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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기독교의 영지주의

by 까마귀마을 2021. 11. 14.

영지주의(Gnosticism)는 초기 기독교 당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두고 정통파 기독교와 대립한 기독교의 또 하나의 흐름이다.

정통파 기독교와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차이는 정통파 기독교에서는 구원이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가진방면 영지주의에서는 앎을 통해 가능 하다는 견해를 가진것에 있다 

영지주의(靈智主義)는 '앎'을 뜻하는 희랍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영지는 단순히 지식이나 이성적인 지식이 아닌 경이로운 마법으로 빛나는 지식, 통찰을 지칭하며 그 가르침 또한 동방의 모든 고대 종교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과 일치한다(『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컬럼비아 대학의 일레인 페이젤스(미국, 종교사학자, 컬럼비아 대학 종교학과장, 나그함마디 문헌 편집작업) 교수는 영지의 비밀이란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초대 기독교 간부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린 영지주의는 CE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후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교부들은 영지주의 복음서를 사악한 교사(敎師)들에 의해 쓰여진 비정통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하여 이를 파기시켰다. 

이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 당시의 수많은 영지주의의 가르침들이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몇 편의 문서만을 정경(正經)으로 확정한 소위 기독교 정통파는, 고대 종교 문헌 전체 중 극히 일부만 후세에 물려주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초대 교부들이 남긴 문헌을 통해 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수많은 복음서들은 그 목록만이 알려져 있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그런데 이렇게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던 영지주의 복음서가 지난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돌연 나타났다. 

학자들은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문구들 중 상당수는 큐(Q)에서 따온 것으로 믿고 있는데, 이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신약의 복음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원래 마태ㆍ마가ㆍ누가복음은 '말씀들(logia)'이라고 하는 공통의 줄기에서 나왔다. 

이 '말씀들'은 처음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도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그 일부가 훗날 복음서들로 고정되고 나머지는 사라져버렸다. 학자들은 복음서의 뿌리가 된 이 '말씀들'을 출처 혹은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쾰레(Qeulle)의 머릿글자에서 따와 큐(Q)라고 불렀다.복음서의 편집자들은 이 '말씀들'을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하여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만들었던 것이다(『신의 가면Ⅲ : 서양신화』). 

영지주의 복음서에도 신약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동일하게 나오며, 신약의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양자간의 차이점은 놀라울 정도이다.

 

첫 번째로 신약의 복음서를 믿는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한 심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이를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을 깨닫는 것이 곧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자아(自我)와 하느님의 신성(神性)은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개인의 영)과 브라만(우주의 영)의 합일을 방불케 하는 가르침이다.

 

두 번째로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달리 죄와 회개가 아니라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 우주 만물은 생사와 인과가 끊임없이 윤회하므로 한모양으로 머물러 있지않음), 제법무아(諸法無我 : 세상의 모든법, 일은 인연으로 생긴것이어서 진실한 자아 실체가 없는것))와 비슷한 교리를 설하고 또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동양의 구루(힌두교에서 혼자 힘으로 영적 혜안을 얻은 정신적 스승이나 지도자)와 비슷한 예수의 이미지를 상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하기에, 예수 또한 인간과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가진 존재로 믿는다. 

그러나 영지주의 복음서에서는 예수 또한 인간들과 같은 근원에서 왔다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세 번째로 기독교인은 구약의 야훼를 사랑의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전쟁을 좋아하며 살육을 즐기는 구약의 신이야말로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계를 만든 악마로 본다.

 

네 번째로 영지주의에서는 윤회를 인정하며 또한 위대한 어머니(태모)에 대한 숭배를 이야기한다.(『성서 밖의 예수』)위와 같은 가르침은 『우파니샤드』(힌두교의 이론적 사상적 토대를 이룬 문헌들의 집대성을 말하며 200편의 문헌이 있으며 불교 발생 1-2세기 이전까지 긴시간에 걸쳐 성립됨)같은 힌두 철학에서도 발견되지만, 많은 학자들은 특히 영지주의와 불교와의 관련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불교학자였던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28~1979)는 불교도들과 남부 인도의 도마 기독교인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쌍둥이 동생이자 사도였던 도마는 예수가 못 박힌 후 인도로 건너가서 전도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들과의 접촉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로마제국에서 영지주의가 꽃 피웠을 당시(CE 20~ 200 초기 기독교), 인도에서도 대승불교가 개화하고 있었으며 그 때는 인도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무역로가 한창 번성할 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신의 가면Ⅲ : 서양신화』). 

