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興福寺断碑(흥복사단비) 임서

by 까마귀마을 2024. 3. 2.

 

 

 

오늘 자습은 왕휘지의 흥복사단비를 임서 하였습니다.

흥복사단비는 흥복사의 승려인 대아가 왕휘지의 글중 행서를 집자하여 세운 비석의 글입니다. 비석 내용은 검색하여도 검색되지 않아 추후 올리겠습니다.

 

왕희지, 흥복사단비( 王羲之. 興福寺断碑)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는 흥복사(興福寺)의 승려였던 대아(大雅)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들에서 행서(行書)를 집자(集字 : 글자를 모음)하여 세운 것으로、집자성교서(集字聖教序)와 함께 손꼽히는 집자비(集字碑)의 대표작이다.
본래 서안성(西安城) 안의 흥복사(興福寺)에 세워져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망실 되었다가, 명나라 만력(1573-1620) 말년에 남쪽의 공호(空濠)를 준설하다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잘라져서 아랫부분, 하반부의 약 93×126cm의 잔비 밖에 없었기에  흥복사단비(興福寺断碑)라고 칭해진다. 출토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자묘(孔子廟)로 이치되었으나, 지금은 서안의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 제2실에 열치되어 있다. 
비문은 35행, 행내의 자수는 22~25자, 전문 약 730자를 새기고 양측에는 화려한 당초문양과 선인기승(仙人騎乘)의 서수(瑞獸)를 선각(線刻)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비주(碑主)의 매장에 가까운 개원(開元) 9년(721)으로 추정된다. 비두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명은 확실하지 않다. 십 수종의 별칭 중에는 오문(吳文)을 덧씌운 호칭이 많았다. 
그 이유는 청대의 금석학자인 옹방강이 비문의 첫부분을 판독하면서 '惟大將軍吳公諱文'(유대장군오공휘문)이라 석문을 달았는데, 이는 '惟大將軍矣. 公諱文'의 ' 矣(의)자를 상부를 ㅁ'로 잘못 보아 吳(오)자로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흥복사단비라고 칭한다.
비문의 제2행에 '大雅, 集晉右軍將軍王羲之行書勒上(대아 집진우군왕휘지행서늑상)'이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 역시 집자성교서와 같은 집왕서비(集王書碑)의 하나이다. 집자성교서(672)보다 50년 뒤에 조성되었는데, 이 사이에 오광벽(吳光璧)이 집자한 건복사 삼문송성비(建福寺三門頌成碑)(717), 행돈(行敦)이 집자한 회소율사비(懷素律師碑)(718)가 있다. 
이처럼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집자성교서 이후 원대에 걸쳐 20종 정도가 금석서에 열거되어 있다. 
집서자인 흥복사의 대아(大雅)와 그 집서(集書)의 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대아(大雅)는 그 자체만으로 이름이 될 수 없고 이름 뒤에 붙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이 두 글자 앞에 흥복사에 거주하며 집서를 담당했던 스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비를 가장 먼저 거론한 명나라 조함은 왕희지의 진적에서 직접 집자한 것이 아니라 집자성교서에서 모집(摹集)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 서품에 대해서는 집자성교서와 우열을 다투고 있으나 훼예는 서로 반반이다. 청대의 학자 고상선(郭尙先)은 집자성교서는 천고의 걸작이지만 글자와 글자가 지나치게 붙어 자유로움을 해치고 있는 것이 결점이며, 이 비는 행을 세움에 융통성이 있어 고목(古穆)한 정취를 갖추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 라고 평하였다. 또한 집자성교서가 왕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는 인정하면서, 요컨대 당인(唐人)으로서 회인(懷仁) 자신의 해석이 들어간 서법이라고 말한 것은 탁견이다. 일본의 西林昭一는 집자성교서는 원래의 글자를 비교적 충실하게 본뜨고자 유의하고 있으나, 흥복사단비는 집자에서 진인(晉人)의 여유 있는 풍운(風韻)과 폭 전체의 기맥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
당태종의 왕희지에 대한 열정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는 왕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대의 초당삼대가는 왕서에 대한 치밀한 해석력으로 해서의 전형을 확립하고, 나아가 왕희지 진적을 통한 집자가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집자성교서'와 더불어 '흥복사단비'는 진적에서 느낄 수 없는 굳건한 필력과 골기를 체득할 수 있는 집자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글 : 三道軒정태수)

