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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春雨 (춘우)봄비

by 까마귀마을 2024. 3. 20.

 

 

 

                         春雨 (춘우)봄비

 

柳色雨中新(류색우중신) 버들 빛은 빗속에 새롭고

桃花雨中落(도화우중락) 복사꽃은 빗속에 지는구나.

一般春雨中(일반춘우중) 같은 봄비에도

榮悴自堪惜(영췌자감석) 스스로 흥망성쇠가 애처러워라

            -----윤홍찬(尹弘璨)----

 

註.

柳色(유색) : 버드나무 잎의 색.

雨中新(우중신) : 봄비를 맞고 더욱 새로워짐.

桃花(도화) : 복숭아꽃. 이른 봄에 피는 봄의 전령사.

雨中落(우중락) : 봄비를 맞고 떨어짐.

一般(일반) : 보통, 일반, 마찬가지.

榮悴(榮 꽃필 영, 悴 시들 췌) : 꽃피고 시드는 것.

堪惜(堪 견딜 감, 惜 아까울 석) : 애석함을 견딤.

 

절기는 어느듯 춘분을 맞아 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이 맘때면 어김없이 살포시 내리는 촉촉한 봄비가 산하를 적시고 우리의 마음을 적십니다. 이 비를 바라보면서 조선 숙종 때 문인 윤홍찬(尹弘璨)이 지은 춘우(春雨)라는 시를 예서체로 써 보았습니다. 

 

봄비를 맞고 버들잎은 한층 연록색이 짙어지고, 봄의 전령사였던 복사꽃은 시들어 힘없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똑 같은 비를 맞고 산뜻하게 연록색을 피어올리는 버들잎과 어제의 영화를 뒤로하고 쓸쓸하게 떨어지는 복사꽃, 작자는 대조를 이루는 두 가지 영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네 인생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한 가지 현상을 두고 좋게 바라볼수도 있고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화사하게 피는 날이 있으면 조락할 날도 있습니다. 마지막구를 직역하면 “영화롭고 초췌함(피고 짐)에 스스로 견디기 애처롭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이는 “어찌 이렇게 다른 삶이냐”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사꽃은 다시 피어나고 버들잎도 언젠가는 단풍들어 시들기 마련이니까요.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요.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함께 하는 곳이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요. 이 시에서 작자는 대자연의 섭리를 말하는 듯 하나 인간의 단조롭고 가벼운 생각의 일단을 탄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는 창밖에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면서 한번쯤 자연의 조화와 인생무상에 대해 생각해 보는 넉넉한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글 三道軒)

* 윤홍찬(尹弘璨) 조선 숙종때 문인 (생몰연대 검색되지 않음)

 
 

春雨라는 제목으로 지어진 한시 몇 首를 소개합니다.

 

                周의 春雨(춘우) 봄비

春雨細不滴(춘우세부적) 봄비 가늘어 방울조차 짓지 못하더니

夜中微有聲(야중미유성) 한 밤에는 자그맣게 소리 들리네

雪盡南溪漲(설진남계창) 눈 녹아 남쪽 시내 물이 불어나면

草芽多少生(초아다소생) 새싹들이 꽤나 돋아 나겠지

 
 

              허난설현의 春雨 (춘우) 봄비

春雨暗西池 (춘우암서지) 보슬보슬 봄비는 못에 내리고

輕寒襲羅幕 (경한용나모) 찬바람이 장막 속 스며들 제(숨어들 제)

愁倚小屛風 (추의소평풍) 뜬시름 못내 이겨 병풍 기대니

墻頭杏花落 (장두행화락) 송이송이 살구꽃 담 위에 지네.

 

비 내리는 봄날의 나른함이 홀로 지내는 규방의 적막함에 더해져 서정적 화자의 고독한 정서를 극대화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은 앞 부분에서 공간적·시간적 배경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정적 화자의 정서를 부각시키는 한시의 일반적인 시상(詩想) 전개 방식을 보이고 있다. 시름에 겨워 병풍에 기대어 하루하루 시들어 가는 살구꽃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의 정서가 고독함과 함께 젊은 날의 세월을 보내는 아쉬움으로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규중 여인의 외로운 심정을 표현한 오언절구 한시로, 연못에 내리는 봄비와 살구꽃의 떨어짐을 배경으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인의 외로움을 쓸쓸하게 표현하고 있다.

 

                       陸游(육유)의 春雨 (춘우) 봄비

春雨 1

片片紅梅落(편편홍매락) 붉은 매화 꽃잎이 조각조각 떨어지고,

纖纖綠草生(섬섬록초생) 풀밭에는 가녀린 초록 새싹이 돋네.

無端夜來雨(무단야래우) 끝없이 밤비가 내려서,

又碍出門行(우애출문행) 또 바깥 나들이를 훼방 놓고있네.

 

春雨 - 2

春陰易成雨(춘음역성우) 음침한 봄날은 비 내리기 십상이고,

客病不禁寒(객병불금한) 길손은 추운 날씨를 못 견뎌 병이 드네.

又興梅花別(우흥매화별) 다시금 매화꽃과 이별해야 한다니,

無因一倚欄(무인일의란) 까닭 없이 난간에 한 번 기대본다.

 

春雨 - 3

胸懷玩步病(흉회완보병) 내 가슴에는 죽림칠현 완적 선생을 품고,

詩句謝宣城(시구사선성) 자연시인 사조의 시구를 간직하고 있네.

今夕俱參透(금석구참투) 오늘 저녁에는 두 분을 깊이 느끼며,

焚香聽雨聲(분향청우성) 향불은 사르는데 문득 들리는 빗소리.

 

註.

胸懷(흉회) : 마음속으로 생각함. 가슴에 품다.

