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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楷書(해서)

by 까마귀마을 2024. 4. 21.

楷書(해서)의 楷자가 본보기나 모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표준으로 삼을만한 서체라는 의미에서 해서라고 한다.

해서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한자 서체이다. 그래서 표준이라는 뜻의 진서(眞書)나 정서(正書), 금예(今隸)라고도 부른다.

후한말에 한예(漢隸)의 파책(波磔)을 변화시키고 여기에 점(點)·탁(啄)·도()·적(趯)을 더하여 만들어진 방정한 서체로 주로 공문서에 이용된 양식이며, 글자의 모서리가 깔끔하고 다양한 두께의 곧은 획이 특징이다. 해서를 처음 개발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동한 말기의 조조(曹操)의 위나라 문신인 종요(鍾繇)이며 현전하는 가장 초기의 예는 가 쓴 법첩인데 성숙된 경지를 보이고 있어 그 이전에 이미 해서체가 발전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에 이르러 일단의 형식이 완성되었다. 해서는 당대(唐代)에 최대의 전성기를 맞아 가장 중요한 서체가 되었다. 해서는 북위해(北魏楷) 당해(唐楷)로 나누어진다.

북위해는 북조(北朝)시대의 해서체로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서체이며, 방필(方筆)이 아직 예서에서 탈피되지 않은 원형(原形)의 해서이며, 방정하고 묵직한 필법을 보여준다.

당해(唐楷)는 북위해(北魏楷)에서 수대(隋代)를 거쳐 해서의 완성을 보게 되는데, 당해 (唐楷)는 숙달되고 그 규구(規矩)가 잡힌 해서의 전형(典型)을 이룬다. 수대에는 아직 필획에 있어 다소 예서의 잔영이 보이며, 당대(唐代)에 이르러서 서체가 성숙되고 많은 서가(書家)를 배출하게 되며 표준서체를 이루게 된다. 그 대표적 서가로는 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良)·안진경(顔眞卿)을 들 수 있으며 그들 이름의 서체 명칭이 생길 정도로 해서체의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볼수있다. 한국에서는 김정희의 묵소거사자찬,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발문, 이이의 서간문 등이 대표적인 해서체로 꼽힌다. 그럼 서예인들이 해서로 많이 쓰는 몇 해서체를 알아보겠습니다.

 

구양순((歐陽詢)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구양순(歐陽詢, 557-641)은 당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는 信本이고, 담주 사람이다. 당대의 4대가 (우세남, 구양순, 저수량, 안진경) 중의 한사람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을 닦았고 후진지도를 맡다가 정고 15년에 세상을 떠났다. 진(陳)나라의 광주자사였던 아버지 흘이 반역자로 처형되었고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가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經史(경사)를 익혔으며, 수양제를 잘 섬겨 태상박사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고, 태자솔경령, 홍문관 학사를 거쳐 발해남으로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으며, 이왕(二王), 즉 왕희지 왕헌지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황보탄비, 구성궁예천명, 황도사비등의 비와 사사 첩,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의 골격을 지니고 있어,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않은 서예가로서 유명하다.

구양순체(歐陽詢體)는 구양순의 서체를 말하며 자획과 결구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에 순간이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인 특색을 가진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했다. 구양순의 서적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그가 쓴 구성궁예천명은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에 구양순의 글씨를 구성궁체라고 부른다. 또 줄여서 구체(歐體)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명하였다.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구성궁이라는 궁궐 안에서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이다. 구양순이 황제(太宗)의 명에 의하여 76세에 글씨를 썼고 정관육년에 각(刻)하였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으로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했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고, 구양순이 썼다.

특징으로는 점, 획이 가늘고 직선적이고 자형이 길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점획의 간격이 고른 가운데 변화가 있다. 方筆이 많아 다소 모가 나고 단정하고 근엄하며 背勢에 의해 점획이 중심으로 모아지며 긴장감이 돈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출전: 당서 구양순전(唐書 歐陽詢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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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진경(顔眞卿)의 안근례비(顔勤禮碑)

안진경은 당,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청신(淸臣)이며 현종 개원 22년(734년) 진사에 합격하여 양궁에서 부터 시작 절도사 상서를 거쳐 노국(노나라) 개국공에 올랐다. 북제(北齊)의 학자이며 안씨가훈(顔氏家訓)을 저술한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출세길에 올랐으나 재상 양국충(楊國忠)의 미움을 받아 한직인 평원태수(平原太守)로 좌천되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때 그는 상산군 태수였던 사촌형 안고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안고경은 안녹산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했으며 안진경은 불리한 전세에도 불구하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당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숙종(肅宗)에게 발탁되어 수도 장안(長安)에서 헌부상서(憲部尙書)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세도가 였던 환관(宦官)과 권신(權臣)들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숙종, 대종(代宗)에 이어 즉위한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란군 장수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3년간 감금 당하였고, 끝내 살해되는 애국충신 이기도 하다.

