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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성경적이라는 말

by 까마귀마을 2026. 3. 2.

저의 블로그에는 기독교 신학 자유주의 신봉자이며 미국의 영적 교사이자 작가인 "마샬 비안 서머즈"의 글이 올려져 있다. 마샬 비안 서머즈는 그의 나이 32살에 신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메신저로 수 많은 계시를 드러내었다.

"신은 찬양 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반 성경적인 제목의 이 글은 기독교 자유주의의 심오한 메세지를 담고있다. 나는 한때 열심을 다해 교회를 다녔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봉사도 열심히 하였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고 기독교 신에 대한 믿음도 회의적이다. 성경을 읽고 수많은 기독교 도서들을 읽었지만 요즘 논쟁이 되고있는 기독교의 자유주의, 복음주의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논증하거나 설명 할수 있는 지식은 부족하다, 그럼에도 굳이 내 믿음을 표현한다면 성경의 문자를 문자 그대로 믿는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신앙은 아닌 것 같다. 

오래전에 올린 글인데 며칠전 댓글이 달렸다. 첫 마디가 자유주의 자의 똥 쓰레기 글이라는 비난과 성경적이지 않다는 주장 이었다. 비록 옮겨온 글이지만 내 의중이 담긴 글이다.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일치 하지 않는다고 상스럽고 천박한 말투의 무례함은 글을 읽는 순간부터 한 참 동안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더러웠다. 항변하는 답글을 달았지만 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은 오랫동안 여운이 되어 기억에 남았다.

과연 성경적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기독교 믿음은 성경에 기초 한다고 볼 때 성경적이란, 성경을 믿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대로 생각하고 살아감을 뜻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댓글을 쓴 사람의 기독교적 신념이나 믿음, 그리고 그의 삶이 성경적인지 아닌지 몇자의 댓글로 평하거나 논 할수는 없지만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고 생각하고 산다는 게 그렇게 쉽고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성경적이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수있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이 아무리 신실하다 해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단언컨데 내 주변에 성경적이라는 말은 쉽게 하는 어느 교인도 성경적으로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성경적이라는 말에는 절대성과 독선이 들어있다. 성경적이라는 독선과 절대성이 우리 인류와 사회에 씻을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지만 지키기 어려운 수백가지의 율법과 지금 시대와는 전혀 맞지않는 규례들이 수두룩하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함의 자손은 종이 되라.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켜라.

피를 먹지말라.

돼지고기는 먹지 말라.

가진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자는 잠잠하라.. 

권세에 복종해라. 등등등.

그건 그렇지만... 시대가 변했는데...하고 변명을 한다면 성경적이 아니라 이미 성경을 각자의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은 각자의 믿음의 성숙도, 지적능력, 문제의식으로 해석이 달라질수 밖에 없다. 예수이후 2천년 동안 원본이 없는 성경은 수도 없는 왜곡과 수정이 있었고 성경의 해석은 시대적 요구나 상황에 따라 많은 변천을 해왔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모두 정확해서 믿어야 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이 담고있는 더 깊은 뜻은 문자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이라는 말이 왜 독선이 되는지 옮겨온 글로 의미 해 봅니다.

 

"성경대로, 성경적으로"가 독선이 될 수 있어

성경, 써놓고 나니 참 무거운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책이 분명한데 그 책 때문에 죽은 사람도 허다하니 참 역설적인 책이다.

어떤 사람은 그 책 한 글자 한 글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서 목숨 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경도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라고 하면서 절대시 할 거 못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한글개역성경을 유일한 번역으로 보고 다른 번역은 이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책이다.

 