玩步兵(완보병) : 玩籍(완적) (210~263) 삼국시대 위나라 시인, 죽림칠현의 좌장. 보병교위를 역임 하여서 사람들은 완보병(玩步兵) 이라고 불렀다.

謝宣城(사선성) : 謝眺(사조) (464~499) 남조의 제나라 뛰어난 산수시인.

 

春雨 - 4

疏點空階雨(소점공계우) 허전한 섬돌에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

長明古殿燈(장명고전등) 고찰의 불상 앞은 장명등이 밤을 밝히네.

廬山岑寂夜(여산잠적야) 험준한 여산은 적막한 밤중이고,

我是定中僧(아시정중승) 나는 스님들과 함께 좌정하고 있다오.

 

註.

廬山(여산) : 匡山(광산) 중국의 10대 명산 가운데 하나로 강서성 구강시에 있고, 해발 1,147m이며, 唐 현종이 양귀비와 사랑을 불태운 고찰 등이 있고,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 되어 있다.

 

              徐居正(서거정)의 春雨(춘우) 봄비
好是春朝雨(호시춘조우) 좋기도 하여라 봄날의 아침 비가
知時乃發生(지시내발생) 시절을 알고 만물을 발생시키네.
陽和方駘蕩(양화방태탕) 화창한 봄기운이 광대히 펼쳐지니
生意自分明(생의자분명) 활발한 생기가 절로 분명해지누나.
(徐居正 1420∼1488) 조선전기 문신.)

 

                尹愭(윤기)의 春雨 (봄비)
映空春雨細(영공춘우세) 허공에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聲色却虛無(성색각허무) 소리도 빛깔도 하나 없어라
山嶽新添畫(산옥신첨화) 산은 새로 그림을 그린 듯하고
樹枝忽綴珠(수지홀철주) 나뭇가지에 홀연히 구슬 맺히네
絲紋因屋見(사문인옥견) 지붕 위로 보이는 실 같은 무늬
風勢與煙俱(풍세여연구) 바람결에 연기와 함께 날리네
暗裏催生物(암이최생물) 만물의 생성을 시나브로 재촉하니
天機自妙符(천기자묘부) 천지의 조화에 오묘히 절로 맞네
(尹愭 1741∼182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위 시는 작자 나이 50세 때인 1790년(정조14) 봄의 작품이다. 봄비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만물을 싹 틔우는 봄비의 작용을 천지의 조화로 인식하는 내용이다. 부슬비가 밥 짓는 연기와 함께 바람결 따라 지붕위로 흩날리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鄭摠(정총)의 春雨 (봄비)
霡霂知時節(맥목지시절) 보슬비가 시절에 맞추어
廉纖逐曉風(염섬수요풍) 가늘게 새벽 바람을 따라오네
簷閒蛛網濕(첨한주망습) 처마 사이에 거미줄이 젖고
階下燕泥瀜(계하연미융) 뜰 아래에는 제비 진흙이 녹아 풀린다
着柳涳濛綠(착유공몽록) 버들가지에 뿌리매 희미하게 푸르고
催花蓓蕾紅(최화배뇌홍) 꽃을 재촉하여 봉오리가 붉어오네
一犁敷土脈(일이부토맥) 한 보습 비가 토맥을 녹이니
佳氣屬田翁(가기속전옹) 아름다운 기운은 농사짓는 첨지에게 속했네
(鄭摠 1358∼139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安鼎福(안정복)의 春雨 (봄비)
霢霂中宵雨(맥목중소우) 부슬부슬 밤중의 빗소리를
蕭疏枕上聞(소류침상문) 쓸쓸하게 베개 위에서 듣고
朝來看四面(조래착사면)아침에 일어나 사면 둘러보니
春色已三分(춘색이삼분) 봄이 벌써 성큼 다가왔구나
木末芽抽碧(목미아추벽) 나무 끝엔 푸른 싹이 돋아 있고
花梢蕊吐芬(화소예토분) 꽃가지에는 꽃술이 향기 뿜어대네
靜觀生物意(정관생물의) 저 생물의 의미 고요히 보노라니
不覺我心欣(불각아심흔)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기쁘네
(安鼎福 1712∼1791). 조선후기 역사학자·실학자.)

 

                李崇仁春雨(춘우) 봄비
楊柳和煙絲樣垂 (양류화연사양수)연무 속 버들가지 실처럼 늘어지고
滿池春雨燕飛飛 (만지춘우연비비)못 가득 봄비 속에 제비들 펄펄 나네
蓑衣過客知多少 (사의과객지다소)도롱이 쓰고 지나는 객들 적지 않다만
能得新詩一首歸 (능득신시일수귀)새 시 한 수 얻어 돌아갈 수 있으려나
(이숭인李崇仁, 1340~1392)

 

"봄비"  현대 시 모음(6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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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봄비 맞는 두릅나무 / 문태준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밭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풀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입안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2.봄비 / 이수복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힌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두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3.봄비 /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껏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4.봄비 / 안도현

봄비는

왕벚나무 가지에 자꾸 입을 갖다 댄다

왕벚나무 가지 속에 숨은

꽃망울을 빨아내려고

 
 

5.봄비 / 고재종

봄비 내리면

저 대그늘진 뒷마당의

층층 더께진 삼동얼음 녹으려나

 

6.봄비 내리면

저기 저 시퍼런 탱자울 너머
꿈결인 듯 유유히 앞강물도 푸릴려나
 

동네 한복판쯤에

두발 뻗고 퍼질러 앉아

딱 공딱! 되게 한번 먹이고

아이고 한울니 ㅡ임

목 넘기면

봄비 내리면

 

내 마음 속 자갈밭 귀영치에도

강파른 씨톨 하나 이윽고 눈을 떠서

이제는 하늘도 젖은 하늘 아래

저 둔덕 밑의 꽃다지며 황새냉이꽃

벌써 저렇게 차오르는 보리밭이랑

한번쯤 목메임으로
 
 

6..봄비 / 임재화

조용히 봄비 내리는 오후

은구슬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가녀린 나뭇가지 끝에서

노란 꽃송이와 함께 매달려있다.