 

왕희지(王羲之 :307~365)

중국 동진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이며, 우장군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世人이 王右軍이라고도 불렀다. 오늘 날의 산둥성(山東省) 린이 현인 낭야 사람이었으나 회게산음에 옮겨가 살았다.동진 왕조 건설에 공이 컸던 王導의 조카이고, 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째 아들 왕헌지와 함께 二王 또는 義獻이라 불린다.

16세때 치감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 하였다.

처음에는 서진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의 서풍을 배웠고, 뒤에 漢魏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서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량으로 부터 출발하여 유양의 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右軍將軍 및 외내사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에 재략이 있어 은호의 북벌을 간하는 글과, 謝安에게 민정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으나 일찌기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때에 왕술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의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 (영화 11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간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등과 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한평생을 悠悠自適한 생활을 즐겼다.

대표작으로는 해서에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廷經)이 있고, 행서에는 난정서(蘭亭敍),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예로 부터 유명하다. 그 밖에 당인이 집자한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등이 있어서 그의 행서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또 척독집에 보면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請帖) 등이 전하여오나 육필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과는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자기의 관에 같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오는 필적만 봐도 그의 서풍은 고아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왕희지에 대한 일화.

글씨를 처음 배울 때 그의 글씨는 같은 또래와 비교하여 다소 뒤떨어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씨에 열중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태도는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왕희지가 글씨에 열중할 때는 그야말로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다른 학문을 공부할 때, 식사 할 때, 길을 거닐 때, 하루24시간 내내 글씨체의 대소, 구조, 운필(運筆)에 대하여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손으로 옷이나 방바닥에 쓰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옷이란 옷은 모두 달아서 너덜너덜 무지러져 버렸다는 것이다.

어느날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글씨에 몰두하고 있어 가족이 밥상을 차려 들고 서재로 가 보았다. 그런데 서재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희지는 글씨에 정신이 팔렸음인지 자신의 옷자락을 먹에 묻혀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가족도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다가 밥상을 가지고 왔음을 의식했을 무렵에는 왕희지의 입안은 온통 먹투성이가 되어 있었건 만 왕희지는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곧잘 연못 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의 물로 벼루를 씻었다는데 얼마 후에는 그 연못의 물이 온통 검게 흐려져 그 연못을  묵지(墨池)라 부르게 되었다.

왕희지는 이러한 끈질기고 꾸준한 정신으로 수십 년간의 노고 끝에 마침내 서예의 오묘한 도를 터득하여 서예계의 정상에 올랐다.조야의 모든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묵보(墨寶)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

왕희지는 어느날 회계 산음서 부채를 파는 노파를 만났다. 대나무로 만든 부채가 너무 허술하였기 때문에 부채를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왕희지는 그 부채에 각각 6자씩 써 넣었다. 그러나 노파는 부채를 망쳐놓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왕희지는 노파에게 말하였다.

“이 부채에는 왕희지의 친필이 씌어졌기 때문에 1백 전(錢) 이하로는 절대로 팔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십시오.”

1백 전이라면 당시 시가의 몇 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나 왕희지의 친필이 담겨진 부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

며칠 후 노파는 도 왕희지에게 글씨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완희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왕희지는 이미 장강 이남에서는 명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이 글씨 또한 당대에서조차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산음땅의 어떤 도사는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는 열렬한 팬이었으나 그 글씨를 손에 넣기가 어떻게나 어려웠던지 우선 한 쌍의 흰 거위를 기르기를 시작하였다. 왕희지가 흰 거위를 좋아 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회계 땅에 의지할 곳 없는 어느 노파가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거위의 울음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소문이 자자하였다.왕희지가 제자로 하여금 그 거위를 사려 하였으나 노파는 팔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왕희지는 그 거위를 가져가지는 못할망정 한번 구경이라도 해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친척과 벗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노파의 집을 찾아갔다.