서기 전에는 유대인의 손에서 유대역사를 열심히 기록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은 구약성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 후에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신앙고백을 적어서 글을 남겼다. 그 후에 그를 따르는 자들의 언행과 역사를 기록했다. 그것을 기독교인들은 신약이라고 부른다. 그 후에 로마에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정경이라는 말도 생겨나고 신약과 구약도 구분되어지면서 장과 절로도 나누는 일을 했다. 정경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도 사람들이 회의를 열어서 결정했다. 물론 성경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과정도 개입하셔서 역사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 성경 원본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은 사본이다. 그 사본에 번역의 번역을 거쳐서 온 것이 우리가 현재 읽고 있는 한글성경이다. 성경원문이라고 떠들어도 그건 정확히 말하면 사본의 원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시기를 두고도 역사학자간에 주장이 분분하다. 과연 어떤 것이 맞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성대하게(?) 보내는 성탄절도 사실은 성경과는 무관하다. 알 수 없는 예수의 탄생일을 후대의 사람들이 로마의 것과 혼합해서 정한 것이다.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 구교와 신교의 피를 부른 살인 전쟁,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인디언 학살사,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백인의 흑인 차별 등등이 모두 성경을 근거로 나온 논리다. 중세 시대에 성행했던 종교재판과 더불어 그 무시무시한 마녀사냥도 성경을 근거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다. 희생당한 마녀(?)들이 수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정확히 말하면 코페르니쿠스라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는)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었다. 지구가 도는 게 아니라 태양이 돈다고 믿었다. 성경을 토대로 한 그 당시의 교회가 형성해 놓은 세계관이었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도 성경(물론 구약성경)을 토대로 한 것이라는 거다. 구약성경에서 그토록 열망하며 예언해 온 메시아가 시골 촌뜨기 예수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예수가 모독한다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성경이 진리의 책이냐 아니냐를 떠나서라도 성경의 형성과정과 출처, 그리고 유래과정에 대한 다양한 모습이 있다. 나아가서 그 성경을 해석하고 믿고 신앙하는 모습은 전자보다도 더 다양하다. 역사를 보면 그 성경으로 인해 나온 제도, 학설, 논리로 인해 많은 악을 저지른 것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그 당시에는 참 성경적이라는 이유로 절대시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학자도 아닌 사람이 왜 이렇게 주제넘게 말하는가(여기에 역사적이니 뭐니 하고 기록해 둔 것은 아주 어쭙잖은 지식이니 학자들이나 성경전문가들은 용서하시라). 그것은 "성경대로, 또는 성경적으로"라는 말에 무게를 두면서 타인의 주장을 무시하고 틀렸다고 하는 경향이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바꿔 말해서 자신의 주장과 의견이 성경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고 하는 독선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다.

 

아무리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어가면서 말해도 그것은 자신이 보는, 또는 자신이 배운, 자신이 소속한 곳에서 익혀 준, 자신이 경험한 대로 보게 마련인 것을. 그 사람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등이 그 성경을 그렇게 보게 만든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게 바로 성경관이다.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신앙의 자료들이 나온다. 이렇게 말해도 어떤 사람들은 성경은 진리의 책이므로 성경관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 그 자체가 틀림없는 진리의 책이라고 말할 것이다.

 

"성경관이니 뭐니 운운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흐리게 한다. 그래서 당신의 주장은 성경을 약화시키며 나아가서 비성경적이요, 반성경적이다"라고 말하실 거다.

 

그래도 그거 아시는가. 위의 말도 한 견해라는 것을. 성경이 진리의 책이며 틀림없는 책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에게 건너 간 후에는 그 사람(집단)의 시각에 의해 조정되고 각색된다는 것을(나는 이런 것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성경대로라고 힘주어 말하는 모든 것들이 과거 약 1700여 년간 교회사를 통해서 만들어져온 전통적인 성경관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 사람의 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인식의 틀부터 고쳐야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이해의 눈부터 고치고 난 후에야 뭐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사람 공부부터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이 논쟁을 하다가 "성경에 어디 방언이라는 말이 있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경을 수십 번 읽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성경에 나와 있는 방언이라는 단어를 찾아서 보여주자 놀라면서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더란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뻔하다. 그 사람은 기독교에서 광신적인 요소, 신비적인 요소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런 요소들을 보면서 늘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게 뻔하다. 그러니 방언이라는 단어를 안 보고 싶었겠지.

 

이 글을 쓰는 나도 성경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이기에 어렸을 때는 성경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책이었다. 성경에 나온 것을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문율이었다. 그러다가 신학교 가고 책 꾀나 읽으면서 성경에도 틀린 구절도 있고, 오타도 있고 문화적인 차이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거리가 된 것이 성경이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좀더 성숙한(?) 눈으로 성경을 보고 있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나만 당하는 것은 아닐 게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성경대로, 성경적으로라는 말에 목숨 걸지 말라. 그리고 절대성을 붙이지 말라. 조금 더 양보해서 말하자면 절대성을 붙여도 좋다만 다른 사람에게 그 절대성을 강요는 하지 말라. 나아가서 자신의 주장을 성경적이라 하여 절대시하면서 남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라 하여 무시하지 말라. 차라리 "내가 본 성경에 의하면" 또는 "내가 받은 신학교육이나 신앙교육을 토대로 본 성경에 의하면" 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가 이런 종류의 독선을 고치지 못하면 진정한 세계적인,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기독교가 되기는 불가능 할 것이다.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족종교에 머물러서 팔레스타인과 전쟁이나 하고 있는 것을 간과하지 말라. 그게 바로 현재의 기독교의 모습이다. 천국에 가는 기독교는 될지언정(이것도 의문이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기독교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독선의 면을 고치지 않으면 기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거추장스러운 종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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