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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憫農(민농)

by 까마귀마을 2024. 4. 25.

憫農(민농) 가엾은 농부

 

1首

春種一粒粟(춘종일립속) 봄에 한알 곡식 뿌려서

秋收萬顆子(추수만과자) 가을이면 만알 곡식 거두네

四海無閑田(사해무한전) 세상에는 노는 땅 한뼘 없지만

農夫猶餓死(농부유아사) 농부는 되레 굶주려 죽는구나

 
 2首

鋤禾日當午(서화일당오) 한낮 무더위에 김을 매니

汗滴禾下土(한적화하토) 땀방울이 후두둑 땅을 적시네

誰知盤中餐(수지반중찬) 누가 알리오 상 위의 쌀

粒粒皆辛苦(입립개신고) 한톨 한톨이 모두 농민의 땀방울인 것을.

 

註.

憫(민) : 근심할

一粒(일립) : 낟알

粟(속) : 조 (오곡의 총칭)

閒田(한전) : 경작(耕作)하지 않은 땅, 놀리는 논이나 밭.

鋤禾(서화) : 호미로 김을 매다 ( 鋤 : 호미)

汗滴 : 땀방울.

盤中餐(반중찬) : 소반위의 밥.

粒粒(립립) : 한알 한알

辛苦(신고) : 매운 것과 쓴 것, (괴롭고 고생(苦生)스럽게 애를 씀).

 

중국 사람들이 즐겨 읽으며 삶의 가치로 여기는 148구절이 있다.(중국인 들이 즐겨 읊는 문구 148 구절 (tistory.com)

이 148구절은 베이징대학교 부총장을 지내면서 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 지도자들의 멘토 역할을 했던 나라의 스승인 지셴린(季羨林)이 논어, 맹자등의 철학서를 비롯해 사기, 시경, 당시등의 고전에서 148개의 구절을 뽑아 중국인들의 삶의 지침으로 제시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중국 고전의 소중한 가치를 드러내는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셴린은 이 글들을 두고 “이를 다 외우면 경계가 한단계 더 올라간다. 문학 방면에 그치지 않는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들이 암기하기를 권했다. 이중에는 농업의 소중한 가치와 농민들의 노고를 기리는 글로 "誰知盤中餐 粒粒皆辛苦" (누가 알리오 상 위의 쌀 한톨 한톨이 모두 농민의 땀방울인 것을) 구절이 실려있다. 

지셴린은 진정한 농업의 가치와 농민들의 노고를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위의 구절을 정했을 것이다. 옛날과는 달리 먹을 것이 풍족해 농업과 농민에 대한 관심이 더더욱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업이 천하의 가장 큰 근본(農者天下之大本·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은 단순히 옛 시대에 한정된 시대착오적인 구호는 아니다. 환경파괴와 자연훼손이 심각한 오늘날 더욱 절실한 말일 것이다. 주역의 삼재사상(三才思想)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천하의 근본으로 삼는다.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큰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농업이다. 농업의 가치란 단순히 식량을 생산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 땅을 살리고 키워나가는 일, 어찌 큰 근본이 아니겠는가?

誰知盤中餐 粒粒皆辛苦 (누가 알리오 상 위의 쌀 한톨 한톨이 모두 농민의 땀방울인 것을)이 구절은 中唐의 문신인  李紳(이신)이 지은  憫農(민농)이란 5언 률시의 2首 마지막  3-4구절이다. 불과 40자의 짧은 글로 핍박 받는 농촌의 실상을 이보다 더 핵심적으로 묘사하긴 힘들다. 고아하고 품격 높은 언어가 아니라 평범하고 쉬운 구어(白話)로 썼으나 골기(骨氣)가 있고 풍격이 굳세다. 그리고 이 시는 근체시풍의  절구시 이나 고풍(古風)에 속하며. 절구보다 훨씬 민요풍에 가깝다.

