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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行書(행서)

by 까마귀마을 2024. 5. 2.

서예를 하다보면 듣게 되는 말중 한자서예 5체중 行書가 서예의 꽃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이는 행서가 해서에 비해 쓰기는 훨씬 쉽고 빠르게 쓸수 있으며 가독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을뿐 아니라 흘려 쓴 글자이지만 누구나 글자를 쉽게 이해 할수 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행서(行書) 한자 서체의 하나로 살짝 흘려 쓴 글씨체를 말하며 흘림의 정도는 해서 초서의 중간쯤 된다. 행서는 예서의 속기체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며 엄격한 규범이 없고 해서에 접근되지만 해서처럼 근엄하지 않고, 필획이 연결되나 각 글자의 독립됨이 장초에 가까워 해서와 초서의 장점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행서는 해서와 초서를 같이 섞어 쓰기도 하는데 그 조화와 변화를 적절히 구사하면 뛰어난 작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역대의 書家(서가- 글씨를 잘 써 경지에 오른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다른 서체보다 더 사랑한 서체이며 실제 서예실에서 가장 많은 서예인들이 즐겨 쓰는 서체 이기도하다

해서는 예서와 마찬가지로 규격에 맞추어 획()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쓰야한다. 서예의 기본 서체로서의 역할을 하지만 쓰기에는 복잡하고 불편하다. 초서는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을 흘려서 나타내 빠르고 간단하게 쓸 수 있지만, 글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실용성을 잃고 서예로서의 가치만 지니게 되었다. 행서는 이러한 해서의 비효율성과 초서 해독의 어려움을 함께 보완하는 성격을 지닌다. 행서는 해서보다 빠르고 또 초서처럼 알아보기 어려운 결점이 없기 때문에 실용적 가치가 매우 높다. 행서는 정서()인 해서()의 필기체 형태를 띠고 있어서 쓰기도 쉽고 해독도 어렵지 않은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행서는 일반인들의 필기체 글씨로 널리 쓰여 왔다.

행서는 쓰는 방식에서도 해서와 다르다. 해서는 글자의 획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붓끝의 자국을 획 안에 감추어 헛된 부분이 나타나지 않게 하는 장봉()의 필법()으로 쓴다. 그러나 행서는 붓끝의 자취가 드러나도록 자연스럽게 쓰는 노봉()의 필법으로 쓴다. 이러한 필법의 차이가 행서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룬다.

행서는 중국 후한() 초에 해당하는 1세기경 유덕승()이 창시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리고 후한 말기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진(晉)나라의 위항(闈恒)은 위초(魏初)의 종요(鍾繇)와 호소(胡昭)가 유덕승에게 배워 행서법(行書法)을 썼다고 하였다. 종유 삼체(三體) 중의 하나가 행압서로, 곧 행서이며, 동진의 왕희지(王羲之) · 왕헌지(王獻之) 부자에게 이르러 완성되었다. 행서는 해서와 같이 섞어 쓰기도 하고, 초서와 함께 쓰기도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해 · 행 · 초 3체를 혼합해 쓰기도 하여 그 조화와 변화를 적절히 구사하면 서법으로서 다양하게 변화를 줄 수 있으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행서의 종류로는 행압서· 진행(眞行) · 행해(行楷) · 초행(草行) · 행초(行草) · 소행초(小行草) · 반초행서(半草行書) · 선서(扇書) 등으로 경우에 따라 달리 표현하고 있다.

행압서(行押書 : 교환하는 문서)는 행서의 초기 명칭이며,

진행(眞行)은 진서에 가깝게 하되 흘린 것으로 해행(楷行) 또는 행해라고도 한다.

행해(行楷)는 해서이면서 행서에 가까운 것을 말하며,

초행((草行)은 초서에 가까운 행서로 행초라고도 한다.

소행초(小行草)는 글자가 작은 행초이며,

반초행서(半草行書)는 초도 아니고 행도 아닌 중간적 서체이며

선서 역시 반초행서식의 서체이다. 그럼 서예를 배우는 서예인들이 가장 많이 쓰고 익히는 행서체를 알아 보겠습니다.