 

이제, 꽃샘추위도 물러나고

온종일 봄비가 내리고 있는데

노란 산수유 꽃송이 곱게 피어나

맑고 고운 향기를 풍기고 있다.

 

촉촉하게 젖어 든 뜨락에서

내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듯

보슬보슬 내리는 봄비 소리가

메마른 내 가슴을 흠뻑 적신다.

 
 

7.봄비 / 고정국

하늘나라 고관대작의

밀실서랍에서 슬쩍해온

 

수입산 발모촉진제를

사람 몰래

뿌리는

 

경칩 녘 대머리 오름

화색 벌써

푸르다.

 
 

8.봄비 / 가영심

아름다워라.

젖기 위하여 옷을 벗는

옷벗은 산천 초목들 꿈꾸며

제 영혼 깨우는 모습은

아름다워라.

빗방울 실안개로 퍼지며

내 품안 가득 쏟아져 와

안기어 들고

아무리 가슴 가득 넘치어도
빛나는 아픔.
흘러와 닿는 아, 그리움이여.
따스한 피와
눈물의 황토언덕에
가서 눕는 봄비도​​
 

9.봄비 / 은파 오애숙

봄비 속에 활짝 봄 열릴 때

봄비 타고 사랑도 내리는지

 

새 순에 초록 물감 흩뿌려

대지 촉촉이 적셔주는 비

맘속 스미어 삭막한 심연에

첫사랑의 향그럼 피어나고

 

들판에 싱그러움 휘날리듯

사랑의 씨앗 심연에 싹 터

그대 그리움 일렁이는 물결

첫사랑의 입맞춤 살랑이며
 

밤암새 꽃잎 속삭이는 소리

맘속에 물결쳐 부메랑 되어

엄동설의 긴 겨울잠 깨우는

아침창 여는 싱그러운 미소
 

옛사랑 가슴 열어 봄비 속에

입 맞춰 그리움을 노래해요

 
 

10.봄비가 준 선물 싹 / 민만규

봄비 한줄기

시원하게 내리고 나니

그 자리엔

가녀린 회갈색 개나리 줄기

잔가지가 녹색 싹 틔우며

두 팔을 치켜세웁니다

 

봄비에 고마워라
수많은 싹이

두 팔 벌려

가녀린 외나무다리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봄비 한 번 더 내리면

노란 옷 걸치고

희망이란 꽃말로

흐드러지게 울타리를 수 놓으며

봄을 유혹하겠지요

 
 

11. 봄비 / 김근이

잿빛 구름으로

하늘을 막아 놓고

겨우내 움 추린 나무 가지들의

묵은 때를 씻어 내리는 봄비

빗속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답답한 마음이

층승 맞은 빗소리에 자지러 든다

만물이 봄비 속에서

깨어나던 어느 날

당신이 버리고 간 뒷모습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씻겨 내린다.

 
 

12. 봄비 / 황동규

조그만 소리들이 자란다

누군가 계기를 한금 올리자

머뭇머뭇대던 는개 속이 환해진다

나의 무엇이 따뜻한지

땅이 속삭일 때다

 

*는개 ㅡ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가는 비

 
 

13. 봄비 내리면 / 심의표

계곡에 쌓인 잔설

아직은 떠나지 않았는데

 

개울물 도란도란

고개 내민 버들강아지

성급함을 깨워주고

 

북악산 기슭 아지랑이

봄을 재촉하지 않았어도

 

남녘의 봄바람

구름 몰고 와 단비내리면
 

평화의 푸른 함성처럼

즐겁게 노래 부르며

 

온대지 푸나무들 한결같이

사랑의 눈빛 열어간다.

 
 

14. 봄비 / 박목월

조용히 젖어드는

초가 지붕 아래서

왼종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곡령 삼십리

피는 살구꽃

그대 사는 마을이라

봄비는 나려

 

젖은 담 모퉁이

곱게 돌아서

모란 움솟는가

슬픈 꿈처럼

 
 

15. 봄비 / 이우걸

그것은 신의 나라로

열려있는 음악 같은 것,

 

불타는 들을 건너서, 얼음의 산을 넘어서

돌아와 가슴에 닿는

깊은 올의 현악기.

 

텅 빈 벤치에서도. 시멘트 벽 속에서도

 

수 없이 잊어야 했던

가난한 이름들을

 

이 밤에 모두 부르며

봄비는 길을 떠난다.

 
 

16. 봄비 / 김명우

가녀린 흐느낌

누군가 울고 있다 소리 죽여 가며

 

많이 보고 싶었나보다

끝끝내 참지 못하고

속울음으로 내리는구나.

 

파르르 파르르

상처가 너무 깊어 보이나보다

풀잎마저 저토록 떨고 있으니

 

햇살 사모한 그리움이 아픔이어서

잊으려고 시작한 사랑

더 깊은 상처만 내었구나

 

가끔씩 행인들이 오가는 조그만 가게에서

엇갈린 현실 닳아지는 세월을 안타까워하며

조용히 앉아있을

 

영혼으로 맺어진 사랑하는 이에게

네 아픔을 말해보렴

 

혹여 햇살 같은 웃음 한웅큼 집어줄려나.

 
 

17. 봄비와의 추억 / 도지현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엔

어디선가 나를 보아줄 그이가 생각난다

우산도 없이 하교할 때엔

살며시 우산을 받쳐주던 그 사람

 
누구나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가슴 한편에 비단보에 싸서 간직한다

 

좋은 추억은 오래 간직하고 싶고

나쁜 추억은 빨리 지워버리고 싶어지지

그런데 추억은 뇌리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는 화인이 되어 있다.

