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靜而不爭 萬般隨緣(정이부쟁 만반수연)
조용하고 다투지 않으며 만물이 인연 따라 흘러가도록 한다.
註
靜(정) : 고요하다
萬般隨緣(만반수연): 만 가지 일들이 인연과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다
마음이 맑고 고요하니 몸도 조용하여 감정에 이입하지 아니하니 다툼이 없다.
적극적인 포기가 아닌 변화하는 세상을 한탄하거나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관조적 삶의 자세.
나이가 들수록 굳어진 고집에서 벗어나 인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 안락한 노후가 될수있다.
쉴 때는 쉬고, 놓아야 할 때는 놓아주고, 할 수 없는 일은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마음에 기대는 바가 없으니 그 자체로 편안하다.
이 글의 출처는 근대 중국의 유명한 승려이자 예술가였던 李叔同(이숙동) 弘一法師(홍일법사)의 글로 검색되지만 자세한 원전은 알수없다.
人到了一定年齡, 就要懂得靜而不爭, 萬般隨緣 (인도료일정연령 취요동득정이부쟁 만반수연)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조용하고 다투지 않는 법을 알고, 모든 것은 인연을 따라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홍일법사 (弘一法師, 1880~1942)
1880년 중국 천진에서 관공서 일을 맡던 거상(鉅賈)의 집에 태어났다. 본적은 절강(浙江) 평호(平湖)이다. 어릴 때 이름이 이성혜(李成蹊)였다. 6세 때 부터 형에게 배우다가 9세에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14세에 전서를 학습했다. 17세 부터는 趙幼梅(조유매)에게 학문을 배우며 전서와 석각에 매진했다. 18세에는 천진으로 가서 이름을 文濤(문도)로 개명했고 자는 숙동(叔同)이다. 이 시기부터 이숙동으로 알려진다.
22세에 상해 남양공학에 들어가 蔡元培(채원배) 선생에게 수학한다. 1905년(26세)에 일본에 유학하고, 1910년(32세) 중국에 돌아와 천진공업대학에서 교직을 맡았다. 1912년부터 상해의 태평양신문의 회화부분의 부편집장으로 일했다. 城東(성동)여학교에서 음악과 국어선생님으로 겸직했다. 1915년에는 남경사범학교에서 음악과 미술교사로 일했다.
1916년 항주 서호의 정혜사(虎跑定慧寺)에 들어가 17일간 단식을 한 후 채식을 하기 시작한다. 1918년(39세)의 李叔同(이숙동)은 중국 항주 서호의 정혜사(定慧寺)에서 귀의했다. 법명은 인음(寅音), 호는 홍일(弘一) 이다. 당년의 구력 7월 13일에 정식으로 출가해서 승이 된다. 또 구력 9월 항주의 영은사(靈隱寺)에서 계를 받았다.
1942년 9월 4일, 홍일(弘一)스님께서 복건성 천주(泉州) 不二祠에서 원적(圓寂 : 열반)해서 입적 하시기 전 “비흔교집(悲欣交集 연민과 기쁨이 뒤섞이다)”의 4자의 글자를 쓴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숙동은 재기(才氣)가 넘치는 思想家(사상가), 革新家(혁신가) 예술 교육가이다. 중국 화극(畵劇)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음악, 서예 , 회화 희극 다 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63년의 삶 속에서 50년 이상을 서예와 함께 했다. 현대 서예가 중에서 그 만큼 열심히 서예의 길을 걸었던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말년에 그만의 독창적인 서체를 남겼다. 이는 중국 서예사에서 탁월한 성과로 손꼽힌다.
홍일법사 李叔同(이숙동)의 예술과 학문의 업적
그가 15세부터 100여곡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그중 送別은 중국인과 화교들을 합한 지구상 22억명의 화인들의 애창곡으로 유명하다. 출가전에 70여곡을 이후에 30여곡을 남겨 서양음악에 정통해 중문으로 개편하여 전아한 풍격으로 만들었다.
