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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욥기를 읽고...

by 까마귀마을 2024. 2. 26.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구약성서의 욥기는 믿고싶어하는, 보고 싶어하는 측면으로만 독해되는 텍스트 중 하나이다.

욥기의 주 내용은 여호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화와 복을 주관하는 전능한 신인데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의 형통함을 방관하는가? 과연 여호와는 공의롭고 전능한가?  이세상의 도덕적인 질서를 관장하는 신인가? 하는 질문을 욥기를 통해 대답하고있다. 욥이라는 이름의 순전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한 의로운 신자가 갑자기 고난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욥기는 BC 6~5세기에 씌어 진것으로 여겨지며 욥의 시대적 배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의 조상시대 라는 견해, 히브리 지혜 문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솔로몬 시대라는 견해,  바빌론유수 이전 또는 이후 무렵이라는 견해까지 매우 다양하여 추정이 무의미한 수준이다. 저자는 이스라엘 밖의 산문체 고대 전설을 틀로 삼아 자신의 시들을 문학적으로 배열하였다. 욥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라는 희망을 말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은 악한 짓을 했으니까 벌받는다는 인과응보식 고난의 개념은 성경의 관점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욥기의 시작은 사탄이 여호와에게 내기를 걸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느날 갑자기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들이 몽땅 죽고, 자신은 병을 얻어 온 몸에 종기를 뒤집어 쓴 비참한 몰골로 “잿더미” 위에 앉아있는 신세가 된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욥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지만 담담히 어려움을 받아들인다. 어려움에 처한 욥에게 헛똑똑이 친구들이 찾아와서 신학적 충고를 한다. 친구들이 갖고 있는 신학이란 게 지금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인과응보에 기반한 논리였다.

전에 어느 집사들이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그 사람, 예수를 믿는데 왜 강도를 만나?" "예수 헛 믿은 거지 뭐" "그러게 말이야, 아 예수를 믿는데 왜 강도를 만나냐고?"(참으로 교회생활, 아무 생각없이 아멘, 믿습니다의 예수쟁이 할줌마들 발상이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병에도 안걸리고 교통사고도 안난다 말인가?) 이 한국 신자들의 생각과 똑같은 논변을 욥의 친구가 펼친다. 예를 들어 한 친구의  말은 다음과 같다.

 

생각하여 보라 죄없이 망한자가 누구인가? 정직한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데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기 4장 7-8절 한글개역성경)

 

친구들은 고통 속에 있는 친구를 향해, 처음에는 일주일간 말없이 울면서 욥과 같이 있어주었지만,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며 절규를 할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래도 네가 뭘 잘못한게 있으니까 합당한 벌을 받은게지 어서 반성하고 다시 착하게 살아" 라며 위의 집사들이 나눈 대화처럼 인간이 받는 고난의 개념을 예수를 믿지 않아 또는 단순히 죄악에  따른 벌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니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필시 무슨 잘못을 저지른 탓이므로 그에 대해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로 믿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욥은 한사코 그런 주장을 거부한다.

자신의 의로움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식으로 하느님의 뜻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다소 장황하게 논변이 이어지는데, 결론적으로 욥은 결국 하느님과 대면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받게 된다. 잘 나가고 못 나감을 하느님의 뜻과 바로 관련시키는 천박한 논리는 지적 교만으로 판명난다.

해방신학자로 유명한 구띠에레스(페루의 가톨릭 사제)는 이 책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과응보 (현세적 인과응보만이 아닌)의 세계는 하느님이 거처하시지 않는 세계이다. 그곳은 기껏해야 하느님이 방문하시는 정도의 세계이다. 주님은 “내게 주면 네게 주겠다”는 사고방식에 얽매여 거래를 하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 인간의 모든 사업은 제 아무리 가치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은총을 당연한 권리처럼 요구할 수 없다. 만일 그럴 수 있다면  은총은 이미 은총이 아니게 된다. 바로 이것이 욥기가 제시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구띠에레스, 욥에 관하여, 211-212쪽.)