노파는 왕희지가 친히 찾아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였다. 자기집을 찾아온 명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거위를 잡아 대접하기로 하였다. 왕희지는 한번 구경삼아 찾아 왔을 뿐인데 문제의 거위가 냄비 속에서 요리로 둔갑하고 잇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며칠을 두고 애석해 했다 한다.

산음 땅의 어느 도사가 기르는 거위는 그 색깔이 희고 살집도 좋았다. 이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배를 타고 도사의 집을 찾아가 그 거위를 흥정하였다.

도사가 말하기를,

“ 이렇게 훌륭한 거위를 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도덕경(道德經)을 베껴 주셨으면 합니다만.”

거위를 몹시 좋아 했던 왕희지는 대뜸 승낙하고 흔연히 붓을 들어 즉석에서 도덕경을 베껴주고 거위를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

왕희지의 글씨는 수없이 남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난정서(蘭停序)이다. 난정은 회계 산음에 있는 유서 깊은 명소로 산수가 아름답고 대나무 숲이 유명하였다.특히 난정 부근에는 거울 같은 시냇물이 흘러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구력3월3일은 이 지방 고유의 명절이었다. 353년3월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 그 뒤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의 군사(軍師)가 됨)등 41명의 명사들을 난정에 초대하여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시를 짓는 향연을 벌였다.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시냇물 상류에서 술잔을 띄어 내려 보내면 각기 냇가의 돌위에 걸터 앉아 술잔이 흘러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술잔이 자기 앞에 닿으면 즉흥시 한 수를 짓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기로 하였다.

그날 따라 시냇물은 더욱 맑아 보였다, 술잔이 하나 둘 띄워져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술잔이 와 닿기를 기다리던 명사들은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자 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이내 시 한 수를 지어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모두가 당대의 명사들이었기 때문에 벌주를 마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40여 편의 시가 한꺼번에 완성되었다.

이 40여편의 시를 한 책에 모으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기 때문에 이것을 ‘난정서’, 또는 난정집서(蘭停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序)라고도 한다.이 서문은 28행 324자로 이루어 져 있는데 산뜻하고 매끈한 흘림체로 되어 있고 자체가 유려하여 중국 행서(行書)의 절품(絶品)으로 꼽히고 있다.

후세에 이르러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왕희지의 글씨에 매료되어 왕희지의 후손으로부터 ‘난정서’의 필첩(筆帖)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소중히 간직하고 서예가 조모(趙模), 풍승소(馮承素) 등으로 하여금 난정서를 여러 책 베끼게 하여 친족과 측근들에게 하사하였다 한다.

태종은 일생동안  난정서를 매우 소중히 여겨 여러 차례 제사(題詞, 책머리에 그 책에 관련되는 일을 적은 글)를 쓰고, 또 후사에는 부장품으로 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후 태종의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난정서”의 진필은 유실되고 말았다.

왕희지의 행서의 대표적 작품은 이렇게 해서 유실되었지만, 태종의 생존시 왕희지의 글씨를 베끼는 일이 홥발하 추진되었다. 그 결과 장강 이남에서는 이름을 떨치던 왕희지의 글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후 1천여 년에 걸쳐 왕희지의 글씨는 서체(書體)의 정통(正統)으로서 중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의 글씨는 주로 종이와 비단에 씌어졌기 때문에 천 수백 년 동안 보존하기 어려웠으나 청나라 건륭(乾隆,1662~1795) 시대에 이르러 동진 때의 왕희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왕순(王恂)의 필첩이 발견되었다.

왕희지의 필첩은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의 필첩은 ‘중추첩(中秋帖)’, 왕순의 필첩은  백원첩(白遠帖)이라 불렀다. 이 세 필첩은 희대의 진품으로 지정되어 내부(內府)에 특별 전시실을 설치하고 보존 하였으며, 그 전시실을 ‘삼희당(三希堂)’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난정은 관광의 명소로 지정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난정 곁을 흐르는 시냇물과 묵지 연못의 물에는 지금도 그 옛날의 서성 왕희지의 체취가 담겨 있는 듯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왕헌지(王獻之 : 348년~388년)

왕희지의 일곱 번 째 아들로서 여러 아들 중에서 유독 부친의 재능을 가장 많이 이어 받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글씨를 배웠는데 아들들 중에서 가장 재주가 뛰어나서 아버지의 서풍을 이어받아 후에 이왕(二王)으로 불릴만큼 대가를 이루었다.

