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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이야기

隷書(예서)

by 까마귀마을 2024. 4. 13.

 

예서는 전서에 이어서 이루어진 서체이다

예서(隷書)는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시절에 나온 소전체를 편하게 쓰기 위하여 다시 간추린 서체로 전서와 달리 현재 사용되는 한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서체이다. 현재의 한자 모양과는 상당히 다른 모양도 있지만 오늘날의 기본 서체인 해서체를 안다면 예서는 대부분 알아볼 수 있다. 예서는 전서의 자획을 간단하게 줄이고 붓으로 쉽게 쓸 수 있도록 반듯하게 만든 글자체로 너울거리는 물결 모양새와 가로획의 끝을 오른쪽으로 빼어 쓰는 특징이 있다. 즉, 전체적으로 납작하고 수평적이며 가로획의 한 획이 波勢(파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 예서의 특징을 간략히 말하면, 원필과 방필로 쓴다. 한 글자에 파책이 중복되지 않는다. 자형의 가로, 세로 비율이 3:2이다.

보통 예서라 함은 秦隸(진예)와 漢隸(한예)의 구별이 있다.

秦隸(진예)는 소전(小篆)의 둥글리는 필체를 직선으로 개선시켰으나 아직 여전히 소전체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구조상으로는 뚜렷한 혁신이 없었다. 漢代(한대)에 이르러서 예서(隸書)가 정식으로 국가와 사회의 공식문자로 채택됨에 따라서 소전(小篆)의 독특한 구조가 없어지고 또한 물체의 모양을 그려내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히 그림의 성격을 떼어내게 되었다.

예서가 본격적으로 유행한 때는 전한시대였다. 전한시대에는 고예의 모습이 세련되게 정리되어 팔분체(八分體) 혹은 한예(漢隷)라는 서체가 완성되었는데, 이 글자체는 쓰기에 훨씬 편하고 가지런하여 보기도 좋아 예술적이다. 이처럼 한자는 소전(小篆)에서 예서(隸書)로 발전하면서 중요한 변혁을 이루었다.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예서체이다. 이는 한자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예서의 창제와 명칭의 유래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정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진시황 시대에 정막(程邈)이라는 인물이 10여 년을 연구하여 예서 3천 자를 만들어 진시황에게 진상했다고 사서에 나온다. 일설에는 정막은 옥리였다가 진시황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었는데 감옥 안에서 예서를 만들어 바친 공으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또 투옥된 이유가 국가공인 서체인 소전을 사용하지 않고 사적으로 예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설도 있다. 정막의 예서 창제설이 사실이라면 예서와 소전은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서에 예속된 글자라서 예서라는 설도 있으며, 종 예(隷), 즉 노예를 의미하는 글자이기 때문에 노예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쉬운 서체라는 뜻에서 예서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고, 정막이 죄수 신분일 적에 만든 서체라 예서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 혹은 예(隸)자가 노예가 아니라 하급 관리를 뜻해서 관리들이 효율성을 위해 만든 서체라는 의미에서 예서라고 이름 붙였다는 설도 있다.
그럼 예서는 어떤 종류의 서체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파세(波勢) : 횡획의 수필에서 붓을 누르면서 조금씩 내리다가 오른쪽 위로 튕기면서 붓을 떼는 방법으로 예서의 특징.

*원필( 圓筆 ) :  붓을 곧게 쥐고  붓끝을 곧게 세운 상태에서 써 내려가는 필법으로 획의 양 끝이 둥글게 나오는 글씨를 말하며  곡선이고 부드럽고  들어서 쓰고 빠른 것이 특징.
*방필( 方筆 ): 붓을 비스듬히 쥐고 붓을 비스듬히 눕힌 상태에서 써 내려가는 필법으로 붓끝이 움직이는 범위가 넓어 붓끝의 움직임이 자유로롭고 유연하며  붓대를 눕혀 측봉으로 쓰고 획의 양 끝이 각지게 나오는 글씨로 측봉으로 쓰고 각 이 있는 선이고  힘차며  눌러서 쓰고  속도가 느리게 쓰는것이 특징.

* 팔분체(八分體) :  글자 모양이 八자처럼 좌우로 흩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설과, 전서의 8할을 취하여 만든 글자라는 설.