심지어는 이집트의 치유능력을 가진 현자들(therapeuti)도 불교로부터 근원했거나 아니면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최초의 문명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다는 『 보병궁복음서』(미국의 리바이 도우링 목사가 천상의 게시를 받아 쓴 복음서. 예수의 생애중 없어진 17년간의 티벳, 인도등에서의 수련기록이 있음)기록의 내용을 단순히 허구로만 간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영지주의를 1~3세기에 출현한 기독교 내부의 이단으로만 치부하지만, 영지주의를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지식은 신령스런 근원에서 흘러나온 인식이기 때문에, 단순한 믿음이나 이성적인 지식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 또한 동방의 모든 고대 종교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지주의를 연구한 독일의 전문가들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적인 영지는 기독교 내부에 존재하는 이단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 이전에 존재했던 또는 기독교와 원초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며, 그 본질에 있어 계속 이질적인 것으로 머물 사유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결과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리고 비교(秘敎 비밀의 의식을 행하는 종교))의 신봉자들은 이 영지주의를 '모든 종교의 원천에 존재하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뿌리'로까지 보고 있다(『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학자들은 이를 기독교 내부에 나타난 영지주의와 구별하여 원영지주의(Proto-Gnosticism)라고 한다. 세르쥬 위탱(프랑스, 문헉박사, 신비학 분야 최고 권위자)에 따르면, 이 영지주의가 가진 종교성은 근대적인 몇몇 열망, 예컨대 이성주의나 이신론(理神論 게시나 기적등을 부정하고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적 종교관)) 등과도 밀접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지중해 세계와 유럽에 사회적, 정치적인 위기 때마다 끊임없이 다시 대두되곤 하였다고 한다. 

르네 게농은 특히 모든 종교에서 영지, 즉 "완전한 인식에 의한 인간의 형 이상학적인 해방의 개념이 나타난다"고 말한다(『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간단히 결론만을 이야기하면 영지주의는 일면 기독교의 잃어버린 역사에 빛을 비춰주기도 하지만, 인류 태고적에 나타난 모든 종교의 뿌리였던 신교(神敎)의 가르침과 모든 인류를 만사지(萬事知 세상의 모든일 (이치)를 다 아는것. 知는 짝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함 즉 봄이되면 봄과 짝이 되어 봄처럼 산다))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제3의 超宗敎의 가르침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옮겨온 글 일부보완)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지주의 문헌은 거의가 2세기 중반 이후의 것이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그 기원을 바벨론 포로기(유대의 바벨 유수)까지 추산하기도 합니다. 월터 바우어(Walter Bauer)에 의하면 주후 2세기에는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Asia Minor)에 영지주의자들이 소위 정통 크리스천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영지주의는 동양종교, 그리스 철학, 그레코-로마의 신비종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섞인 일종의 혼합주의적 경향을 띤 또 다른 기독교 이었습니다. 또한 물질과 육체를 죄악시 하고 영을 높이 평가하는 그들의 극단적인 이원론적 사상 때문에 물질세계를 창조한 구약의 야훼 하나님을 가장 저급한 신인 데미우르지(demiurge)로 간주하였습니다. 물질과 육체를 악하게 생각한 나머지 두가지 상반되는 그룹이 내부적으로 생겼습니다. 육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기에 그 육체를 철저히 억누르는 금욕적 형태의 그룹과 육체적 탐닉에 전혀 상관치 아니하는 쾌락주의적 경향의 그룹으로 분화됩니다. 극과 극은 통하듯 실은 이 둘의 뿌리는 하나였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당대의 많은 대중들을 매료시켰고 2세기 중반까지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지요. 적어도 정통 크리스천들의 박해와 그들의 지적 종교로의 지나친 경도로 인하여 대중적 기반을 급격히 상실하기 이전에는 그랬습니다. 8층적 우주관에서 나중에는 365층으로 확대된 복잡한 우주관과 교리체계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성직자 계급 제도(hierarchy) 위에 구축된 가톨릭 입장에서는, 영지를 가짐으로써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간격이 없듯이, 다소 평등한 체제를 유지한 영지주의 그룹이 위협적인 이단으로 보여 졌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지주의 그룹이 내부에 어떤 영적 서열도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워낙 은밀한 그들의 행보로 대부분 그들의 가르침과 의식을 비판했던 교부들의 작품 속에서만 그들의 가르침의 일부를 간헐적으로 만나다가 1948년 (고대에는 케노보스키온으로 불렸던) 나그함마디(Nag Hammadi)라는 이집트 북부(우리가 보았을 때는 나일강 남부) 작은 촌락에서 주후 400년경에 정통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영지주의자들이 묻은 것으로 보이는 밀봉된 단지에서 가죽 장정 파피루스 코덱스 13권이 1945년 12월에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학계에서는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에 버금가는 중요한 발견으로 여기는 바, 초기 기독교의 기원을 밝히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나그함마디 영지주의 문헌들은 유네스코(UNESCO)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 하였습니다.

