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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春雨後(춘우후)

by 까마귀마을 2024. 2. 28.

 

 

                 春雨後(춘우후) : 봄비 내린 후

 

昨夜一霎雨(작야일삽우) 어젯밤 한 차례 가랑비가 내렸으니

天意蘇群物(천의소군물) 하늘이 만물을 소생케 하려는 것이라.

何物最先知(하물최선지) 어느 것이 가장 먼저 그 뜻을 알랴했더니

虛庭草爭出(허정초쟁출) 빈 뜨락에 봄 풀들이 앞다투어 나는구나.

 

                                    ------孟郊-----

註.

霎(삽): 가랑비. ‘霎霎’은 빗소리를 나타낸다.(一霎雨가 一散雨(일산우)로 된 본도 있다)

 

대동강 얼음이 녹는다는 우수가 지난지도 며칠.  

밤 사이 비가 내린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가는비는 대지를 적시고 겨우내 잠들어 있는 만물을 깨우려 하지만.

아직 바람은 차고 들녁은 황량하다.

그러나 한켠에는 매화가 피고 봄빛이 닿는 양지바른 빈 뜨락에는 연두색 봄풀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며 돋아나고 있다.

봄아!

찬 바람에 얼굴이 시려도 내 너를 기다리며 봄 마중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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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교(孟郊 :751~814)

당조(唐朝)의 시인으로 자는 동야(東野), 호주(湖州 )무강(武康: 지금의 저쟝성(浙江省) 덕청德淸) 사람이며 맹호연(孟浩然)의 손자이다. 현존하는 시가가 5백여 편인데 단편인 오언고시로는 많지만 율시는 한 편도 없다. 대표작으로는 유자음(遊子吟: 나그네의 노래)을 꼽는다. 어려서 가정이 빈한하여 여러 곳을 주유했고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마흔여섯(일설에는 45세) 늦은 나이에 비로소 진사가 되었다. 정원(貞元 17년 801) 율양위가 되었는데 일보다는 시 짓는 데 열중하여 감봉을 당하기도 했다. 한유(韓愈)는 그런 맹교를 일러 ‘산한율양위酸寒溧陽尉(군색한 율양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맹교가 세상을 뜨자 오랜 벗인 장적(張籍)이 정요선생(貞曜先生)이라는 사시(私諡: 학덕이 높은 선비이기는 하나 지위가 없어서 나라에서 시호(詩號) 내리지 않을 , 일가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지어 주던 시호. )를 지어주었다. 한유의 복고주의에 동조하여 작품도 악부나 고시가 많았는데 외면적인 고풍 속에 예리하고 창의적 감정과 사상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식(蘇軾)이 ‘교한도수(郊寒島瘦 : 맹교는 춥고 가도는 여위었다))’라고 말한 이후, 평론가들이 맹교와 가도(賈島)를 병칭하여 고음시인(苦吟詩人) ( 苦吟 : 고심하여 시가(詩歌)를 지음 )의 대표로 불렀다. 맹동야시집(孟東野詩集) 10권을 남겼다.

 

孟郊의 대표작이라는 遊子吟 (유자음)을 아래 올립니다.

 

           遊子吟 (유자음) 나그네의 노래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 자애로운 어머님 손에 들린 실은,

遊子身上衣(유자신상의 ) 길 떠날 아들 몸에 걸칠 옷이라네.

臨行密密縫(임행밀밀봉)  떠나기 전에 꼼꼼히 꿰매시며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  자식이 더디 돌아올까 걱정이시네.

誰言寸草心(수언촌초심)  뉘라서 말하리오 한 치 풀 같은 마음이

報得三春暉(보득삼춘휘)  석달 봄빛 같은 어머님 사랑 보답하기 어렵네.

 

註.

遊子(유자) : '길 나선 사람'의 뜻.

吟(음) : 읊음. 遊子吟은 '나그네의 노래'와 같은 뜻. 길 나선 나그네가 어머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이다.

密密(밀밀) : 촘촘한 모양. 꼼꼼한 모양.

縫(봉) : 꿰매다.

誰言(수언) : 뉘가 말하리오 (難將으로 되어있는 본도 있음)

寸草(촌초) : 한 치 되는 풀, 微力한 자식에 비유했음.

三春(삼춘) : 맹춘(孟春)·중춘(仲春)·계춘(季春)의 봄 3개월.

暉(휘) : 햇빛.

 

遊子吟은 맹교가 늦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 율양현위로 부임했을 때 지은 작품으로 시인 자신이 “어머니를 율수에서 맞이하면서 지었다"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율양(溧陽)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의흥현(宜興縣) 서쪽의 지명이다. 먼 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깁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자식을 향한 모든 어머니의 가없는 사랑을 노래한 이 작품은 천고의 명편으로 회자되고 있다. 마지막의 3.4구에서 촌춘초(寸春草)와 삼춘휘(三春暉)란 구절을 통하여 한치되는 봄풀을 삼춘의 긴 봄빛에 비유하며 모자의 은정(恩情)을 절묘하게 읊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된 조선초기 문신인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의詩 遊子吟 (떠도는 이의 노래)도 같이 올립니다.

             遊子吟(유자음) 떠도는 이의 노래

遊子久未返(유자구미반) 객지에 떠도는 자식 돌아가지 못하니

弊盡慈母衣(폐진자모의) 어머니 주신 옷도 다 헤어져 버렸구나.

故山苦遼邈(고산고료막) 고향은 아득하고 멀어 마음 아파

何時賦言歸(하시부언귀) 어느 때에나 고향 돌아갈 노래 지어보나.

人生不滿百(인생불만백) 인생은 백 년도 되지 못하니

惜此西日暉(석차서일휘) 오늘 서편으로 지는 햇빛을 아까와하노라.

 
 

집 멀리 떠나 여태 돌아가지 못하고

어머니께서 해주신 옷이 다 해졌네.

고향 산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있어

겨레에게 돌아갈 날이 어느 때일지

인생은 백 년도 채우지 못하는데

이 석양빛이 못내 애처롭구나.

 

위 시는 조선 초기 문사인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1345~1398)의 ‘길 떠난 자식이 어머니를 그리며 읊다(遊子吟·유자음)’로, 그의 문집인 ‘춘당유고(春堂遺稿)’에 있다.

멀리 있어 고향의 어머니를 모시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넷째 구의 ‘언귀(言歸)’는 ‘시경(詩經)’ 소아 ‘황조(黃鳥)’의 “언선언귀(言旋言歸) 복아방족(復我邦族)”에서 가져왔다. 즉 “곧바로 돌아가서 우리 겨레에게 돌아가련다”는 뜻이다.

​변중량은 고향을 떠나 너무 멀리 와 있음을 밝힌다. 그는 1394년(태조 3) 전중경(殿中卿)으로 있을 때 병조정랑 이회 등과 함께, 정권·병권이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게 다 맡겨진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가 파직돼 영해(寧海)로 유배되었으나 곧 복직됐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외교문서에 쓰인 글자를 문제 삼아 책임자들을 보낼 것을 요구하자 그는 동행하기를 자진했다. 변중량은 고향을 떠나 천리 먼 곳에서 위 시를 지었다. 인생은 백년을 살지 못하건만 어쩌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옷이 다 해졌을 정도로 오래 떨어져 있어야 되는지 서쪽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보며 어머니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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