안진경은 처음에는 저수량에게 배웠고, 뒤에 장욱에게서 필법을 익혔다. 설직, 구양순, 우세남 등 초당사가(初唐四家) 서체의 특징을 종합하여 웅건하고 넉넉한 자신만의 서체를 창작하여 해서의 모범이 되었다. 안진경체(顔眞卿體) 해서(楷書)의 창시자로, 조맹부(趙孟頫), 유공권, 구양순과 더불어 해서사대가(楷書四大家)로 일컬어진다. 안진경은 동진의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 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글씨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했다.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했고 많은 걸작을 남겼다.

 

안진경이 남긴 서예작품은 비석과 서법 작품이 많은데 모두 138종이 전한다. 전하는 자료를 근거로 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전기, 중기, 후기의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안진경의 나이 50세 이전이 전기 작품 시기에 속한다. 이 시기는 안진경이 고인의 필법과 민간에서 유행하는 서예를 흡수하고 소화하는 단계로 전자는 필법에서 결구에 이르기까지 수, 당시대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서풍의 영향 을 반영하고 있으며 후자는 이에 비하여 왕희지의 동방삭화찬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다. 50세에서 60세에 이르는 기간을 중기로 보는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54세에 쓴 것과 56세에 쓴 것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안진경의 강건하면서도 웅후한 기풍과 기세가 당당한 풍격으로 이미 형성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 시기의 행서 작품으로 50세에 쓴 쟁좌론이 명작으로 꼽힌다. 60세 이후의 후기 작품시기의 명작은 일일이 헤아리 기 힘들 정돌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63세, 64세, 68세 그리고 71세에 쓴 안근례비와 72세에 쓴 안성정가묘비 등이 있다.

안근례비는 안진경이 그의 증조부인 안근례의 일대기를 써 놓은 것으로 안 씨 가묘비와 더불어 안진경 해서의 2대 역작 중의 하나이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길 없으나 비문중에 기재된 사실을 감안해 입비는 안진경의 말기의 글씨로 추정 된다. 비는 사각면이나 세번째면이 갈아 없어졌고 약 1천6백여 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의 자획이 온전하며 특히 삼면의 글씨는 원필이며 강. 유가 잘 조화되어 있고 장봉의 표현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의 해서중 가장 우수한 기교, 표현 작품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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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魏(북위) 楷書(해서)六朝體(육조체)

북위 육조체란 남북조시대의 오호십륙국의 선비족이 쓰던 글씨체를 말한다.

서예 전시회마다 소위 육조체 작품 몇 점씩의 출품을 꼭 볼 수 있으며, 경향 서실마다 동호인들의 글씨와 법첩에서도 이 육조체를 많이 본다. 육조체란 옛 북중국과 언어 혈통이 다른 북방 이민족이 중심되어 이룩한 문자체로 거의 석각(石刻)으로 된 정강(精强)· 질박(質朴)· 한험(寒險)한 문자이다. 그러나 육조(六朝)란 이름은 이 문자문화(文字文化)를 이룩한 북중국의 서안(西安)·낙양(洛陽)의 황하(黃河) 유역이 아니고 남방인 지금의 남경(南京, 당시의 이름은 建康)·항주(杭州) 등 양자강 하류에 이룩한 여섯 왕조의 말하기에 모순된 것이다. 따라서 육조체란 관습상 그렇게도 불렸으나 정확히 말해 북위(北魏)의 해서체(楷書體)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이 시대를 남북조(南北朝)시대라 하고, 남첩북비(南帖北碑)라 하여 우리 동양의 서예사상 가장 획기적인 시대요, 왕희지(王羲之) 글씨를 배출한 것 또한 이때다. 남북조 시대란 한나라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약 400여 년 지속되다가 한말에 조조(曹操)의 위(魏)와 손권(孫權)의 오(吳), 유비(劉備)의 촉(蜀)으로 소위 삼국시대가 60년간(220∼280년) 지속된 후 위나라 장군 사마염(司馬炎)이 통일하여 진(晉, 265∼419년)을 세운다. 이 서진(西晉)이 북방민족 호 (胡)인 흉노족(匈奴族)에게 쫓기어 남하, 건업(建業, 즉 建康. 지금의 남경)에 천도하여 동진(東晉)을 열어 약 100년 후인 419년에 멸망한다. 이 진나라 멸망 후 전 중국은 수(隋)에 의해 통일될 때(581년)까지 오나라로부터 약 370년간 남북이 갈리고 여러 왕조가 교체되니 이른바 이를 남북조시대라 한다.