 

오늘처럼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이면

그때, 그 순간의 기억이 생생한 것이

지금도 그 둑길엔 그때처럼 봄비가 내릴까?

 
 

18. 봄비 / 조동운

봄비야 엄덩설한 다지나 이제야

내리는 기다리던 봄비야 봄이 와야

자연의 삼라만상은 차가운 기운 벗고

 

봄비에 초록들이 가지 끝 움이 돋고

봄바람 마셔가며 햇빛에 생기 얻어

자라는 만생만물이 얼마나 신기한지

 
사람도 마찬가지 차가운 인생사에

봄비가 바람타고 살며시 적셔주면

어려운 냉전시절의 인생사 밝혀주랴

 

양지에 자리 잡은 부초는 생기 돋고

자색 빛 토해내며 빗줄기 반기듯이

인생도 자연처럼 그렇게 되었으면

 
 

19. 봄비 / 백원기

동이 트기까지 아직 먼 하늘

엷게 핀 잿빛 구름은

꽃샘바람과 하얀 눈발

서둘러 뿌리지 않고

 

잠든 모든 것 깨워 주는

따뜻한 봄비 쥐고 있다가

한꺼번에 부려주리라

 

얼었던 강물이 풀리고

겨우내 얼었던 인정도 녹아

살만한 봄날 되나 보다

 
 

20. 봄비 / 이재무

 
1
봄비의 혀가
초록의 몸에 불을 지른다

보라, 젖을수록

깊게 불타는 초록의 환희
 

봄비의 혀가

아직, 잠에 혼곤한

초록을 충동질한다

빗속을 걷는

젊은 여인의 등허리에

허연 김 솟아오른다

 
2

사랑의 모든 기억을 데리고 강가에 가다오

그리하여 거기 하류의 겸손 앞에

무릎 꿇고 두 손 모으게 해다오

살 속에 박힌 추억이 젖어 떨고 있다

어떤 개인 날 등 보이며 떠나는 과거의

옷자락이 보일 때까지 봄비여,

내 낡은 신발이 남긴 죄의

발자국 지워다오

 
3

나를 살다간 이여, 그러면 안녕,

그대 위해 쓴 눈물 대신 어린 묘목 심는다

이 나무가 곧게 자라서

세상 속으로

그늘을 드리우고 가지마다 그리움의

이파리 파랗게 반짝이고

한 가지에서 또 한 가지에로

새들이 넘나들며 울고

벌레들 불러들여 집과 밥을 베풀고

꾸중 들어 저녁밥 거른 아이의 쉼터가 되고

내 생의 사잇길 봄비에 지는 꽃잎으로

붐비는, 이 하염없는 추회

둥근 열매로 익어간다면

나를 떠나간 이여, 그러면 그대는 이미

내 안에 돌아와 웃고 있는 것이다

늦도록 늦봄 싸돌아다닌 뒤

내 뜰로 돌아와 내 오랜 기다림의

묘목 심는다

 

21. 봄비 / 곽재구

익은 꽃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세상 주유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아직 덜 핀 어린 꽃들이

꽃샘추위에 툭툭 떨어져

새 삶의 거름이 되는 것도

좋은 일

 

꽃이 아닌 인간들이

촛불 하나씩 들고

어둠 속 길 깜박깜박 걸어가다

두 손 두 무릎

고요히 모아

 

세상의 메마른 봄 흙 위에

작은 무지개 깃든

눈물 떨구는 일

좋은 일.

 
 

22. 봄비 / 정기현

토닥토닥

창문 두들기는 소리에

누군가 싶었더니

그리운 봄비가 왔어요

 

상큼한 손길에

연둣빛 어린 새싹

초록 꿈으로 조잘대며

부풀고

 

촉촉한 가지마다

사랑에 겨운

봉긋봉긋한 꽃망울

연분홍 신음으로 수줍다

 

사방팔방 피어나는

숨 가쁜 봄의 향연에

목마른 내 사랑을 달랠 듯이

그대 닮은 봄비가 찾아왔어요.

 
 

23. 봄비 / 김진학

하늘이 울고 있다

제 설움에 겨운 눈물을 따라

도시를 걷다 보면

창가마다에서 들리는 소리 없는 연초록과

눈(目)도 없는 하늘이

우는 오월이다

어떤 눈(目)을 가졌을까

하늘을 본다

칙칙한 회색이다

문득

노란 우산을 쓰고 걷는

여인의 눈길과 마주 친다

하늘이 여인의 눈 속에

머물다 사라진다

 
 

24. 봄비 / 주용일

밤새 누에 뽕잎 갉아먹는 소리

자다 깨어 간지러운 귀를 판다

세상 잘못 살아온 나를

어디 멀리 있는 이가 욕을 하는지

귓속 간지러움 밤새 그치지 않는다

잎에서 잎맥으로 잎줄기로 옮겨가며

점, 점, 점, 사나워지는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내 귓속 간지러움도 달팽이관을 따라

점점 깊은 곳으로 몰려간다

세상 함부로 살아온 나를

이제는 가까이 있는 누가 욕을 하는지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갈수록 거칠어지고

자다 깨어 죄 지은 사람처럼

무릎 꿇고 앉아 간지러운 귀를 판다

 
 

25. 그대는 봄비 / 김궁원

봄비가 나의 창을 두드립니다.

차 한 잔에 빗소리는 선율이 되고

빗길 속에 사랑이 저기 오네요.

아직은

나의 사랑 모자라는데

어떡해

오는 사랑

만나야 하나!

이제

빗물처럼 흐르는 사랑은 하기 싫은데

빗물 같은 그리움은 못 견디는데

봄비가 내립니다.