 

1) 이 문서들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추기경이 수도승들에게 ‘이단적’이라 여겨지는 모든 책들을 모두 파기하라는 명령을 내리 자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교 최초의 수도원 도서관에서 몰래 빼내온 책들을 숨겨놓은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1947년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Dead Sea Scolls)’의 발견과 함께 성서고고학 상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사해 두루마리가 주로 히브리 성서와 유대교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면, 나그 함마디 문서는 특히 신약 성서학과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 연구를 위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이 때 52종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들은 모두 이집트 고대어인 콥트(Coptic)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콥트’란 ‘이집트’라는 뜻인데, 콥트어 사본이란 고대 이집트 말을 그리스어 문자로 적은 사본입니다.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이름의 복음서들, 예를 들어, <도마복음>, <빌립복음>, <마리아복음>, <진리복음>, <이집트인복음> 등이 있었습니다.

2)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이 바로 <도마복음>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져 있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도마복음>이 전하는 메시지 자체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한 대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점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앤드류 하비(Andrew Harvey) 교수 같은 이는 1945년 12월에 발견된 <도마복음>이 같은 해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문헌이라 할 정도로 도마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도마복음> 콥트어 사본은 글씨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후 350년경에 필사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 자체는 여러 가지 정황을 참작하여 볼 때 기원후 약 100년경, <요한복음>과 비슷한 연대에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지만,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은 50년에서 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략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마가복음>이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생각되는 <마태복음>, <누가복음>보다 10년 내지 20년 더 오래된 전승을 포함한 복음서라는 이야기가 되는 셈입니다.

<도마복음>이 나그 함마디의 콥트어 사본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말 영국 고고학자들이 나그 함마디에서 약 250km 떨어진 나일 강 하류 옥시린쿠스(Oxyrhynchus)라고 알려진 고대 쓰레기 처리장에서 그리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피루스 뭉치를 발견했는데, 그 중 일부 조각들이 나중 <도마복음>의 일부로 판명되었습니다. 콥트어로 된 나그 함마디 문서와 달리 이 문서들은 그리스어(희랍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그리스 문자의 필체로 보아 대략 기원 200년경에 필사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물론 나그 함마디의 <도마복음>과 비교해보면 약간씩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합니다.