 

1) 예기비 (禮器碑)

예기비는 한비(漢碑)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으며,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비를 한비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꼽고 있다. 예기비의 전체 명칭은 한노상한칙조공묘예기비(漢魯相韓勅造孔廟禮器碑)이며, 또한 한칙비(韓勅碑),․수공자묘기비(修孔子廟器碑),․한명부수공묘비(韓明府修孔廟碑)라고도 한다.  이 비는 을영비․사신비와 더불어 ‘공묘지비(孔廟之碑)’라 불린다.  한나라 환제 영수(永壽) 2년(156)에 새겼으며, 비양(碑陽)은 16행에 행마다 36자씩이고, 비음(碑陰)은 3열에 열마다 17행이고, 좌측은 3열에 열마다 4행이고, 우측은 4열에 열마다 4행이다.  비의 글씨는 아직 완전하고 현재 산동성 곡부의 공묘에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은 노나라의 제상이던 한래의 공적을 칭송한 글인데, 그는 공자를 존중해 그 자손 일족에게는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 징병이나 노역을 면해 주는 등, 진심어린 예우를 다했다. 또 그는 진시황제의 폭거 이후 산뚱성 취무에 있던 허물어진 공자묘(이곳은 한 이후 역대의 비가 많아 곡장비림(曲章碑林) 이라 불린다.)를 수리하고 제사에 쓰이는 가장 중요한 기구류, 즉 예기를 정비하고 또 공자의 생가를 수복하고, 주변의 배수 사업 등도 했다. 이와 같은 한래의 작업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높은 덕을 기리고자 돌에 새긴 것이 바로 이 예기비이다.
서법이 가늘면서도 강하고 웅건하며 단정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표일한 맛이 있고,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겸하였기 때문에 섬세하고 아름다운 맛이 있으면서도 두텁다. 자체는 납작한 것, 장방형, 아래위가 긴 것 등이 어우러져 있고, 필획이 수경하며 파책이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비음(碑陰)과 비측(碑側)에 씌어진 글씨는 더욱 방자하면서도 기이하여 역대 한예의 모범이 되었다.
예기비가 건립된 후한시대는 중국 서예사상 가장 建碑(건비)가 성행한 시대였다.淸代의 금석학자인 翁方綱(옹방강)은 '한의 예서는 예기비로서 제일로 친다'고 단언하였다. 예기비 자체는 옆으로 길고, 필획이 瘦勁(수경)하여 힘있고 波(파)이한데, 한비이나 여러 가지 體勢(체세)가 나타나므로 여러사람이 나누어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비중 가장 근엄하고 가장 품위있는 글씨로서, 精妙(정묘). 有神(유신)하고 評正(평정)하며, 獲(획)이 생동하는 것 같다.예기비 문자의 비범함에 대해서 明代의 郭宗昌(곽종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자획의 훌륭함은 붓으로 쓴 것도 아니고 손으로 쓴 것도 아니다. 우아하기로는 그 이상의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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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전비(曺全碑)
조전비는 흙속에 매몰되어 오다가 명나라 때 섬서성 부양현의 옛 성터에서 발굴되었다.
중국 후한(後漢) 때인 185년에 세워진 비로 합양령(郃陽令) 조전(曹全)의 공덕을 찬양한 비. 조전은 동란을 수습하고 민치(民治)에 힘써 큰 공을 세운 사람이며, 이 비는 명(明)나라 때인 만력(萬曆) 연간에 출토되었는데, 출토될 당시 결자(缺字)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비의 전면은 20행(行)으로 1행 45자이며, 뒷면에는 건비(建碑)에 관계한 사람의 관등 성명이 새겨져 있다. 예기비(禮器碑)와 함께 한예(漢隷)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히며, 이 비를 서예적인 면에서 볼 때 용필의 특징은 역입평출과 원필을 위주로 함이 매우 분명하다. 운필은 형세에 따라 나아가서 크게 걸터앉거나 도약하는 필획이 매우 적어 격하거나 심함이 없다. 필세는 온건하고 얌전하며 밝은 아름다움이 많다. 파책은 때때로 비교적 길게 썼고 자태도 다양했다. 혹은 작은 시내가 잔잔하게 흐르는 것 같고, 혹은 가볍게 누른 뒤에 형세에 따라 뛰어오름에 여유가 있고 유창해 훨훨 날아오르는 자태를 얻었다. 서풍으로 보면 이 비는 음유의 미에 속한다. 아리따운 자태가 많고, 체태가 얌전하고, 농염하면서 속되지 않고, 수려하면서 맑고, 중궁은 긴밀히 수렴하고, 정기는 안으로 감추고, 펼침은 학이 나는 것 같고, 우아하고 조용하면서 단정하고 장엄하며, 예스럽고 질박한 가운데 화려함을 얻었고, 맑고 수려하며, 필묵이 정묘하고, 풍요로움이 쌓였고, 정신은 달리고, 초탈하고 표일함이 뛰어나며, 뜻과 기운이 영활하고 화목하여 밝은 아름다움과 청아한 풍격을 열어주었다.
