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연이 있는 한시

雪泥鴻爪(설니홍조)

by 까마귀마을 2020. 11. 11.

和子由澠池懷舊(화자유면지회구)
                               蘇東坡
人生到處知何似 (인생도처지하사)
應似飛鴻踏雪泥 (응사비홍답설니)
泥上偶然留指爪 (니상우연류지조)
鴻飛那復計東西 (홍비나부계동서)
老僧已死成新塔 (노승이사성신탑)
壞壁無由見舊題 (괴벽무유견구제)
往日岐嶇還記否 (왕일기구환기부)
路長人困蹇驢嘶 (로장인곤건려시)

면지에서의 옛일을 회상하며 자유에게 화답함

인생 이르는 곳, 뭐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느냐
날아가던 기러기 눈뻘을 밟는 것과 같으니
눈뻘 위에 우연히 발자국을 남길지니
기러기 날아가고 나면 어찌 다시 동서를 헤아리리요.
노승은 이미 죽어 새 사리탑이 생겨나고
무너진 벽은 옛 싯구를 볼 길 없구나.
지난 날 힘들던 그 길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길은 멀고 사람은 피곤한데 절뚝거리던 노새마저 울던 일을.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이 시의 원제목은 ‘아우인 자유와 함께 과거길에 갔던 민지의 옛 일을 회고하며’라는 뜻의

‘화자유민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입니다.

후에 이 시는 ‘눈 녹은 진흙땅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이란 뜻의 ‘설니홍조(雪泥鴻爪)’의 고사성어로 인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동파는 아우인 자유(子由) 소철(蘇轍)과 함께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도중에  민지(澠池 : 하남성에 위치하며, 옛날 진(秦)나라와 조(趙)나라가 회맹(會盟)했던 곳)라는 지방을 지나면서 한 절에 머물렀었는데, 그때 봉한(奉閑) 노스님께서 그들을 정성껏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년 후에 소동파가 다시 이 지역을 지나면서 들르게 되었으나  그러나 절은 예전의 절이 아니며 봉한 노스님은 이미 입적하셨고 새로 조성한 그 스님의 사리탑을 보며  인생무상(人生無常)을 통감(痛感)하고 지은 시라고 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기러기가 눈 쌓인 진흙밭에 잠깐 내려 앉아 발자국을 남기는 것과 같다.

기러기는 다시금 후루룩 날아갔다. 어디로 갔는가? 알 수가 없다.

예전 우리 형제가 이곳을 지나다가 함께 묵은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를 맞아 주던 노승은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나 새 탑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예전 절집 벽에 적어둔 시는 벽이 다 무너져 이제 와 찾을 길이 없다. 분명히 내 손으로 적었건만 무너진 벽과 함께 흙으로 돌아갔다.

노승은 육신을 허물고 탑속으로 들어갔다. 틀림없이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다.

여보게 아우님! 그 가파르던 산길을 기억하는가?

길은 끝없이 길고, 사람은 지쳤는데 절룩거리는 노새마저 배가 고프다며 울어 대던 그 길 말일세. 이제 그 기억만 남았네. 그 안타깝던 마음만 이렇게 남았네.

 

이렇게 짧은 인생을 덧없다고 여기고, 욕심껏 이룬 부귀와 영화도 부질없다고 깨우치는 성어는 셀 수 없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남가일몽(南柯一夢)과 같이 꿈 이야기만 해도 나부지몽(羅浮之夢), 노생지몽(盧生之夢), 역부지몽(役夫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황량지몽(黃粱之夢)이 있다.

인생이 풀끝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고 허무하다는 속담으로  풀끝의 이슬과 똑 같은 것이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이다.

바람에 깜박이는 등불과 같다는 인생여풍등(人生如風燈)도 같은 뜻이다.

여기에 눈이나 진흙 위(雪泥)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鴻爪)이란 뜻의   雪泥 鴻爪란 표현도 우리 인생의 자취가 눈이 녹으면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 기러기 발자국 같은 무상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듯 내 나이 70이 훌쩍,

아웅 다웅 살아온  인생,

허나 기러기가 우연히 남긴 진흙눈 위의 발자국과 무엇이 다를까?

눈 녹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텐데.........

이제 낙엽지고 단풍 붉게 물들어 겨울을 눈앞에 둔  쓸쓸한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시(詩)라고 판단되어 함께 성찰하고자 올립니다.

 

蘇東坡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그가 농사를 지으며 지은 쌀이라는 詩이다.

쟁기질 하고 씨를 뿌려 얻은 것이 아닌지라

배부르게 먹어도 전혀 맛이 없더니

땅 한뙈기 얻어서 손수 농사 지었더니

지난날의 그릇된 처세가 절로 웃음이 나오고

내 힘으로 먹고 사니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소동파는 구양수·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서 기틀이 마련된 송시(宋詩)를 더욱 발전시켰다.

구양수·매요신 이전의 시가 대개 비애(悲哀)를 주제로 해왔던 데 비해서 이 두 사람은 평안하고 고요한 심정을 주로 읊었고, 소동파는 이에서 벗어나 훨씬 적극적·자각적인 관점을 취했다. 즉 인생체험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생활의 지혜로 삼아 인간 불행의 내면에서 자신만이 인식할 수 있는 행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가 이처럼 비애의 지양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제물철학, 불교의 묘리(妙理) 등의 사상적 배경 때문이었으며 적벽부에는 이같은 그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한 심정과 재능의 표현을 통해 경쾌한 리듬 속에 절묘한 비유와 유머를 담고 있다. 제재에 있어서도 특별히 구애받지 않아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던 것, 간과되어왔던 것들도 시로 썼다. 그의 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폭넓은 애정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인간의 욕망을 긍정했고 인간의 선의(善意)를 신봉했다. 그는 사(詞)에서도 기존의 완약(婉約) 대신에 호방한 사풍을 창시했다. '적벽회고'(赤壁懷古)라는 부제가 붙은 염노교 (念奴嬌)·(수룡음 水龍吟) 등은 영물시(詠物詩)의 극치라 일컬어진다.

 

 

소동파는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동진(東晋)의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정통적인 서법과 당대 안진경(顔眞卿) 일파의 혁신적 서법을 겸비하고 있는데, 그 자신은 글씨 자체보다도 살아 있는 정신과 기백의 표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는 제발( 題跋)이라는 평론에서 해서(楷書)가 모든 서체의 기본이며 서예는 사람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글씨로는 유배지 황주에서 쓴  한식시권 (寒食詩卷), 예부상서 시절에 쓴 이태백선시권 (李太白選詩卷) 등이 원본으로 남아 있다. 항저우에서 쓴 진규각비 (宸奎閣碑)와 같이 탁본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신품(神品)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필적을 모은 (서루첩 西樓帖)도 전해진다.

유작으로 동파집 (東坡集) 40권과 동파후집 (東坡後集) 20권은 남송 데의 판본이 여러 종류 남아 있다. 이 두 책에 주의 (奏議)·내제집 (內制集)·외제집 (外制集)·응소집 (應詔集)·속집( 續集)을 합친 동파칠집 (東坡七集)은 100권이 넘으며, 동파전집 )東坡全集)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연이 있는 한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空山春雨圖 (공산춘우도)  (0) 2021.04.03
靑雲之志  (0) 2021.03.18
閨情(규정)  (0) 2020.10.23
春女怨(춘여원)  (0) 2020.02.25
부용루송신점(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며)  (0) 2020.02.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