<도마복음>에 나오는 말씀들 중에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공관복음, 곧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아는 분들에게는 귀에 익은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 그리스도교 정경에 포함된 공관복음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이것이 그 당시 이집트, 로마 그리스를 비롯하여 중동 지역 일대에 성행하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의 영향을 반영하는 문서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는 복잡한 사상체계이지만, 그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공관복음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말세, 심판, 대속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빛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 이것을 깨닫는 ‘깨달음(gnosis)’을 통해 내가 새 사람이 되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특히 <도마복음>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으리라 생각되는 <요한복음>과 비교할 때, 둘 다 우리 내면의 ‘빛’(요 1:4)을, 그리고 미래에 있을 종말보다는 ‘태초(요 1:1)나 ‘지금’(요 5:25)을 강조하는 등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점은 요한복음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고 하거나 예수님을 ‘나의 주요 하나님’(요 20:28)으로 믿는 등 ‘믿음(pistis)’을 강조한데 반해 <도마복음>은 일관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5) 아무튼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영지주의의 모든 것을 완전히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보는 데는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도마복음>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 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1979년  『영지주의 복음서』(The Gnostic Gospel)라는 책을 내어 <도마복음>을 비롯하여 이른바 ‘영지주의 복음서’를 세상에 널리 소개한 프린스턴 대학교의 일레인 페이젤스(Elaine Pagels) 교수마저도 최근에 낸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책에서 그 주장을 일부 인정했습니다.

6) 제가 보기에 <도마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면 영지주의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우주론, 신관, 인간론, 구원관 같은 여러 가지 가르침들 중 무엇보다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깨달음을 통해 옛 자아에서 죽고 새로운 자아로 부활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기고 받아들인 것이라 보입니다.

물론 구태여 영지주의라고 하는 한 가지 사상체계의 직접적인 영향이라고 할 것 없이 세계 종교 전통 어디서나 발견되는 ‘신비주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복음서로 보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한문으로 ‘영지(靈知)’라 번역하고 영어로 보통 ‘knowledge’라 옮기는 그리스어 ‘gnosis’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깨침’ 혹은 ‘깨달음’에 해당하는 말로서 꼭 영지주의에서 특허를 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prajna), 곧 반야(般若), 통찰, 꿰뚫어 봄, 직관과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불교에서 반야를 통해 성불과 해탈이 가능해짐을 말하듯, <도마복음>도 이런 깨달음을 통해 참된 구원이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7) <도마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만 적은 ‘어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이나 활동 등 행적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마저도 없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렇게 어록으로만 이루어진 <도마복음>이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기 위해서나, 길거리에서 종교적인 문제를 놓고 논쟁할 때 쓰기 위해서, 혹은 신비적 명상을 위한 화두 비슷한 것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라고 보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8)그것이 무엇을 위해 쓰여졌든지, 저는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천국, 내 속에 있는 하느님, 내 속에 있는 참 나를 발견함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라는 기본 가르침에 충실한 복음이라 봅니다.

​(옮겨온 글)

 

영지주의를 알면 기독교의 뿌리가 보인다

영지’의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지식같이 산만하고, 분석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성적인 이해를 넘어선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의미한다. 신비한 영역이나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지식인 것이다.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비한 영역에서 오는 신적 존재의 ‘섬광(spark)’ 또는 ‘씨앗(seed)’은 전적으로 악한 물질 세계에 주어졌다고 한다. 그 섬광들 또는 씨앗들은 인간의 몸에 갇혀 있지만 ‘신비한 지식,’ 즉 ‘영지’로 다시 일깨워진 신적 요소는 사람들을 초월적 영적 영역에서 적절한 보금자리를 갖도록 한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라고 할 때는 영지를 소유한 자들, 즉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지를 소유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 영지를 통해 극상의 존재인 가장 거룩하고 존귀한 하느님과 연합하여 완전한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에서는 그것을 구원으로 본다. 즉,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얻은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에서는 인간은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영혼이, 불완전한 창조자에 의해 창조된, 불완전한 육체에 갇히게 되었다고 본다. 이 불완전한 창조자를 데미우르게라고 부르며, 대개는 기독교/유대교의 하나님(하느님)과 동일시한다. 데미우르게는 악의 근원, 또는 단지 불완전한 존재라고 여긴다. 이 데미우르게는 또 다른 완전하며 선한 존재와 대비된다. 이러한 불완전한 육체의 세계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그노시스적 앎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이러한 완전한 존재의 화신이며 영지를 이 세상에 전하기 위해 왔다고 주장한다.