조전비의 내용은 정확히 알 길이 없으나, 상황증거를 추리하건대 부양현 장관이던 조전의 희망에 따라 그의 창덕비가 세워지기로 되어 며칠 후면 입비식까지 갖게 될 무렵 돌연 조전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기부한 금액까지 명기되어 있는데, 바로 그들이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증거품이 될 비를 땅속에 묻어버렸을 가능성이 짙다. 이 비를 세운 날짜는 중평 2년 10월이고 사서에 의하면 그해 9월 삼공, 즉 최고 권력자 중의 한 사람인 사공 양사가 죽었다. 동시에 그 참모격이던 간의대부 류도는 갑자기 실각하고 다음날 처형되었다. 조전도 그 일당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조전의 동생 영창 태수 조란도 당쟁 때문에 죽고 조전도 그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7년간이나 숨어 지내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서풍(書風)은 수려 전아하고 여성적이어서 소박하나 웅건한 맛은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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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을영비 (乙瑛碑)
후한의 환제(桓帝)때에 노나라의 재상 을영의 신청에 의하여 공자묘에 묘를 관리하는 사람을 두게 한 것을 기술하고, 을영 이 하 그 일에 관계된 사람들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은 18행,각 행에 14자로 되어 있다. 결구가 잘 맞춰져 있고 용필이 날카로우며 그 파책은 특히 역동적이다. 조전비에서처럼 중심으로 밀집시키고 좌우 양면으로 세를 확장시켜 내는 결구 도 아니며, 장천비처럼 방형안에 필획을 제한시키는 결구형식도 아니다. 평범한 모양이지만 힘이 들어 있고,소박하면서도 경부 한 느낌을 주지 않는 충실한 서체로서 팔분서체의 정통으로 꼽힌다. 중량감과 균형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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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사신비 (史晨碑)
이 비는 후한의 영제 시대에 노나라의 승상이 된 사신이 공자묘에 성대히 제사를 치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현 재 산동성 곡부 공자묘의 비림(碑林)에 있다. 이 비는 전후 양면으로 문장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을 사신전비, 후면을 사신 후비라 칭한다.
사신전비의 내용은 대개 사신이 공자의 고향에서 노나라 승상의 직에 있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아울러 상서(尙書)에게 성상(聖上)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사를 올리도록 청하여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사신후비의 내용은 사신이 공자에게 제사 올릴 때의 성대한 정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이다. 고박하고 후실(厚實)하며, 팔분예의 전형적인 것의 하나이다.
글자체는 3:2내지 4:3정도의 세로 구성이다. 서법을 확실히 지켜 늘씬한 맛이 있고 화려하고 기교 있는 필법에 신중하고 긴장미가 있으며 단아하게 자형이 잡혀 있어 예서를 배우는 입문으로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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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서협송 (西狹頌)
서협송은 마애각으로 무도(武都)의 태수가 서협의 각도(閣道)를 수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형, 사각형의 결구로 시작하거나 끝나고, 파책이 다른 비석처럼 강조되지도 않은 소박하고 야성미 넘치는 글씨, 굵고 가늠이 없이 똑같은 굵기로 글씨를 쓰고 있지만 무미건조하지 않고 마음에 다가오는 박력이 있다. 장천비에서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서성 성현 이궁협의 절벽에 새겨져 있는데, 처음에 오단 크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시 오단 크기의 유래가 적혀 있다. 이 왼쪽에 서협송의 본문이 있다. 글의 끝에 구정(仇靖)이란 글쓴이의 서명이 있다. 한비는 대체로 글쓴이를 밝히지 않지만, 이 작품은 서명이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풍은 중앙 도시의 전형을 약간 벗어났지만 의지적인 늠름한 붓놀림은 모든 한비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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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천비 (張遷碑)

