 마치 뜨거운 감자처럼 다루기 쉽지 않은 이슈이다. 만일 자신의 교회나 이웃 교회에 가서, "당신들 성경을 제대로 읽고, 좀 똑바로 하시오!"하고 소리친다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곱배기로 듣고 쫓겨나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아마 그들에게는 사도 베드로한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놈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몸으로 때워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방법론을 좀 시원하게 말해보라면 정말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종교개혁 시대의 평신도들은 지금보다 더 무지하고 완고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년 이상을 중세교회의 어두운 매트릭스에 갇혀 살아왔으니 오죽했겠는가. 따라서 과거에 루터와 칼빈이 그랬듯이,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가르침을 겸허하게 따르며 부지런히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부터 삼허의 헛된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좁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할 때에 눈에 보기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병신도 문제도 마치 거대한 빙산같이 서서히 녹아 질 것으로 본다. 즉 먼저 믿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사회와 교회안에서 소금이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면,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병신도들도 자연히 함께 동화되고 변화되어 참된 주의 제자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결론은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살고, 바르게 가르치고, 꾸준히 전도하는 일이 문제를 푸는 당연하고도 유일한 해법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도하고 노력을 한다면 이러한 삶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리고 이웃간에서도 구체적으로 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하여 그 동안의 외적 성장에 자만해 있던 개혁교회들이 다시 한번 스스로 각성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전화위복의 계기도 될 수 있으리라는 조심스러운 기대마저 해볼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필자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이 '병신도'란 이름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병신도란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건강을 잃으면 자연히 병이 들어 환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담고 자신을 부지런히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자신도 언제든지 병신도같은 신자가 되어 교회와 사회에 누를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병신도를 깨우는 일은 남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병신도들은 우리의 형제들
또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병신도들은 남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들이며 자매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분들을 깨우고 도와서 참된 동역자로 세우고 진정한 예배, 선교, 구제, 교육, 그리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동참시키는 일은 개혁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무이며 절대로 소홀히 해선 안될 중요한 사역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이 일이 어려울지라도, 어떤 경우에든 너무 낙심해서도 안될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바알에게 무릅을 꿇지 않은 여러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고,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 신자들의 가슴마다 심겨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은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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