우산 속에 그리움을 뒤로 감추고

빗소리에 그리움이 흠뻑 젖은 채

저만치서 걸어오는

그대는 봄비​​

 
 

26. 봄비 젖은 꽃잎 편지를 끠우고 / 이채

봄비처럼 촉촉한 사람들과

꽃잎처럼 고운 삶을 살고 싶어

잔잔한 꽃물결에 일렁이는 백조처럼

나 그렇게 아름답고 싶어

고운 목청으로 새들의 노래를 부르며

모든 이들을 아끼며 사랑하고 싶어

마음의 먼지가 일고

집착의 바람이 불고

생각의 잡초가 자랄 때

봄비처럼 고요한 미학으로

다시 피고 싶은 꽃 한 송이의 지혜

사람이 눈물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있을까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며

꽃망울 틔우는 소망의 초록비처럼

나도 누구에게 기쁨의 샘터가 되고 싶어

봄비 젖은 꽃잎 편지를 띄우고

고요히 명상에 잠기노라면

가슴을 적시는 잔잔한 빗소리는

나를 가다듬는 맑은 기도가 되네​​

 

27. 봄비 / 오세영

꽃 피는 철에

실없이 내리는 봄비라고 탓하지

마라.

한 송이 뜨거운 불꽃을 터뜨린 용광로는

다음을 위하여 이제

차갑게 식혀야 할 시간,

불에 달궈진 연철도

물 속에 담금질해야 비로소

강해지지 않던가.

온종일

차가운 봄비에 함빡 젖는

뜨락의

장미 한 그루.​​
 

28. 봄비 /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에

밤새껏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줄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29. 봄비 오는 날 / 민병도

참 오래 버티어 온 가등마저 잠든 새벽,

유난히 춥고 어두운 기억의 집을 버리고

우리는 빈들에 나가 온몸으로 비를 맞았다.

생을 마친 먹감나무 조용히 산에 기대고

젖어 오는 무게만큼 발걸음이 무거울 때

올올이 잣아 올리는 뜨개질로 배를 띄었다.

 

이 땅을 찾아오는 비단 깔린 봄길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꿈속까지 따라와서

마침내 깊은 잠 깨운 법구경(法句經)을 읽었다.

 

 

30. 봄비 / 한상남

소리 없이

겨울의 휘장을 그어 내리는

무수한 면도날

 

허공에서 올올이 풀리는 비단실은

누구의 맑은 핏줄로 스며드는 것일까?

 

나도

오늘은 조용히 흘러

순결한 이의 뜨락에

온전히 수혈되고 싶다

 

31. 봄비 / 노향림

지난 겨울 누우드로 버티어온 나무들이
유심히 제 몸을 들여다 본다

수없이 많이 튼 살갛을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

한때 농익은 열매 매달고 놀던 무성생식의

까만 젖꼭지를 퉁겨본다

어디서 보았을까

몇채의 집들이 들판에서 등 돌려 앉는 것을

쑥대머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키를 늘인다

온종일 속옷이 벗겨진 하늘에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바람들만 산발한 채

뛰어다닌다

 

스스로 물소리를 만들며

흘러가는 비, 비

 

 
32. 봄비 /이향숙
봄비속에 난 서서히 젖어들고
내 숨결마저 젖어든다.
매달려 있는 빗방울에 얼굴을 들이대니
맑은 빗방울 속에
헝클어진 내 머리칼에서
찌든 삶의 냄새가 묻어난다.
서서히 젖어든 옷의 무게가
내 어깨위로 전해져 오고
힘겹게 걷고 있는 내 하얀 운동화가
흙탕물에 물들어가고,
손을 내민 처마안으로 들어가 보지만
한쪽 어깨가 여전히 비에 내맡겨진다.
뿌연 하늘에는 반갑지 않은 구름들이
널려져 있고 솔가지 사이사이에서 묻어나는
솔향기가 비속에 파묻히고
꽃잎을 다떨군 개나리도 새파랗게 질려있다.
촉촉히 젖은 숨결로
그대 안의 건조한 갈증을 녹이고 싶다.
 
 
33. 봄비 내리는 날애 / 박장락
봄비 내리는 날에
우산도 없이
지난날들의 사연이 흐르는
강가를 서성입니다
빈 가슴에 스며드는 그리움
무언의 몸짓으로
비를 맞아 싱싱해진 풀잎 사이로
소리없이 내리고
젖은 어깨를 타고 내리는
떨치지 못한 그리움은
끝내 온몸을 적시우고..
그대 그리워 쓸어 담은 시간은
기다림의 눈물이 되어
강물처럼 허무하게 흘러 만 가고...
 