남북조시대의 남조가 이른바 육조다. 양자강 가의 주로 남경, 항주를 중심으로 여섯 왕조 즉, 오(吳)·진(晉)·송(宋)·제(齊)·양(梁)·진(陳)의 여섯 왕조가 수나라에 통일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 동안 북쪽에서는 황하 연안에 서안(西安, 옛 長安)과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이른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이어진다. 여기 오호의 호(胡)는 되 호, 오랑캐 호라 하여 북방 민족이란 뜻이다. 가운데 있는 한족(漢族)은 꽃이요(中華), 변방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하여 모두 야인(野人)이오, 오랑캐이며, 호(胡) 또한 북방 오랑캐인 적(狄)이다. 여기에 참여한 다섯 호족은 흉노(匈奴)·갈(塏)·선비(鮮卑)·저(於)·강(羌)의 다섯 호족과, 또한 한족도 세 나라를 세웠고, 그리고 이들 호족끼리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열여섯의 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을 남북조시대의 오호십륙이라 하고 위에 말한 육조체의 글씨도 이 중 가장 강대했던 선비족의 소산이다. 그 시대때 쓰여진 해서체를 육조체라 한다. 당해(唐楷)가 아름답고 여성스럽다고 하면, 육조체는 씩씩하고 굳세며, 남성스럽다고 할 수 있다. 육조체의 대표적 글씨는 張猛龍碑 (장맹룡비), 용문20품, 북위의 묘지명등을 들수가 있다.

육조체가 힘이 있고 굳세고 하기 때문에 강한 인상을 줄수는 있지만, 유함이 너무나 부족하고, 글자를 칼로 새겨 너무나도 칼맛이 많이 나기때문에 모필의 필치를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단점이기도 하다.

 

육조체를 배우는 어느 사람이 지은 육조체를 주제로한 詩.

날카롭지 못하면 시작도 하지 마라, 부드러운 곡선은 필요없다.

칼같이 각을 잡는다.

각이 잡히지 않으면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존재 자체를 무시한다.

부러질망정 휘어지는 것은 없다.

엄중하지 못하면 시작도 하지 마라.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서할 수 없다.

빈틈없이 들어찬 먹물로 약한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춘풍(春風)은 없다. 추상(秋霜)만 있을 뿐이다.

자신을 이렇게 단련시키며 직진으로만 사는 사람도 있다.

 

김정희와 추사체(秋史體 )

김정희는 조선 말기에 활동한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로 자는 원춘(元春)· 추사(秋史), 호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 있으며 글씨를 잘 쓰기로 명망이 높아 우리나라 서예사를 통틀어 가장 추앙받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1840년인 55세에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해에 동지부사(벼슬이름)로 임명되었으나 파직되고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어 9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추사체란 김정희의 서체로 그의 자를 붙여 명명된 것으로 한대(漢代)의 예서체를 기본으로 하여 개발되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 있지만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현재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김정희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청대의 학예 일치사상과 금석학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게 되었고, 1809년 베이징(北京)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阮元) 등을 통해 금석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서예 원류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옹방강 일파의 서론에 입각하여 처음에는 동기창체 등을 익히다가 서법의 근원을 한대 예서체에 두고 이것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청조의 서예가들도 염원했던 이상적인 추사체를 이룩했다. 졸박한 이 서체는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또한 힘차면서도 거칠어서 마치 유희적인 선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필획들이 제각기 개성 있게 배열되어 매우 독특한 구성미를 자아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중 하나인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神이 오는 듯 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때로 여겨진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완당은 강상(江上)에서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다.이 시절부터 완당 글씨의 특징을 보면 추사체의 파격미나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추사체는 그의 문인화풍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신헌, 이하응(李昰應)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에 의해 일세를 풍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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