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란 기독교의 핵심 교리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부터 짊어진 죄를 말한다.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 내 조상이라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어 받은 죄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죄란 단어는 율법이 만들어진 이후에 생겨났다고 봐야 맞지 않을까? 선악과란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를 주는 과일이라는 뜻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죄라니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선과 악을 구별해야 올바른 생각을 하고 바르게 살 수 있지 않은가. 동물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한다. 아무튼 한 인간이 과일 하나 잘못 따먹었다고 전 인류가 짖지도 않은 죄와 죽음을 물려받았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다행이지 만일 생명과를 따먹었다면 선악도 모르고 지혜도 없이 죽지도 않고 동물의 본능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였다면 에덴낙원은 물론 인간세상까지 인간들로 차고 넘쳐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었을 거다. 수천년전 변방 한 부족의 건국신화 속의 일개 과일 하나 따먹은 사건이 우리 모든 인간의 지울수 없는 죄와 죽음으로 낙인되어 종교, 신앙으로의 믿음을 넘어 세계적 역사적, 문자적 사실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이야기는 유대교의 경전인 히브리 성경 창세기에 근거한다.
우리가 본적도 아는 바도 전혀 없는 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과 이브가 과일하나를 따먹은 것이 죄가 되어 죽음이 왔다는 마치 동화같은 이야기다.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 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원죄가 유대인들과는 피 한방울 썩이지 않은 이방인 중에 이방인으로 5천년을 이 땅에서 조상을 섬기며 살아온 사람들이 하나님, 에덴동산, 아담, 이브 이야기만 나오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문자적 일점 일획 오류가 없는 실제적, 역사적 진실이라는 신념적 절대성에 이들이 나의 가족 내 이웃인지 망연자실하고 놀란다.
오랜 세월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비유되고 해석 되어왔다. 그런데 유독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한다.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실 원죄 개념은 성서에서 명확했던 것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엄밀하지 못했다. 원죄 개념은 기독교 발생 이후 첫 4세기 동안 조금씩 발전되어 왔고, 아우구스티누스가 5세기에 그것을 더 개발해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은 플라톤(Plato)과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헬레니즘 철학은 영혼을 고귀하고 영원한 것, 육체를 천박하고 썩어 없어질 것으로 나누었다. 이 영과 신의 이원론적 사고의 인간 우위의 철학적 구도는 기독교에서 영은 선하지만 육신은 죄의 본성을 따르기 쉽다는 도덕적 이원론으로 흡수되었다. 원죄설은 인간의 육체를 부정적으로 여겼던 고대인의 생각이 반영되었다. 순수한 예수 신앙의 교리가 아니었다. 그럼 유대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을까? 유대교에도 원죄 개념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약성경 즉 히브리 성경만을 경전으로 하는 유대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죄 교리가 없다. 그렇다면 후대의 기독교에서 원죄교리가 창조 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교리도 따르지 않으면서 왜 기독교는 히브리 성경을 정경으로 삼고 있는지 의아스럽다. 그리고 같은 기독교이지만 동방 정교회에는 원죄교리가 없다. 참 헷갈리고 웃기는 일이다. 왜 동일한 신을 믿고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렇게 중요한 교리가 서로 다를까? 이유는 동방교회는 처음 쓰여진 헬라어 성서를 따랐고 서방교회 즉 가톨릭은 번역된 라틴어 성서를 정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은 죄는 오로지 죄를 지은 당사자 자신에게 있음을 에스겔 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도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않을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구약성경 에스겔 18장 20절)
본 구절은 오히려 원죄를 부정하는 내용이다. 세속의 인간 세상에서도 인정되어서는 안되는 죄가 연좌제다. 우리가 본 적도 없는 조상의 죄가 유전되어 죽음을 겪게 하는 신이 사랑의 신일 수가 없다. 진화론으로 보아도 단 한 사람의 조상으로부터 인간이 유래한 것도 아니다. 유대인들은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은 인정하지만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라는 개념은 없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은 그들의 몫이고 그것이 죄가 된다면 그들의 죄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현재의 죄이다. 유대교에선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죄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였고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 선택의 결과는 당사자가 지는것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며 책임이다.