詩는 먼저 한알의 곡식으로부터 만배의 수확을 얻는 농업의 놀라운 생산성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주에게 거의 모든 수확이 돌아가고, 농민들에게는 생계를 이어나가기도 힘든 소작료가 주어질 뿐이다. 일년 내내 혼신의 힘을 기울여 곡식을 거두지만, 정작 그것을 먹는 사람들은 농민들의 수고에 감사의 마음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세태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한 알의 씨앗으로 만 알의 결실을 거두는 경제 이익을 농부들이 몽땅 향유한다면 가난한 농부는 없어야 한다. 오히려 농촌에 천하 갑부가 즐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역사 속 실상은 이와 달랐다. 그렇게 이익이 많은 농사를 짓고, 천지사방에 노는 땅이라고는 없었건만 농부들은 굶주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장악한 특권층이 대다수 농토를 점유하고 농사 이익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당시 농민이 굶주리는 것은 왕손공자라고 하는 특권층이 농작물 가져가 부귀와 호사를 누리기 때문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시인이 농민을 대신해 이 말을 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 해결을 말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것은 아쉽다. 역사이래 농촌에 대한 압박과 수탈은 조금씩 얼굴을 달리하며 대대로 이어져왔다.

예로부터 나라의 근본이 곧 백성이므로 지켜줘야 하며, 그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식량이므로 농업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  "국이민위본 민이식위천(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여긴다는 뜻으로,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가 폭정을 저지르자 명재상 육개(陸凱)가 올린 상소문에 있는 글이다. 
당나라 이신(李紳)이 쓴 민농(憫農)즉 가엾은 농부라는 위의 詩의 마지막 구절인  "수지반중찬 입립개신고(誰知盤中餐 粒粒皆辛苦)"는 오래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다섯살 배기 외손녀가 중국어로 암송하는 동영상이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신의 민농(憫農)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두 번째 시만 실려 있다).

백화(白話)란 글말(文語)인 한문에 대비되는 입말(口語) 중국어를 뜻하는데, 한자로 이를 옮겨적은 걸 백화문(白話文)이라고 함. 백화문은 당(唐)나라 때 생겨서 송, 원, 명, 청나라를 거치면서 발전했음.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베이징 사람들의 입말을 옮겨적었으며, 입말이라는 건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므로 한문과 달리 시대에 따른 차이가 있음.

 

이 외에도 농민의 애환과 농촌의 피폐([疲弊)함을 읊은 시는 많다.

당(唐)나라 의종(懿宗)때에 섭이중(聶夷中)이 이 시를 모방하여 지은 전가(田家)시가 전당시(全唐詩)에 실려 있으며.

부경원상전(父耕原上田) 아비는 언덕배기 밭을 갈고

자촉산중황(子斸山中荒 )자식은 산 속의 황무지를 일구누나

유월화미수(六月禾未秀) 유월이라 벼가 채 익지도 않았건만

관가이수창(官家已修倉) 관가에선 벌써 창고를 수리한다오

서전당일오(鋤田當日午) 밭을 매다가 정오를 당하니

한적화하토(汗滴禾下土) 땀방울이 벼 아래의 땅에 떨어지네.

수념반중찬(誰念盤中餐) 뉘라서 그릇에 담긴 음식이

입립개신고(粒粒皆辛苦) 알알이 모두 농부의 신고임을 알리오.

 

변계량(卞季良)(1369 공민왕 18)-1430(세종 12)〉이 지은 고열행(苦熱行)이라는 시에

평인집열역가괴(平人執熱亦何怪) 평민들 더위에 시달림 무엇이 괴이한가

불견남무서화옹(不見南畝鋤禾翁)남쪽 이랑의 김매는 노인 보지 못하였는가

종년노력경식인(終年勞力竟食人)일년내내 힘들여 마침내 남들을 먹이니

선왕소이사농공(先王所以思農功) 선왕이 이 때문에 농부의 공 생각한 것이라오

라고 하여 폭염에 김매는 농부의 괴로움을 읊었다.

 

춘정집(春亭集) 2권에도 김정국(金正國) 1485(성종 16)-1541(중종 36)의 사재집(思齋集)2권에도 민농(憫農)이라는 제목으로 백성들을 착취하는 관리를 비판한 시가 보인다.

맹어아호독어사(猛於餓虎毒於蛇 )굶주린 범보다도 사납고 독사보다도 독하니

수환양의거이아(誰喚良醫去爾痾) 누가 양의(良醫)를 불러 너의 병 치료해줄까

이래불견최과졸(邇來不見催科拙) 근래에 세금 독촉하는 데 서투른 이 볼 수 없으니

도처유문백착가(到處唯聞白着歌) 도처마다 오직 백착가(白着歌)만 들리네.