 
34. 봄비 / 보하 이문희
상서(祥瑞)로운 손님
깡마른 피부를 일깨우고
말라 붙은 혈관을 데우는
새 생명의 배냇물이 흐른다
 
움츠린 꽃몽오리 터지는 소리
얼어 붙은 무거운 지구를 이고
고사리 귀연 손길. 예쁜 미소가
 
깊은 계곡 산 울림되는
눈 쌓인 개울 속. 새 생명의
아우성 소리 듣는다
 
예쁘고 고운 아씨
산고(産苦)의 거룩한 고통
희열의 몸부림이 혈관 속으로
전류되어 흐른다
 
 
35. 생명의 봄비 / 이민숙
촉촉하게 내린 봄비 달게 마신
만삭의 버들강아지도
지천으로 움 틔우는 야생화도
앞다투어 피어오르기에 분주하다
 
양수 같은 단비 받아 흙을 쪼아대며
실핏줄과 혈관을 열어 놓고
용솟음치며 봄을 밀어 올린다
 
초록의 혁명은
연두빛 채색으로
계절의 깃발을 쫓아 돋아 오르고
 
외진 그늘에 핀 은방울꽃도
민들레 홀씨도
돌 틈 한 줌 흙에서 기어이 돋아나고
 
사방에 가시로 둘러싸인
덤불 속 탱자꽃도 눈을 뜨고
언덕배기 찔레꽃도 주저 없이
햇살을 덥석덥석 베어 물었다
 
고군분투하는 야생화를 보라
폴짝폴짝 노처녀가 될까
토지의 시간을 부여잡고
뽀드득 뽀드득 생명을 씨방을 튀운다
 
 
36. 고운 봄비 / 김병훈
아침부터 봄비가
참 곱게도 내린다
지금 내리는 봄비는
누구의 눈물이기에
이렇게도 아름다울까
빗방울이 내 온몸을
아주 천천히 적시고
마른 풀잎처럼 보이는
나의 창백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준다
수줍은 웃음만 짓는
뺨을 타고 바닥으로
쉼 없이 떨어지는
작고 고운 빗방울은
혹 그대의 눈물인가
 
 
37. 봄비 채취하러 길을 나서다 / 신형식
가지산 감아돌아 청도 가는 길 비탈,
밤새 뒤척이던 어둠의 음모는
한줄기 햇살같은 염화미소를 입가에 흘리고
동안거 해제일에 맞추어
도열된 펫트병 옆에 나도 선다.
하늘 향해 뚜껑 열고
눈이란 눈은 모두 다 지그시 감으면
천국으로 향하는 고무 대롱,
그 끝을 타고 봄이 내린다.
굳이 계절의 허벅지 쯤에
구멍을 내지 않아도
비는 오는 거다. 봄비는 내리는 거다.
개구리 깨어날 경칩까지라 제한하지 않아도
노란 쪼끼에 채취면허 적지 않아도
속 보이는 병 옆에 나란히 서기만하면
봄비는 오는거다.
배꼽을 지나 명치를 타고
가슴 속 깊이까지 배달되어 오는 거다.
펫트병 하나에 만원이라
굳이 써붙이지 않아도
고로쇠 액 흐를 쯤이면
비는 오는 거다.
눈 지그시 감고 입 벌리고 서면
쪼르륵, 그순간
봄은 채취되는 거다.
 
 
38. 봄비, 그리고 아이와 새총 / 우당 김지향
전깃줄에 미끄럼 타는 물방울을
발가락으로 구슬치기하는 제비 두세 마리
 
발코니 창문에서 한쪽 눈에 눈씨를 모은
아이는 새총 개머리판 고무줄을 힘껏 당겼다
 
땅! 전깃줄이 한번 휘청거리고 구멍 뚫린 제비의
발가락 너머 은반지처럼 뽀얀 하늘이
똥그랗게 앉아있다
 
(어제는 제비가 전깃줄을 떠나 공간 밖
공간으로 절뚝이며 넘어가고
오늘은 바람도 몸을 숨긴 명주 커튼 친 하늘에
없는 제비의 피 묻은 발자국만 꾹 꾹,
찍혀있다 ~너는 알지)
 
 
39. 봄비의 시샘 / 주응규
봄 너에게 나 얼큰하게 취해
내 마음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날
봄 그대 와 나를 시샘하는 비가 내린다
 
비야 너 내리는 것은 나 알 바 아니지만
활짝 피어난 고운 님 다칠세리
나 안절부절못한단다.
 
비야 너로 인하여
내 님 다치면 안 되는데 어찌하면 좋으니
 
내 맘이 어찌할 바 몰라
비가 우리를 갈라놓기 전
나 한잔 커피에 봄 향 가득 풀어 넣어
내 너를 마셔 고이 간직하련다.
 
봄아
비가 너를 쓸어 가기 전
나 너를 내 몸 안에 품으련다.
 
 
40. 봄비 / 황경식
붕괴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물어 뜯겨서가 아니라
흔들림에 의해서
조금씩 금이 가고
개나리, 진달래 그리고
잿빛 할미꽃잎 위에
봄비가 내린다
 
무너져 내리던 젖은 언덕을
한없이 또 무너져 내리게 하며
아무런 色도 머금지 않은
봄비의 혓 바닥끝에서
충혈 된 붉은 꽃망울과
초록 잎사귀들 울고,
샛노란 망치질하며
 
병아리 잔등 위에도, 봄비는
잔혹하게 떨어진다
주머니 바깥으로 나와 흔들리는
우리들의 따분한 손목 위에도
핏물처럼 스며 번지는 봄비
우리의 영혼을 천천히 녹이는 봄비
色色의 눈물을 흘리며
 
담장 너머 빨래들이며
쉴 곳을 잃고 놀란 나비, 망연자실이다
피다 만 백목련, 자목련도 망한다
꿀을 탐할 수 없는 벌들도 풀죽으리라
폭포처럼 일시에 쏟아지는 色이여
푸른 깃발 힘껏 지상으로 휘두르며
불온한 煽動 밤새 꿈꾸는 봄비여
 
 
41. 봄비 소리에 / 최병창
보이지 않는 진동이
마법의 순간처럼 흐르고 있었네
 
겨울이 풀려날 즈음, 신기하게도
온몸의 세포가 느린 행진을 시작하고
겨우내 묵혀 두었던 살갗 위 비늘들이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시점에
 
스멀스멀 온기가 온몸으로 살아나듯
채 마르지 않은
낱말들이 미동하듯 흘러내리고 있네
 
목마름에 눈뜨려는 빗소리를
기다리지 않은 생명 어디 있겠는가
소리마저 미끄러지듯 봄비가 흘러내리네
 
끌어 안듯 속내까지 흠뻑 적시며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장맛비보다
겨우내 묵혀둔 머릿결 잔잔히 빗어 내리듯
소리마저 외롭다고 서툴게 뒤척이는
그래서 흠모하며 집중하는 봄비인가보네
 
기억해야할 이유가 있어
꽤 오랜 시간을 다듬은 순간,
누구라도 기다림을 살필 자유는 있는 것
 
봄비가 소리처럼 내리고 있네
소리가 봄비처럼 내리고 있네,
이 비 그치면 눈을 뜬 새싹들은
펴지 못한 날개를 다독일 테고
먼데 소리로 닫혀있던 눈과 귀도
불러들일 것이네.
 