그럼 기독교에서 원죄의 근원으로 삼는 성경 구절을 알아본다
구약성경 시편 51편 5절 :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 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
신약성경 로마서 5장 12절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구약성경의 시편 51편 전체를 읽어보면 알수 있지만 이 구절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성(罪性)을 가지고 있음을 밧세바 간음과 우리야를 간접 살해한 다윗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다. 로마서 5장 12절 외에도 신약의 서간에는 원죄를 다루는 구절이 몇 있지만 바울의 로마서 5장 12절이 원죄개념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기독교 신앙의 교리가 아니었다. 바울은 육신적 예수를 한번도 만난적도 가르침을 받은적이 없다. 바울이 내세운 원죄교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인간은 태초부터 타락하고 죄인이라는 바울이 창조해낸 바울의 신학 이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원죄교리의 성경적 타당성을 알아 보기 전 바울이 헬라어로 쓴 로마서 5장 12절을 정확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수세기 동안의 신학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서도 명확하게 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로마서 5장 12절에 나오는 한 그리스어 구절의 잘못된 번역을 통해 왔고, 이는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불안에 의해 해석되었다. 그 한 순간의 문법 오류, 논란이 있는 맥락, 그리고 선의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재앙적인 신학적 도약으로 인해 인류에 대한 전반적인 비전이 재정의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원죄 사건을 역사적으로 실제 발생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특히 성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성욕을 아담 이후 대대로 전해지는 원죄의 결과로 보았고, 섹스를 죄와 결부시켰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서 5장 12절에 근거해 내놓은 주장으로 성서 오독의 결과이다. 그 구절을 헬라어 원본이 아니라 라틴어로 읽었으며, 그리하여 잘못된 원죄론이 나타난 것이다. 처음의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쓰여 졌고, 이후 4세기경에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번역은 늘 오류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헬라어를 몰랐다는 점이다. 이것이 원죄를 잘못 해석한 출발점이었다. 헬라어 신약성경에 없던 것을 기초로 하였으니 원죄가 나왔다. 헬라어로는 원죄보다는 조상의 죄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헬라가 원본이니 라틴어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쓰고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의 라틴어 " in quo omnes peccaverunt"를 그(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역을 했다. 말미암아에서 그안에서로 바낀것이다. 그 선행어는 죽음이지 아담이 아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읽었던 라틴어 번역에서는 이렇게 변해버렸다. 이제 죽음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퍼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 그리고 이 미묘한 언어적 변화로 인해 우리는 죄책이 유전적이라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 죄가 존재론적 이라는 것. 우리는 이미 정죄된 채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는 히브리 성경의 구절에는 없을뿐 아니라 예수님도 이 말을 언급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가르치지 않았다. 유대 전통에서 죄는 상속되거나 전염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할 부분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결코. 그는 사람들이 죄책을 지고 태어난다고 경고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유전된 분노에 대한 법적 해결책으로 틀리지 않았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보시며,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는 원죄로부터 자유로울까? 나면서부터 원죄를 가지게 된다면, 어린아이라고 천국에 갈 리가 있을까? 물론 이 성경구절을 놓고도, 어린아이가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간다는 뜻이라고 둘러대며 해석하는 이들이 분명 있겠지만... 복음서에는 유전된 죄책에 대한 교리가 단 하나도 없다. 그것이 구원에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예수님은 언급하지 않으셨을까? 우리는 우리의 신학적 본능이 얼마나 깊게 헤레니즘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고 나중에 로마적이 되었는지를 잊고있다. 히브리 상상력에서 죄는 물려받는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원래의 것이 아니며 관계적 이지도 않고 언약적인 것이다.
에스겔 20장에 기록된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지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원죄개념을 확립 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의 프로젝트는 바울의 인류학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필요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4-5세기 신학자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인간이 도덕적으로 중립하게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신의 도움 없이도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다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충격을 받았다. 펠라기우스는 원죄론의 체계를 세운 아우구스티누스의 최대 라이벌이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먼저 원죄론에 정면 도전한 인물로 꼽힌다. 아담의 죄는 아담 한 사람의 문제일 뿐,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날 때 아담이 타락하기 전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인간에게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완벽하게 남아있으며, 구원은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하나님의 은총이 협력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비록 이단으로 정죄 되었으나,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그의 사상은 현대 인본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펠라기우스를 제압하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은혜가 도움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죄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립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라틴어 in quo를 그대로 사용하여 진행했다.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면, 그러면 은혜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만약 죄가 선천적이라면, 그러면 세례는 모든 인간에게 즉시 필요하다. 만약 죄책이 유전된다면, 심지어 유아조차도 태어나자 바로 정화되어야 한다.
동방교회는 왜 원죄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동방 정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식화를 결코 채택하지 않은 것은 원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은 죄책이 생물학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죄대신 조상 죄를 가르친다. 우리가 아담의 결과인 죽음, 부패, 그리고 혼란스러운 욕망을 물려받지만, 그의 죄책은 물려받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이기기 때문이지, 인간의 존재론적 결함으로 인해 시작된 분노를 만족시키기 때문이 아니다. 동방교회의 구원론은 치료에 관한 것이고, 처벌에 관한 것이 아니다. 부활에 관한 것이고, 거래에 관한 것이 아니다.
원죄가 잘못 세워지면 무엇이 무너지는가?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죄나 은혜나 구원을 버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잘못된 번역으로 구축된 건물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 지를 묻는 것이다. 만약 죄책이 유전되지 않는다면, 그러면 유아 세례의 긴급성이 무너진다. 만약 죄가 행동적인 것이고 존재론적이지 않다면, 그러면 형벌 대체 모델은 그 기초를 잃는다. 만약 우리가 정죄된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러면 구원은 법적 면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변화와 해방, 그리고 연합에 관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의 십자가를 좁히고 줄어들게 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의미가 크게 변화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전된 빚을 갚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넘어서고,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본문으로 돌아가 우리는 바울이 무엇을 말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대하여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후회하는 창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영광스럽고 고귀한 존재임을 재고해야 한다. 죄로 인한 죽음에 의해 상처 받았지만, 디자인에 의해 정죄 받지는 않은 존재로서 말이다.
참고 : 원죄는 성경에 없었어—오역을 통해 슬쩍 들어온 거지 : r/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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