백착가(白着歌)는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원망하는 노래로, 본집(本集)에 다음과 같은 주(註)가 붙어있다. “당唐나라 원재(元載)가 세금을 많이 거두니, 당시 사람들이 백착가(白着歌)를 지었다. 그 내용에 명분없이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는 곳마다 공공연하네. 무명중렴(無名重斂) 소착공연(所着公然)라고 하였으니, 꺼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고려의 시인 이규보(李奎報)는 농부가 할 말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 시인의 임무라고 했다. 농부를 대신해 읊는다고 한 대농부음(代農夫吟)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의 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농민이 농사를 열심히 짓고도 굶주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했다.
帶雨鋤禾伏畝中 비 맞고 김을 매며 밭이랑에 엎드리니
形容醜黑豈人容 검고 추악한 몰골이 어찌 사람의 모양인가.
王孫公子休輕侮 왕손공자들이여, 우리를 업신여기지 말라.
富貴豪奢出自儂 부귀와 호사는 우리로부터 나온다.

북송의 시인 왕우칭(王禹偁)은 농촌으로 귀양 가는 신세가 되었다. 농민이 유랑민이 되어 떠나가는 참상을 가까이서 목격하고,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 유랑민이 되어 떠나가는 처지를 공감한다고 하는 시 감유망(感流亡)을 지었다. 절실하게 묘사한 대목을 든다.
老翁與病嫗 늙은 영감과 병든 할미
頭鬢皆皤然 머리털이 온통 새하얗다.
鰥呱三兒泣 세 아이는 울어대는데,
呱惸惸一夫 홀아비 홀로 근심만 한다.

농민이라는 총괄 개념이 아닌 실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자기를 돌아보았다. 자기는 높은 관을 쓰고 벼슬을 하면서 백성을 괴롭히기나 했으니, 쫓겨난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유랑하는 처지에서도 늙은 부모를 모시는 사람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조선후기에 정약용(丁若鏞)은 귀양 가서 본 유랑민의 모습을 더욱 처참하게 그렸다. 기민시(飢民詩)라고 한 굶주린 백성의 처지를 노래한 시가 세 수이다. 한 대목을 든다.
道塗逢流離 거리거리마다 만나는 유랑민
負戴靡所聘 이고 지고 오라는 데 없어,
不知竟何之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구나.
骨肉且莫保 혈육이라도 돌보지 못하네.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는 “아득하도다, 천지의 조화, 고금 누가 알 수 있으랴?”라고 했다. 뒤에서는 “엄숙한 조정의 훌륭한 관원들이여, 경제에 나라 안위 달려 있다네”라고 했다. 천지의 조화가 바로 되기를 기대하다가, 국정 담당자들이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시대의 위백규(魏伯珪)는 농촌에서 살면서 농민이 하는 말을 시로 전했다. 보리를 두고 지은 연작시가 놀랍다. 죄맥(罪麥)에서 보리의 죄를 묻는다는 말을 이렇게 했다.
號穀數爲百 곡식이라 하는 것 몇 백 가지인데
可憎者惟麥 보리라는 놈이 가장 밉살스럽다.
謬以重惡質 몇 겹이나 악질인 녀석이 잘못 되어,
承乏參民食 궁핍을 틈타 백성들의 먹거리에 끼어들었다.

보리밥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 농민의 불평을 거친 말투 그대로 쏟아놓아 웃음이 나오게 했다. 對麥(보리가 대답한다)에서는 보리가 항변에 대답하는 말을 적었다. 보리 덕분에 춘궁기를 넘기니 그 은혜가 크고, 보리밥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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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李紳, 772~846) :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자는 공수(公垂)이다, 벼슬은 진사(進士)를 비롯해 우습유, 한림학사, 중서사인(右拾遺, 翰林學士, 中書舍人) 등을 지내고 다시 중서시랑 동평장사(中書侍郎同平章事)에 이르렀다. 풍격이 평범하고 세속적인 시를 주로 썼다. 이신은 백거이·원진 등과 함께 시를 통해 사회적 폐단과 민생의 질고를 고발하는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단순히 예술적·서정적 표현에 치중하던 현실도피적인 시풍에 반대하며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당시 권세가들로부터 큰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이신은 신제악부(新題樂府) 20편을 지어 신악부운동을 선도하였으나 현재는 소실돼 없고 위의 시 민농이 그의 대표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신은 어렸을 때 농민들이 음식과 의복없이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을 보았고 동정심과 분노로 민농憫農(농에 대한 연민) 시 두편을 썼는데, 이는 여러 시대에 널리 유포되고 낭송되었으며 농민에 대한 연민의 시인으로 칭송되었다. 통속적인 언어로써 당시 농민착취와 여기에 따른 민초들의 빈곤하고 고통스런 심정을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 저서에 추석유집(追惜遊集) 3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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