영지주의는 지중해의 토속종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사상답게 지중해와 중동의 종교에서 서기 1세기에 흥행했으나, 서기 4세기에 기독교가 국교화 되자 로마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슬람교의 확산에 의해 남아있는 영지주의자의 수는 극히 줄었으나 현재까지 내려오는 단체들이 있다. 영지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신비주의적인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의 역사를 알려면, 무엇보다도 영지주의에 관해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티모시 프리코, 피터 갠디 공동저의 ‘예수는 신화다’는 이 점에 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성자와 순교자들이 모두 한결같은 믿음을 지닌 것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그와는 전혀 달리, 성자와 순교자들은 사실상 여러 이질적인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큰 범주로 보면 이들은 두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문자주의자(Literalists)라고 부르는 집단이다. 이들은 예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AD 4세기에 로마 제국이 받아들인 기독교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로마 가톨릭 신앙이 되었으며, 훗날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다.

이와는 달리 급진적으로 다른 기독교 집단이 있었는데, 영지주의자(Gnostics)가 바로 그들이다. 영지주의자를 속칭 ‘정통’교회 입장에서는 보통 ‘그노시스파’라고 번역한다. ‘그노시스파’의 사전적 의미는 ‘그노시스[靈知]개념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하려던 AD 2세기경의 이단 기독교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잊혀진 기독교인들이다.

훗날 로마 교회 문자주의자들의 박해를 받아 철저히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그들을 추적하는 사람들의 저술 외에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원래의 영지주의 문서가 한줌 남아 있을 뿐인데, 그것도 19세기 이전에는 출판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1945년에 이집트의 한 농부가 나그 함마디(Nag Hammadi; Naji Hammadi) 근교의 한 동굴에 감춰져 있던 영지주의 장서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장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배포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장서는 훗날 신약 <성서>에 포함되지 못했다. <도마의 복음서>, <빌립의 복음서>, 베드로와 12 사도의 행적을 기술한 텍스트, <바울의 계시록>과 <야고보의 계시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비롯한 초기 기독교 장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런 문서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새로 발견된 말씀들을 읽어 보려고 안달을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신약 <성서>로 채택된 몇 개의 복음서에만 매달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영지주의가 추방된 지 2천여 년 가까이 지났고, 그 동안 로마 교회에서 프로테스탄트(신교)가 갈라져 나갔으며, 수천의 개신교 집단이 생겼지만, 영지주의는 아직도 합법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영지주의 복음서를 탐구해 보면 그들에게 친숙한 종교와는 매우 이질적인 기독교의 한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집정관들의 본질>, <노레아의 생각>과 같은 낯선 제목의 문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마치 영화 <스타 트랙>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지주의는 진정한 ‘정신의 우주 비행’이었다.

영지주의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를 탐색했고 내면 우주의 마지막 미개척지를 대담하게 탐구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가 였으며, 창조적인 자유 사상가였다. 그들이 문자주의자 교회의 주교들에게 왜 그토록 미움을 받았는지는 너무나 명백해 보였다.

문자주의자들에게 영지주의자는 이단자였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이단자! 반영지주의 저술들 (초기 기독교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지녔던 힘과 영향력을 반증하는 자료들)을 보면, 영지주의자들은 ‘토착화된’ 기독교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주위의 이교 신앙에 오염되어 참된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한 사람들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전통을 지켜 가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자주의자 주교들을 ‘교회를 위조한 자’라고 생각했다. 또, 문자주의자들이 갖지 못한 은밀한 기독교의 미스테리아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영지주의의 믿음과 실천을 탐구하면서, 문자주의자들이 한가지만은 옳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이교도와 별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교도의 미스테리아를 논한 철학자들처럼 그들은 다시 육체를 부여받음(환생)을 믿었고, 여신 소피아(지혜)를 찬양했으며, 고대 그리스의 신비한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다.

영지주의자(Gnostics)란 ‘아는 자’라는 뜻이다.