기상이 뛰어난 서풍으로 젊어서 일찍 이름을 날렸는데 인물 또한 출중하여 동진(東晋)의 간문제(簡文帝)의 딸인 신안공주가 사모하여 황제의 부마가 되었다. 비서랑을 거치며 오흥태수를 거쳐 중서령(中書令 :국가의 사무를 총괄하고 諫諍을 담당한 직책으로 장관급의 고위 관직)의 관직에 올랐다.

왕희지(307~365)는 자식 교육에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고 매우 엄격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헌지(獻之)는 글씨를 잘 썼지만 왕희지는 여전히 그의 공부가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헌지는 자신의 글에 만족해하며 우쭐해 있었다. 그리하여 ‘언제쯤이면 아버지께서 만족해 해실까?’하고 날마다 고민했다.

하루는 아버지를 찾아가 글씨를 잘 쓸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아버지 왕희지가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집에 있는 열여덟 항아리의 물속에 있다. 네가 이 열여덟 항아리의 물을 다 쓰면 자연스럽게 글의 기교와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열여덟 항아리의 물을 다 쓴다는 건 너무 미련한 일이 아닐까?’

헌지는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왕희지가 말을 이었다.

“맞다. 그 방법은 미련해 보인다. 하지만 그 미련한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기초 실력을 닦을 수가 없다.”

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부친이 말한‘미련한 방법’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서예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은 들지만 기초실력을 튼튼하게 연마해야 비로소 능숙해지고 기교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지름길을 찾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연습하였다. 그는 몇 년을 연습하여 집안에 있는 세 항아리의 물을 썼다. 그러자 그의 글씨에 큰 발전이 있었고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 헌지는 자신의 기량을 아버지께 자랑하기 위해 글을 써서 아버지에게 올린 후 평가를 부탁했다.

왕희지는 아들이 쓴 글을 보던 중 ‘太’자에서 점이 빠져 ‘大’자가 된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써온 글씨가 왕희지의 눈에는 아직도 갑갑하고 느슨하여 조예(造詣)가 부족해 보였다. 그는 붓을 들어 ‘大’자에 점을 보충해 넣고는 아들에게 어머니에게 보여드리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어째서 내 글씨가 좋은지 나쁜지 한마디도 안 하시지?’

헌지는 의아해 하면서 자신의 글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왕희지의 부인(당대 명문귀족 치감郗鑒의 딸)은 남편의 영향을 받아 서예를 감상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남편의 글이라면 단번에 알아보는 능력을 가졌다.

아들의 글씨를 자세히 훑어보던 그녀는 남편의 글씨와 차이가 크다고 느꼈다. 다만‘太’자의 점만이 필치가 고아하고 힘이 있어 꼭 ​남편의 필법과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들을 바라보면서 직접 그를 책망하지는 않고 ‘太’자의 점만을 거론했다.

“아들아, 세 항아리의 물을 다 썼는데도 유일하게 ‘太’자의 점만 아버지를 닮았구나.”

헌지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어머니가 가리킨 점은 바로 아버지가‘大’자에 더해 놓은 그것이었다. 순간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헌지는 매우 부끄러워하며 진정으로 학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 후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헌지는 열여덟 항아리의 물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썼으며, 결국 그의 서예 역시 최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인들에게‘二王’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버지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대 서예가가 되었다.

 

 

'나의 취미 생활 > 한문서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春雨 (춘우)봄비  (2) 2024.03.20
禍因惡積 福緣善慶 (화인악적 복연선경)  (0) 2024.03.09
春雨後(춘우후)  (4) 2024.02.28
卜算子, 詠梅 (복산자, 영매)  (4) 2024.02.18
春夜喜雨(춘야희우)  (4) 2024.02.0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