낙음현의 현령이었던 장천의 공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본문에는 가차자(假借字)나 오자가 더러 있어서 후세의 모각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지만, 소박하면서도 너그러운 서풍은 후세에 따르기 힘든 미를 지니고 있다. 시기상으로는 후한의 말기에 해당되는 이 비는 용필이 방모(方模)하고 졸후(拙厚)한 맛이 있다. 서법은 위진의 팔분서체의 선구가 되었다. 소박하고 힘찬 점획, 완강한 네모꼴의 구성, 굵기를 모르는 단순한 선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충분히 뻗은 점획, 자유롭고 메이지 않은 결체에 그 참맛이 있다.
필획의 기필과 수필이 곧바로 이루어지고 전절(轉折)이 항상 직각을 이루어, 장천비가 한예 중 방필웅강(方筆雄强)의 전형으로도 일컬어진다. 또, 후한 말에 나타난 이 비는 이미 해서의 형태에 매우 근접한 서체를 보이고 있어서, 그 시기에 해서의 원형이 태동되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도 가치가 있다. 본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유래와 사자구(四字句)로 된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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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석문송(石門頌) 

후한시대(148년)에 마애에 새겨진 것으로 후한(後漢) 제일의 걸작이라 할 수 있음. 한나라 사예교위(司隸校尉)를 지냈던 양맹문(楊孟文)이 석문(石門)을 뚫어 교통을 편리하게 했다는 일을 적은 것. 소박한 서풍을 가지며 예기비, 조전비와는 반대로 예서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있음. 한예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려운 작품의 하나로 장조익(張祖翼)은 발문에서 “300년 동안 한비를 스승으로 삼은 자가 많았으나 석문송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없었다. 대개 웅혼하고 자유분방한 기는 담력이 약한 사람이 감히 배울 수 없고 필력이 약한 자 또한 배울 수 없다.”라고 했음. 이 비는 장봉(長鋒)으로 종이에 강한 필력을 넣지 않으면 안 되며, 손과 마음은 너그럽고 붓끝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형세를 얻어 필봉에서 묘한 변화를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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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광개토 대왕비(廣開土大王碑)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려 414년에 세웠다.
광개토대왕비에 예서체로 새겨진 한자는 모두 1600여 자(字). 이 가운데 중복되는 1066자를 제외하면 537자에 불과하다. 서체의 특징은 한마디로 소박하고 장중하며, 착한 시골아이들처럼 뽐내지 않고, 우직하여 범박(汎博)하고,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비면에 글자를 새겨 정연한 맛을 내기위해 계선(界線)을 치고 정방형의 예서장법이다. 이는 장법의 변화에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글자마다 장단과 대소의 변화를 꾀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행에서 41자씩 배당하는 규칙을 지켰다. 주목할 것은 광개토대왕비와 동일인의 글씨로 보이는 광개토왕릉 전명과  광개토대왕 호우명은 장법적 측면에서 서로 다르다. 광개토대왕비와 전명이 계선을 그어 규칙적으로 배열하였다면, 호우는 글자의 대소와 자간의 간격이 서로 다르고 글자의 배열 또한 불규칙이다. 이러한 표현양식의 차이는 같은 글씨라도 용도에 따라 변화를 꾀하는 심미적 감수성이 뛰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필획은 고른 통나무를 연결한 듯 굵기의 변화 없이 직선과 단조로운 점으로 가로획의 가지런한 수평이나 정방형의 구획선 안에 튼튼하고 투박한 모습이다. 가식 없는 자연 ․ 소박 ․ 진실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 노자의 소위 박(樸, 통나무)이요, 산에서 갓 캐어낸 박옥(璞玉)이라 일컫는다. 박과 박옥은 완성품이 아니요 인공이 전연 가하여지지 아니한 미완된 가능태의 집합체다. 그것은 예쁘고 깜찍하고 날씬하고 매끄럽고 자세하고 완숙하게 다듬어진 세련미는 없다. 그저 투박하고 소탈하고 무뚝뚝하고 촌스럽고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미숙한 고졸미(古拙美)가 있다. 이를 기본으로 광개토왕비 서체의 필획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예서의 자체(字體)이나 전서 ․ 해서 ․ 행서 ․ 초서풍의 다양한 체세가 혼융되어 있다. 즉 건비 시기가 예서에서 해서로 변해가는 단계였지만 서체 각각의 장점을 취한 듯하다. 읍부(邑部)가 들어있는 ‘鄒’, ‘朗’, ‘都’, ‘部’字의 경우 ‘㠯(이)’로 써서 전서의 서법이 보이고, 책받침(辵) 방(旁)의 경우 ‘ 辶으로 하지 않고 ‘ㄴ이나 ‘ㄴ위에 점을 하나 찍어 표현했는데 행서와 초서의 서법이다. 예서와 초서의 체세가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은 ‘岡’, ‘來’, ‘獲’, ‘渡’字 등이고, 초서의 영향이라 볼 수 있는 ‘開’, ‘顧’, ‘號’, ‘與’, ‘往’, ‘龍’, ‘示’字 등 있는데, 이 가운데 號, 與 字는 전서의 영향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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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공표비, 무영비, 공주비등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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