이교도 미스테리아 입문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가르침이 영지(Gnosis), 곧 직접 경험에 의거한 ‘신에 대한 앎’을 전하는 힘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교도 입문자가 하나의 신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기독교 입문자의 목표는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가 충격을 받은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예수의 역사성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예수 이야기가 지닌 의미는, 이교도 철학자들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지닌 의미와 동일했다. 주 예수 이야기는 은밀하고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하나의 비유였다.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주목할 만한 가능성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교도 신화와 예수 전기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설명은 사실 항상 있었지만, 우리는 그 설명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비로소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따라잡을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는 훗날 로마 가톨릭 교회를 세운 문자주의자들의 견해와 정반대되는 점이 너무나 많다. 문자주의자들은 엄격한 권위주의자였다.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신비를 중시한 개인주의자였다. 문자주의자들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신조를 강화하고자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다양한 믿음과 실천에 관용적이었다. 문자주의자들은 수많은 복음서 가운데 넷만을 <성서>로 채택했고, 나머지는 악마적인 이단으로 간주해서 불길 속에 던져버렸다.

영지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수백 가지의 복음서를 썼다.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주교가 설교한 대로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문자주의자들은 가르쳤다. 참된 기독교인 이라면 그노시스, 곧 신비한 ‘앎’을 스스로 체험해서 스스로 1명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영지주의자들은 가르쳤다!

영지주의자는 혹독하게 억압을 당했다. 그래서 최근까지 우리가 그 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전부가 그들을 비방하며 그들의 기록을 말살한 사람들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문자주의자들은 영지주의가 기독교 사상을 곡해한 것 이교도 교리를 동원해서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혼란시킨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정통 기독교는 2천여 년 동안 그런 생각을 고수해 왔다. 성공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하고 모든 증거를 말살함으로써, 그런 생각은 널리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45년에 이집트 나그 함마디 인근의 한 동굴에서 영지주의 장서가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제 영지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장서는 영지주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기존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영지주의자는 오늘날 이단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스스로를 진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영지주의 복음서에는, 부활한 예수가 문자주의 기독교를 ‘거짓 교회imitation church(모방 교회)’라고 질타하는 대목이 나온다. 영지주의자가 보기에 참기독교를 곡해한 것은 문자주의자들이었다.

원래의 기독교는 모든 입문자가 신비한 앎,

곧 그노시스를 개인적으로 체험케 하는 영적 종교인데, 문자주의자들은 맹목적 믿음을 요구하는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보기에, 문자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공개적 미스테리아 ‘아등바등 사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세속적 기독교’ 만을 가르쳤다. 반대로 영지주의는 참된 ‘영적 기독교’였고, 소수의 선택된 사람에게 기독교의 은밀한 미스테리아를 가르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의 말은 이단 영지주의자가 한 말이 아니다. 초기 교회에서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 두 사람 알렉산드리아에서 초기 기독교 교리 학교를 운영한 클레멘스(주후 15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 교리학교에서 철학과 성경을 배움, 영지주의를 수용 참된 영지는 하느님의 게시라 주장)와 그의 후계자 오리게네스(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신학자, 성서, 체계적신학. 그리스도의 변증적 저술등 2.000여권의 저서를 남김, 254년 데키우스의 박해로 순교)의 저술에 나오는 말이다.

두 사람은!

평생 대단히 존경을 받았고, 오늘날에도 초기 기독교 철학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런데 두 사람은 현대의 주류 기독교보다는 영지주의를 훨씬 더 닮은 기독교를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가톨릭 교회의 성자로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영지주의에 대한 책을 썼고, 영지주의자를 참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클레멘스는 그의 저서 <스트르마타stromata> 7장 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만이 진정으로 경건하다. 참 기독교인은 영지주의자이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처럼 영향력 있고 존경을 받는 지성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 왔던 것과 달리, 영지주의자가 기독교의 변방에서 어슬렁거린 이상하고 하찮은 이단자였던게 아니라는 증거이기에 충분하다. 반대로 영지주의에는 폭넓고 역동적이고 세련된 영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영성은 AD 첫 몇 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지성인들을 매료 시켰다. 이단자로 낙인 찍혀서 거의 잊혀진 발렌티누스나(2세기경 로마에서 활약한 알렉산드리아 출생의 그노시스주의의 종교학자) 바실리데스(2세기경 알렉산드리아 그노시스파 학자)와같은 위대한 성자들뿐만 아니라, 명성에 전혀 금이 가지 않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사람들까지도 영지주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문자주의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에도, 영지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다. 4세기에도 여전히 이단적 교인들이 많아서, 예루살렘의 키릴로스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경고 해야 했다 "실수로 영지주의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테오도시우스 치하에, 이집트의 성직자와 수도사 사이에는 이단자가 너무나 많아서 티모테우스 주교는 일요일마다 강제로 고기를 먹게 함으로써 채식주의자인 영지주의자들을 솎아 냈다!

