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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春思(춘사)

by 까마귀마을 2024. 5. 16.

春思(춘사) 봄날의 시름

 

一首

草色靑靑柳色黃(초색청청류색황) 풀빛은 푸르고 버들 빛은 노랗고

桃花歷亂李花香(도화력란리화향) 복사꽃 난만하고 오얏꽃 향기롭네

東風不爲吹愁去(동풍불위취수거) 봄바람 불어도 시름은 못 거둬가니

春日偏能惹恨長(춘일편능야한장) 봄날은 오히려 한만 일으켜 키우네.

                            ----- 賈至(가지)-----

 

註.
청청(靑靑) : 푸릇푸릇하다.
이화(李花) : 오얏꽃(자두꽃)을 가리킨다.
역란(歷亂) : 꽃이 많이 피어 화려하다. 꽃이 어지러이 날린다. 꽃이 난만하게 피다. 꽃이 어지럽게 피어 있는 모양.
동풍(東風) :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봄바람. 샛바람. 춘풍(春風).
불위(不爲) : ~하지 못한다.
취수거(吹愁去): 수심을 불어 날리다
편능(偏能) : 오로지 ~이 능하다. 단지 ∼하다.
야한(惹恨) : 한(恨)을 불러일으킨다. 한을 야기(惹起)하다.

 

풀빛은 푸르고 버들은 노랗다.

복숭아 꽃 흐드러지게 피고 자두꽃 향기롭다.

이렇게 봄이 깊어지면 수심도 쌓이는 걸 어떻게 할까.

모처럼 부는 봄바람도 이 수심을 불어 내치지는 못하니 봄날이 해가 길듯이 봄날의 수심도 끝이 없구나.

온갖 꽃 피고 지더니 봄은 가고

어느새 꽃이 진 가지마다 초록빛 물결이 넘실대는 계절의 여왕 5월.

생명이 춤을 추는 이 아름다운 계절.

건강을 잃은 노인의 시름은 끝이 없지만 하루가 다르게 우거지는 신록처럼 내 건강도 싱싱하고 푸르러 지기를 빌어본다.

위의 시() 春思는 가지(賈至)가 당 숙종(唐肅宗)때 악주사마(岳州司馬)로 좌천된 임지로 가던 도중동정호(洞庭湖부근에서 지은 시로 2수로된 연작시다. 

 

二首

紅粉當壚弱柳垂(홍분당로약류수) 곱게 치장한 미녀들 주막에 여린 버들처럼 드리우고

金花臘酒解酴醿(금화랍주해도미) 금화 납주를 이제 열어 걸러내니

笙歌日暮能留客(생가일모능류객) 저물녘 생황 노래 나그네 잡아 메어

醉殺長安輕薄兒(취살장안경박아) 장안의 난봉꾼은 술에 곤죽이 되네.

 

註.
홍분(紅粉) : 여인이 화장할 때 쓰는 붉은 연지(臙脂)와 하얀 분(粉). 붉은 연지와 흰 분을 바른 여자. 이것이 나중에는 젊은 여인 또는 미녀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였다. 곱게 치장한 기녀(女)를 가리킨다.
당로(當壚) : 술을 벌려놓은 토단. 술파는 집, 즉 주점. 선술집의 술청에 나와 앉아 술을 팖.
약류(弱柳) : 여린 버들가지. 연약한 버들. 부드럽고 가느다란 버들가지를 가리킨다.
금화(金花) : 황금빛깔의 아름다운 꽃. 여기서는 술 표면에 뜬 누런 술 꽃을 가리킨다. 술이 아주 잘 익었다는 의미이다. 술의 생산지 난릉(蘭陵)의 별명이다. 금화(金華).
납주(臘酒) : 납월(臘月), 즉 음력 12월에 빚어 두었다가 이듬해에 거른 술.
도미(酴醿) : 거듭 빚은 술. 거르지 않은 전내기 술. 도미주(酴醾酒). 도미주는 여러 차례 빚은 술이라 중양주(重酿酒)라 부르기도 하고 도미화 꽃잎과 향을 넣어 만든 술을 이르기도 한다. 도미(酴醾)는 원래 술 이름인데 꽃이 그 술 빛처럼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笙) : 아악에 쓰는 중국 관악기의 하나.
생가(笙歌) : 생황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다.
취살(醉殺) : 몹시 취하다.
경박아(輕薄兒) : 난봉꾼.(작가 : 가지 자신을 말한다)

 

붉은 연지 하얀 분단장 곱게한 여인네, 주루(酒樓) 안에서 가는 버들처럼 흐느적 거리고

臘月(납월)에 담가 노랗게 익은 술통의 마개를 여는데 뽀얀 도미주까지 술독 마개 천 모두 풀어놓았네

笙(생)을 불고 노래를 불러 해가 저물어도 손님을 잡아두니

장안의 난봉꾼 모두 곤드레만드레 취하게 하네

 

가지(賈至)

() 나라 때의 시인으로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이다. 자는() 유린(有隣) 또는 유기(幼幾), 가증(賈曾)의 아들이다. 현종(玄宗) 천보(天寶) 10(751)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단보위(單父尉)가 되었다. 안록산(安祿山)의 난 때 현종(玄宗)을 따라 촉() 땅으로 달아나, 기거사인(起居舍人)과 지제고(知制誥)를 지냈다. 제위를 숙종(肅宗)에게 넘기자 전위책문(傳位冊文)을 지었고,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올랐다. 지덕(至德) 연간에 장군 왕사영(王士榮)이 어떤 일에 연좌되어 참수를 당하게 되자, 재주를 아낀 황제가 사면했는데, 그가 간언하여 처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후에 다른 작은 법에 연루되어 악주사마(岳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악주사마로 쫓겨나 있던 3년 동안에 이백(李白)과 만났다. 보응(寶應) 원년(762)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궁으로 돌아왔고, 대력(大曆) 연간 초기에 신도현백(信都縣伯)에 봉해졌고 상서우승(尙書右丞)과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임명되어 현역으로 죽어,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追贈)되었다. 사후 시호를 문()이라 하였다. 시문에 능했고, 준일(俊逸)한 기품은 남조 때 송나라의 포조(鮑照)와 유신(庾信) 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가지집(賈至集) 20권과 별집(別集) 15권이 있었으나 산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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