 

욥기는 이런 심오한 주제를 문학의 형식에 담아놓은 걸작이며 아름다운 글이다. 그러나 구띠에레스가 정의한 욥에 대한 이 글을 한국의 신자들이 읽는다면 신앙의 기반을 현세적  축복을 믿으며 강조하는 경향은 사라지지 않을까? 아, 그러나 그건 꽤나 달콤한 생각이다. 옛날에 우연히 어느 보수적인 신자와 욥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가 욥기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지목한 것은 욥기의 가장 마지막 장이었기 때문이다. 대면 후 하느님은 욥의 고난에서 회복시켜 준다. 그가 이전에 지녔던 것의 배로 되돌려준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고 위로하고 각각 금 한조각과 금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사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욥기 42:10-13절, 개역성경)

 

그가 욥기로부터 얻은 교훈은 하느님은 믿는 자에게 두배의 축복을 내려주신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죽인 새끼들까지 두 배로 많이 낳아서 보상 해준다는 것이다. 아, 이보다  욥기의 주제에서 동떨어진 결론이 또 있을까? 핵심 주제는 완전히 흘려보내고 완전히 인과응보 교리의 텍스트로 읽어내는 이 예상치 못한 독서에 나는 망연자실 했다.

그리고 아무죄도 없이 여호와와 마귀의 내기로 떼죽음을 당한 욥의 아들들 하인들은 어떻게 해석하란 말인지? 한 인간의 생명이 우주와 같다고 했는데. 아무리 자식이나 하인이  재산의 일부같이 여겨지던 시대에 기록 되었다 해도 사람의 목숨을 키우는 가축처럼 여기는 내용이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라는 기독교의 정경이라는 것도 어울리지 않지만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으면 두배로 준다는 축복이 물질을 기준을 삼는 현세 중심의 지극히 유대적인 신앙의 척도가 예수의 삶을 본 받아야 할 기독교인의 신앙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성서의 한글자 한글자를 소중히 하는 분께는 실례가 되지만 욥기의 마지막 장은 우리 몸의 맹장처럼 붙어있는 부분이다. 글 전체 주제와 상관 없을 뿐더러 방해가 되는 내용이다.

성경 학자들은 이 부분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이 후대에 추가된 내용이라고 본다. 주제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는 편집자가 이 부분을 덧붙여 개악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입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부분이 문학적 형식 때문에 갖추어진 것으로 본다. 욥기는 액자구조이다. 처음에 사탄과 하느님의 내기, 그리고 마지막에 원상 복구라는 설화를 액자로 하고 그 안에 신학적 사유를 담은 작품이다. 그래서 서론과 결론 부분은 본문과는 다른 서술적 형태를 띄고 있다.

이야기 마지막에  원상복구가 되는 문학 구조는 고대 서남아시아 문학에서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것이다. 유명한 예로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있다. 그러므로 결론의 내용은 “그는 행복하게 잘 살다 죽었답니다”라는 이야기 형식이지 주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 마지막 부분의 축복이 욥기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질병이나 고난, 역경은 믿음이 부족해서, 또는 믿지 않아서, 죄를 지어서,
일어나는 인과응보이 아니라는 이 사실이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사실들로 신자들을 설복시킬 재주가 있다면 또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기독교  아니 개신교는 변화가 있을 것이다.(올겨온글 일부보완) https://religio.tistory.com/854 [종교학 벌레:티스토리]

 

 

욥기 제 38장

욥에게 나타난 여호와가 욥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자신이 창조한 세상이 어떠한 지혜와 섭리로 이루어 졌는지 장엄하며 서정적이며 심오한 문체로 설명한다, 욥기를 읽은지는 오래 되었지만 38장은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 발췌하여 올립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어는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어는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너는 그의 재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네가 아마도 알리라 네가 그 때에 태어났으리니 너의 햇수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광명이 어는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는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 붙느니라.

네가 묘성(황소 자리의 밝은 별들)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게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그것들이 굴에 엎드리며 숲에 앉아 숨어 기다리느니라.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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