 
42. 첫 봄비 내리는 날의 기억 / 문충성
꽁꽁 얼어붙었던 하늘아
참았던 울음 탁 터놓아
엉킨 실타래 풀려나가듯
내리는 솜털 같은 첫 봄비
하늘아, 조금 성급했니?
무지개도 먼 산에 걸어두고
봄바람도 먼 들판에 재워놓고
꽁꽁 얼어붙었던 땅아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거라
가슴속에 키워온
모든 슬픔의 씨앗들
죽어 살던 고통의 뿌리들
연초록 빛으로 꽃 피어나게 하라
솜털 같은 첫 봄비 내린다
온갓 새들아
비 내리는 하늘로 파닥파닥
모두 나래 활짝 펴 날아오르라
새봄 새파랗게 찢어놓아라
이승의 끝을 절룩여온 봄바람아
무지개야 하늘 가득 차오르라
봄 나비들아 나를 깨워내다오
저 아득히 먼 연두빛 기억 속에서
 
 
43. 봄비 / 정찬열
촉촉한 봄비
대지를 적신다.
일깨우려는 새 생명에
갈증 든 나뭇가지 적시어 흔드는 비
보리밭 들녘의 봄을 훔쳐 깨운다.
 
깨어나려고
일찍 뜬눈을 부지런 떤다
칼칼한 목 줄기 허기진 새벽
보리밭도 누런 잎을 탈탈 털고 일어선다.
 
한눈팔던
잡초들도 덩달아 일어나려 기를 쓴다.
얼굴에 둘러쓴 먼지 털어내려고
기지개를 켜면서 눈망울 크게 뜬다.
 
세월이 배달한 나뭇가지에
새잎을 틔우는 실눈을 뜨고는
늦잠 든 바람에 실려 오는 봄비
산과 들을 헤매며 부활을 엮는다.
 
 
44. 봄비 속을 걷다 / 류시화
봄비 속을 걷다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봄비는 가늘게 내리지만
한없이 깊이 적신다
죽은 라일락 뿌리를 일깨우고
죽은 자는 더이상 비에 젖지 않는다
허무한 존재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봄비 속을 걷다
승려처럼 고개를 숙인 저 산과
언덕들
집으로 들어가는 달팽이의 뿔들
구름이 쉴새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여러 해만에 평온을 되찾다
 
 
45. 봄비 / 이상복
누군가 창밖에서
경쾌한 물의 왈츠를 추고 있다
피아노 건반의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사분의삼박자 리듬에 맞춰
 
부드럽게 발끝을 바닥에 사선으로
톡톡 치며
가볍게 손바닥을 터치하며
한 바퀴 커다랗게 둥근 원을 그리고 돌며
서로가 서로를 적당한 거리에서
상냥하게 바라보며 보듬으며
반갑다고 꾸벅 대지에 인사하며
 
자박자박 똑똑 딱딱
잠의 메마른 대지의 감성을 일깨우는
섬세하고 따사로운 어머니의 손
 
 
46. 나라도 봄비 / 정홍순
비 맞은 꽃이 더 예쁘다면서
음악을 얹어 사진을 띄웠다
 
꽃이 걸고 있는 저 빗방울은
물 좋은 새벽 비란 것을 알겠다
 
광어랑 농어 수족관에 넣고
칼을 문지르는
나로도 일육수산 여자가
흔들어대는 진주귀고리 닮았다
 
사양도 동백꽃 꺾어 물고
갈매기 날아와
쑥섬에 같이 젖어 흐르는
 
자르르 물 구르는 소리에
바다가
비에 젖어 핀다는 것을 알겠다
 
*전라남도 고흥군 동일면과
봉래면을 이루는 섬.
 
 
47. 봄비 / 박신규
늦잠 잘 때 내린다
낮잠 잘 때에 내린다
 
어머니 목소리 창가에 듣는다
하이고―
게으름쟁이 잠 자알 오게 비가 오신다 잉
 
 
48. 봄비는 추억을 데려오고 / 나영애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산만한 덩치
듬직해 보이던 모습은
무거워 보였다
 
나를 후끈하게 했고
술렁이게 하고
손 끝 스침에
내 몸은 스프링이 되었지
 
우리 사이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였지만
탱탱하던 오감
 
보이지 않던 그것이 내게 와
감정을 쥐락펴락 하더니
손가락 사이
시간 빠져나가 듯 사라졌다
 
뜨거움도 울렁거림도
질투도 죽고
팔짝 뛰어오르던 자리에
 
꼼발로 내리는 봄비
 
 
49. 봄비 / 김남환
하늘의 총명이
어둠을 허물고 있네.
 
그윽이 사르는
첫새벽을 발원(發願)하여
 
맺힌 꿈
속속들이 풀고
한마당
차는 것이여.
 
산허리를 간질이며
흰 여울을 일으키며
 
소리죽여 흐르는
저 보석들의 강(江)
 
그 겨울
허망한 자리
봄이
쌓이고 있네.
 