출가후의 가집 淸凉集(청량집)은 매우 저명하고 단순한 종교색채를 보여주고 사람과 경물의 정감을 합일시킨다.
문학수양과 수양으로 감동을 주는데 금강경은 그가 5세에 암송한 것으로 해설서를 만들었다. 그의 재화는 어려서부터 바둑에 정통하여 영향이 크다는데 계몽사상에 침익하고 18세에 상해문단의 신성이 되고 예술계의 총아가 된다.
26세에 일본유학시 큰 인정을 받고 춘류사를 세우고 연극을 하기도 하여 극본을 쓴다.
그래서 회국후 중국영화계의 선구자가 되고 계몽시대의 개혁가이자 계몽지식인이 된다.
그는 인체소묘나 입체화를 중국에 소개하고 문화교육게에 파란으로 관념상의 충돌후 신관념을 정착시킨다.
그는 출가후 각종 불경을 신문학개념으로 수정하여 보급하고 염송방법도 개진하고 번역에 전념하기도 하고 불경의 대중화를 이루었다. 중국화교들의 삼보가도 그가 보급한 것으로 태허법사의 보곡으로 불교계의 국가처럼 여긴다.
그의 문화예술의 소양을 불교문화에 융입시켜 미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본 것으로 가장 큰 공헌이라 한다.
그는 출가인들의 스승으로 수신계율을 정립하여 오후불식 가사한벌착용 모든 외연과의 단절을 율종의 계율로 정립하여 지켜지고 있다. 그는 종교를 영혼의 귀숙으로 보아 염불에 치중하고 임종시 대비 대희의 표정으로 비흔교집의 상태로 떠났다한다.


홍일법사 최후유묵( 悲欣交集 비흔교집 : 연민과 기쁨이 뒤 섞이다)

전해오는 홍일법사 이숙동 입적 이야기
홍일 법사는 떨리는 손으로 유서를 쓰셨습니다. 글씨는 비뚤어졌으나 한 획 한 획 분명했습니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천막 밖에서 염불로 도와주되 계속할 필요는 없다.
임종 후 여덟 시간 동안은 문을 잠그고 몸을 움직이지 말라.
여덟 시간이 지난 뒤에는 몸을 닦거나 씻기지 말고, 지금 입고 있는 이 옷 그대로 싸서 절 뒤 산골로 옮길 것.
사흘 뒤에 들짐승이 와서 먹으면 그것으로 좋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화장하라.’
제자 전관 법사는 유서를 받아 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법사께서는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본래 사소한 일일세. 생사를 마침내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큰일이지.”
“작은 병은 의사에게 맡기지만, 큰 병은 죽음에 맡기는 법이네. 이 병은 이미 고칠 수 없네.”
법사께서는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더라도 세상을 미련해 한다거나 가족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그것은 내가 일생 동안 저질렀던 잘못들을 되돌아보고 있기 때문이니라.”
잠시 말을 멈추신 뒤, 더욱 낮은 목소리로 덧붙이셨습니다.
“입관 할때, 네 모서리 아래에 그릇을 하나씩 놓고 물을 가득 담아 두거라.”
제자가 놀라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어찌하여 그러하십니까?”
법사께서 답하셨습니다.
“개미와 벌레들이 시신 위로 기어오를 것이다. 화장할 때 그들이 함께 불에 타 죽게 된다. 물이 있으면 그들은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제자는 그 자리에서 오열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은 생명들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홍일 법사께서는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지춘만, 천심월원(華枝春滿 天心月圓).”
꽃은 가지마다 가득 피고, 달은 하늘 한가운데 원만합니다.
이는 원만함이며, 또한 내려놓음입니다.
내려놓음이란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상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병이 올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이 다가옴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이 결국 떠나가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단 하나의 생명도 내려놓지 않는 것. 개미도 살아야 하고, 벌레도 살아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바로 참된 자비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놓지 못하고, 이익을 놓지 못하며, 정을 놓지 못하고, 이 육신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법사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신 것은 이미 모두 내려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모든 생명에 대한 공경만은 끝내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리의 참된 연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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