 

왕희지의 난정서

왕희지의 대표작이며 천하제일행서로 불리는 작품이 난정서(蘭亭序)이다.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0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 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353)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 하에 절강 소흥의 일류문사 42 명이 모였다. 이 날 26명의 문인들이 술잔을 띄우고 본인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시회를 열었는데 얻은 시가 37수 였다. 이를 모아 난정집을 묶었다. 여기에 왕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이다. 즉석에서 324자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고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제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왕희지는 한, 동진 시대까지 질박을 추구하던 서예미감을 해서, 행서, 초서 모두 유려한 서풍으로 새로운 표준을 만들면서 당시 가장 아름다운 서예의 경지를 이루었기에 서성으로 추앙된다. 그는 처음 글씨를 배울 때 집안의 서풍을 이어 받다가 위부인에게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국 각처에 흩어져 있는 비석들을 보고 위부인의 필법과 비석필법의 장점을 융합하여 자신의 독창적인 서예세계를 창출 하였다.

난정서는 여러 본이 전하지만 당나라 풍승소(馮承素)의 임서본을 최고로 여긴다. 풍승소 본은 오른쪽 상단에 신룡(神龍)이란 인장의 왼쪽 편만 보이기에 신룡반인본이라고 한다. (서예세상 | 왕희지의 천하제일 행서 난정서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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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의 집자성 교서

흔히 왕휘지의 난정서를 천하제일 행서라 하지만 서예실에서 서예인들이 즐겨 쓰는 행서는 난정서가 아니고 왕희지의 집자성 교서이다. 나 역시 해서를 어느정도 익히고 행서를 시작하려 하자 선생님께서 왕휘지의 집자성 교서를 임서하라고 지도해 주셨다.

여기서 집자성교서란 글자 그대로 왕희지의 법첩중에서 글자를 모아 集字(집자)한 글이라는 뜻이다. 왕희지의 행서로써 난정서, 흥복사단비,그리고 성교서가 옛부터 유명한데 흥복사단비, 성교서는  왕희지의 書跡(서적)에서 집자 한것이기 때문에 집자성교서라 일컽는다, 또한 王書(왕서)를 모은것이기에 集王聖敎書(집자성교서)라고도 불린다, 또한 비문의 머리에 일곱개의 부처문양이 새겨져있어 七佛聖敎書(칠불성교서)라고도 한다,

임모본(모사하여 臨書를 함)을 했지만, 왕희지 글씨의 가장 중요한 지침서 이기도 하고, 서예인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즐겨 배우는 행서체의 제 1첩이 집자성교서라고 할수 있다, 집자성 교서는 집자성교서 서두에 기록 되어 있어 알수 있듯이 唐(당)의 승려 회인(懷仁)이 몇몇 조수와 함께 무려 25년간에 걸친 비상한 각고 끝에 집대성 하여 672년에 세운 碑(비)로 30행에 각 행마다 80 여자씩 1904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당태종이 명승 현장삼장(玄獎三藏)의 신역불전(新譯佛典)이 완성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교서(聖敎序)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이 그 경전 번역까지의 경과를 적은 술성기(述聖記)와 그리고 현장삼장이 번역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함께 비문을 이루고 있다. 

이 서(書)는 왕희지의 진적으로부터 집자하여 새긴 천하의 명비로 품격 이 높고 형이 정제되어 습벽이 없다. 게다가 용필이 유려하고 다채로워 한없는 정기를 깊이 간직하고 있어 예로부터 행서 입문에 필수적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왕희지의 조형원리는 엄격히 정돈된 구조가 아니고, 부조화(不調和)라고 생각될 정 도로 비뚤어진 형태의 것들이 많다. 그러나 부조화속의 조화와 변화의 원칙을 잘 엿볼 수 있다. 집자된 글자중에는 초보자들이 임서하기에 글 모양이 난해하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부조화한 글자도 더러 있다 이를 꼭 똑같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구와 조형의 상태를 자기것으로 만들어 방필과 원필이 충분히 조화롭게 조형된 아름다움을 습득하면 행서의 기초를 딱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집자성교서는 이때 만들어진 원비(源碑)와 송대의 탁본을 가장 귀하게 치는데, 명대에 이르러 원비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것을 미단본(未斷本), 그 이후 것을 기단본(己斷本)이라 구분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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