철학자 시네시우스(키레네 출생,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는 명백히 영지주의자였는데도 키레네의 주교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이교도 과학자인 히파티아와 함께 플라톤 철학을 연구했고, 부활을 신성한 미스테리아의 비유로 여겼다.

그는 유일하게 참된 종교는 철학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종교적 이야기와 의식은 철학자가 아닌 자들을 위해 철학적 진리를 대중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정통을 부르짖는 당대 상황에서 그는 주교로서 ‘은밀히 철학화’ 하지 않고 공개적 노선을 따르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을 위해 부활절 의식 대신 입문식을 치르게 했다. 그것은 정통 기독교보다 이교도의 미스테리아와 관계된 것이었다.

영지주의가 계속 인기를 유지해 가자 로마 교회는 강제로 ,무자비하게 효율적으로, 기독교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주후 347년-395년 동, 서로마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는 영지주의를 금하는 100개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모임, 입문, 재산 소유,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 자체를 불법화했다! 포고령 하나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이 법령에 따라 다음과 같이 알린다!

노바티아누스파·발렌티누스파·마르키온파·파울리키우파, 너희의 교리는 거짓과 허영으로, 파괴적이며 악의적인 범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너희에게 경고한다. 너희는 어느 누구도 이 시간 이후 모임을 갖는 것을 금지한다. 이 법령을 어길 경우, 너희가 모임을 가진 모든 가옥을 몰수해서 그것을 즉각 가톨릭 교회에 넘겨주게 될 것이다.

마침내!

381년에 테오도시우스는 이단을 국가 반역죄로 규정했다. 영지주의 저술은 ‘금지되기만 해서는 안 되며, 전부 파괴하고 불태워야 할’ ‘온갖 사악함의 온상’으로 매도되었다. 모든 철학적 토론은 전적으로 억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포고되기도 했다.

너희는 공개 석상에 나가서는 안 되며, 종교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해서도 안 되며, 토론을 하거나 조언을 해 주어도 안 된다.

5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막강한 대주교인 키릴로스를 위해 ‘악역’을 수행한 어떤 수도원장은 이단적 기독교 공동체를 공격하며 다음과 같이 위협했다.

너희가 키릴로스( 알렉산드리아 주교, 콘스탄티노풀 대주교,그리스도의 신인결합강조, 슬라브족의 사도) 대주교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희들 대부분의 목이 베일 것이며, 간신히 목숨을 구한 자들은 추방될 것이다.

가톨릭 기독교의 위대한 대변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의 첳학자, 사상가, 354년 북아프리캬에서 출생 395년 히포의 주교, 저서로 고백론, 삼위일체론, 신국론이 있음) 겁을 주어야만 사람들이 말을 듣기 때문에 강압 조치가 필요했다는 말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여실히 전해 준다. 군사력은 이단자를 억압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스스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나는 너희도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하겠다’.

예수와 바울의 사랑과 그노시스의 영적 종교는 로마 교회의 복종과, 테러의 종교가 되었다.

이렇게!

“로마 교회의 복종과 테러는 ‘예수와 바울’의 옷을 입고, 오늘의 기독교로 계속되어 왔다.

오늘 기독교 타락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려하는 것은 바로 배타적이고 세속화된 종교’로 타락한 오늘의 기독교이고, 그리고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오늘의 교회이다.

코리안 네트워크(코원PIMP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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