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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신정론(神正論)

by 까마귀마을 2026. 1. 14.

신정론(神正論 Theodicy )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기독교 신학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전능하고 선한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신학적, 철학적 논의이다. 이는 특히 신의 전능성과 선하심을 믿는 기독교 신앙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악과 고통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기독교 신정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기본 전제가 있어야한다.
첫째로 성경적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신정론은 제기 되지 않는다.
둘째, 성경적 신이 선하다고 할 때 그 선함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함과 일정한 부분에서 일치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선악개념과 신이 가진 선악개념이 다르다고 한다면 신정론 이전의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게 되고 기독교인에게 악은 신앙의 심각한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유력한 논증이 악으로부터의 논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하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는 신념에 근거한 것이다. 신은 지극히 선하고 정의롭다는 기독교적 개념과 인간세상에 실제하는 악과는 서로 모순 된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전지 한다면 악을 피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악을 없앨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아주 쉬운 빌미가 된다. 이와 같이 딜레마의 형식으로 제시된 악의 문제는 기독교인에게 심각한 혼란과 긴장감을 일으킨다.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전능하고 전지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단순하면서도 난해한 물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은 선하고 정의로운데 악은 왜 존재하며 무엇이며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하는 물음이 기독교 신정론의 논제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 물음을 아래와 같이 역설적으로 물었다.
 
만일 하나님이 악을 없애기를 원하지만 그럴수 없다면 하나님은 무능하다.
하나님이 악을 없앨수 있지만 그러기를 원치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악하다.
만일 하나님이 악을 없앨수 있고 없애기를 원한다면 왜 이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그럼 악은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으며 신은 선한가?
악의 정의는 위에서 말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악과 비 기독교적인. 즉 인간들이 생각하는 악이 같은 악이라 볼수 없다면 논쟁 자체가 무의미 할수도 있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 하였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속에 있다 주장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기독교인 보다는 성경을 믿지 않은 비 기독교인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악은 도덕적 악과 자연적 악으로 정의한다. 도덕적 악이란 살인. 학살. 폭력. 테러. 고문등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악을 말하며 최근에는 자연 생태계 파괴등도 포함 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적 악은 지진. 태풍. 해일. 홍수. 질병등 자연적인 재해를 말한다. 우리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는 자연적인 재해를 악이라 정의 하는것은 자연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였으며 그 질서속에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우선 성경에서 말하는 도덕적 악은 우리 비 기독교인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도덕적 윤리적 행위의 옳고 그름을 넘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경외하지 않는 상태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는 상태나 행위를 악이라 정하고 있다. 우리가 도덕적 악으로 삼는 인간에 대한 학살이나 살인이 성경에서는 도덕이나 윤리를 떠나 단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이유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라는 명목등 유사한 다양한 방법으로 너무나 쉽고 무수이 자행되고 있어 인간의 탐욕과 신념으로 자행는 살인, 학살, 고문등 비 도덕적이고 비 윤리적인 거대한 악을 기독교 신의 정의로 쉽게 설명할수 있을지 난감해지고 의문이 남는다.

 

한편 우리가 겪는 자연적인 악이라고 정의하는 자연재해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지구의 순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여러 재앙이 모두 다 하나님의 자의적인 주관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 할수있다. 예를 몇 들자면 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홍수, 야훼가 내리는 여러 질병등이다.이를 볼때 우리가 자연적인 재앙으로 여기는 벼락, 홍수. 가뭄, 질병등은 성경의 잣대로 들여다 보면  모두가 하나님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간에게 내리는 징벌이다. 시도 때도 없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는 수 많은 자연적 재앙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고 정의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가 되어버린다.

일부 목사들이 기독교세가 약한 동남아 지역에서 지진, 화산, 홍수등 자연 재해로 재산을 잃고 많은 사람이 죽을때 하나님을 믿지 않아 벌을 받았다고 단정지어 설교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 함을 알수있다. 그러나 이런 설교나 주장이 성경적이고 기독교 신의 정의라면 미국. 남미등 기독교 국가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수많은 자연 재해는 어떻게 설명 할수 있으며, 나아가 그들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적 진리라면 극단적 예이기는 하지만 몇년전 세계적으로 재앙이된 코로나때 코로나로 죽은 수십만의 사람중 기독교인은 한 사람도 없어야 된다.

 

기독교 인들은 도덕적 악이나 자연적 악 모두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는 알수없는 하나님의 섭리이고 죄가 있는곳에 벌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인과적 결과라고 강변 하겠지만 전쟁, 이데올로기, 질병, 자연재해등으로 고통속에 죽고 죽어간 수도 없이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모두가 죄가 있어 벌을 받았다는 논리는 터무니 없는 억지고 궤변이다. 전지전능하고 정의롭고 선한 하나님 이라면서 왜 미리 대처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못하는지? 아니면 방관하는지? 하는 원초적 물음에 답해야 한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기독교 역사이래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대답으로 다양한 논의와 접근법을 제시했다. 
 
자유의지(어거스틴) :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이 이를 남용하여 죄를 짓고 악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랑과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기 원하셨기에 자유의지를 허락하여 그 결과로 악이 발생했다는 논리 이지만, 전 지구적으로 재앙이 되는 자연재해, 유아및 어린이의 암등 질병으로 인한 사망과 태어날때 부터 장애로 인한 고통등을 자유의지 만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혼합론 (이레니우스)( 존힉) : 악과 고통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하는 과정(영혼 형성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고난과 시험을 통해 성숙해지도록 하셨다는 것이지만, 너무 극단적인 고통(예: 1.2차 세계대전및 수 많은 전쟁, 나찌의 인종학살, 중세의 페스트 전염병)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최선의 세상(라이프니츠) : 하나님은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가장 좋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보며 일부 악과 고통이 있어야 선과 행복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만, 우리가 보기에 너무 큰 악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정말 최선의 세계인지 의문이 제기된다.
 
신비론 :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욥기의 이야기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만, 지적인 설명보다 무조건적 믿음을 강조하는 방식이라 회의론자들에게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래서 일부 철학자들은 신정론을 반박하면서, 악과 고통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대표적인 철학자로는 데이비드 흄과 존 맥스웰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도 어린아이의 고통을 통해서라도 이 세상이 신의 최선 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현대 신학에서도 신정론에 대한 최종적 결론은 못 내리고 있다고 한다. 아니 영원히 결론을 내리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적 선악의 개념, 계시와 교의가 우리 인간 사회의 보편적 선악의 개념과 충돌하고 있으며 성경적 인과가 없음을 역사와 경험이 증명하고 있어 신이 선하고 정의롭다는 신정론 자체가 딜레마가 되고있다. 신정론은 논쟁이 되고 쟁점화 할수록 신의 존재는 허약해지고 의심받게 되며 신앙의 기반을 흔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의학, 천문학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 사회에 살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구름을 이고 있는 높은 산에 신이 살았던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수천년전 변방의 팔레스타인 지역 황무지의 조그만한  일개 부족들이 옆 나라의 신화를 베끼고 짜깁기 한 그들의 건국신화 속의 신이 인류 유일 창조신으로 숭배되고  2천년간 우리인간을 하나님의 정의라며 종속하고 지배하여 왔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팽배한 탈 종교주의와 다양한 다원주의 현상은 기독교 신이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지게 할것이 확실하다.
이제 기독교 신의 선과 정의를 논하며 왜 악이 존재 하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고전적 교리와 제도적인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우리가 세상에서 실체적, 현실적으로 마주한 악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의 정의를 드러내고 믿음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삶으로 방향을 바꾸고 실천할수 있는가를 깊이 숙고 할때이다.(일부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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