 
50. 봄비 / 고증식
텅 빈 들에
그대 조용한 발자국
숨죽인 뼈마디에 가락으로 솟는
저 잎새들의 어깨춤을 보아라
혹한의 세월 건너온
소박한 새날의 첫 입맞춤이여
잔잔한 눈길로
새싹 한 떨기 바라보게 하는
그대, 반짝이는 생명의 눈물이여
 
 
51. 봄비 내리는 날엔 / 청운 손미경
창가에 봄이 오는 소리가
가슴 간지럽게 다가설 때마다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저 먼 곳에서도 나를 볼 수 있을까
 
문득
날 부르는 감미로운 목소리
뒤돌아보니 바람 소리였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흘러도 제 가슴속에는
잊지 못할 첫사랑인 당신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봄비 내리는 날엔
제 마음속에 고인 눈물처럼
창가를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 듭니다
 
언제나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랑은 당신뿐이라는 것을
애절하게 띄워봅니다
 
죽는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52. 봄비 / 이사람
밭일 오가며
알고 지냈는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봄이면
엄마 무덤에
 
들꽃 몇 송이
두고 간다
 
 
53. 봄비 / 문태준
봄비 온다
공손한 말씨의 봄비 온다
먼 산등성이에
상수리나무 잎새에
송홧가루 날려 내리듯 봄비 온다
네 마음에 맴도는 봄비 온다
머윗잎에
마늘밭에
일하고 오는 소의 곧은 등 위에
봄비 온다
어진 마음의 봄비 온다
 
54. 봄비 / 경규민
밤새
갈증을 풀어 주는
봄비가 축축이 내렸다
 
너무도 기다렸다는 듯
클라이맥스 열정으로
쏟아낸 흔적들
여기 저기
파릇파릇
울긋불긋
 
봄비
봄비는
음양과 자연을 接木시키는 마중물인가 보다
 
 
55. 봄비 / 장인성
봄비가 오네
소리 없는 가랑비가
먼 산은 흐리고
소풍 길 드문드문 한가로운 날
이런 날 누군가
불쑥 불러주는 이 없을까
누가 온 적도 없지만
누군가 기다려만 지는
인적 드문 한가로운 날
가만가만 소리 없이
봄비만 나리네.
 
 
56. 봄비2 / 노향림
빠르게 흐르는 빗줄기
라일락이 밥알 같은 꽃을 매단 주위는
온통 환했다
묵은 김칫독을 들어낸 구덩이에는
겨울의 긴 뿌리가 언 채로 드러났다
채 녹지 않은 꿈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끌려나온 흔적 이름 없는 나무들의 저 빈 가지 끝
숱한 얼굴 속 어디에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의
내가 있는지 사진첩을 펼친 듯 봄밤이
환히 어두워져 온다
 
 
57. 봄비 / 정연복
아직은 꽃샘추위
심술이 끝나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이슬같이
내리는 비.
긴긴 겨울 동안
목말랐던 빈 가지들
단비에 촉촉이 젖어
생명의 기지개를 켜네.
안으로 몰래몰래 키웠던
연둣빛 새싹
며칠 내로 돋아나리
예쁜 꽃도 피어나리.
수줍은 새색시같이
조용히 찾아온
봄비 한줄기에 온 땅
온 세상에 희망이 넘치네 .
 
 
58. 비 오는 날 / 천상병
아침 깨니
부실부실 가랑비 내린다.
자는 마누라 지갑을 뒤져
백오십 원을 훔쳐
아침 해장으로 나간다.
막걸리 한 잔 내 속을 지지면
어찌 이리도 기분이 좋으냐?
가방 들고 지나는 학생들이
그렇게도 싱싱하게 보이고
나의 늙음은 그저 노인 같다
비오는 아침의 이 신선감을
나는 어이 표현하리오?
그저 사는 대로 살다가
깨끗이 눈감으리오.
 
 
59. 비 오는 날에 / 나희덕
내 우산살이 너를 찌른다면, 미안하다
비닐 우산이여
나의 우산은 팽팽하고
단단한 강철의 부리를 지니고 있어
비 오는 날에도 걱정이 없었거니
이제는 걱정이 된다
빗속을 함께 걸어가면서 행여
댓살 몇 개가 엉성하게 받치고 선
네 약한 푸른 살을 찢게 될까 두렵구나
나의 단단함이 가시가 되고
나의 팽팽함이 너를 주눅들게 한다면
차라리 이 우산을 접어 두겠다
몸이 젖으면 어떠랴
만물이 눅눅한 슬픔에 녹고 있는데
빗발이 드세기로
우리의 살끼리 부대낌만 하랴
비를 나누어 맞는 기쁨,
젖은 어깨에 손을 얹어
따뜻한 체온이 되어줄 수도 있는
이 비 오는 날에
내 손에 들린 우산이 무겁기만 하다
 
 
60. 우산 속으로도 비 소리는 내란다 / 함민복
우산은 말라가는 가슴 접고
얼마나 비를 기다렸을까
비는 또 오는 게 아니라
비를 기다리는 누군가를 위해
내린다는 생각을 위하여
혼자 마신 술에 넘쳐 거리로 토해지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정작 술 취하고 싶은 건
내가 아닌 나의 나날인데
비가와 선명해진 원고지칸 같은
보도블록을 위를
타인에 떠밀린 탓보단
스스로의 잘못된 보행으로
비틀비틀 내 잘못 써온 날들이
우산처럼 비가 오면
가슴 확 펼쳐 사랑한번 못해본
쓴 기억을 끌며
나는 얼마나 더 가슴을 말려야
우산이 될 수 있나
어쩌면 틀렸을지도 모르는 질문에
소낙비에 가슴을 적신다
우산처럼 가슴한번
확 펼쳐보지 못한 날들이
우산처럼 가슴을 확 펼쳐보는
사랑을 꿈꾸며
비 내리는 날 낮술에 취해
젖어오는 생각의 발목으로
비가 싫어 우산을 쓴 것이 아닌
사람들의 사이를 걷고 또 걸으면
우산 속으로도 빗소리는 내린다
 
[출처] ☔️ 봄비 시(詩) 모음 60選|작성자 kim seong g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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