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도는 따발총을 쏘듯, 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따발총은 부흥 강사들이 나불 나불 쏘아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역겨운 공해다.
그들을 닮아서는 안된다.
길게, 많이, 기도하려는 것과 유창하게 기도하여 자랑하려는 중심의 기도는 바리새인같은 위선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라.
그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언제나, 세상의 찬사와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더 사모하는 자들이다.
청중에게 설교하는 기도,
하나님을 설득하고 가르치는 기도,
이런 기도는 이미 기도가 아니다.
이런 기도들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
자기 뜻을 드러내기 급급한 기도라면 차라리 안하는 것만도 못한 기도이다.
이것 저것 원하는 것들을 줄줄이 나열하지 말라.
하느님은 내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또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하느님은 나의 희망 사항을 들어주는 개인 비서가 아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은 도깨비 망망이가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버지의 뜻에 기도의 초점을 맞추라.
하느님을 변화 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변화 하는게 기도이다.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루살이가 이것 저것 욕심껏 가진들 무엇하리.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일 뿐,
악취나는 쓰레기더미로 자신과 자기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죄만 더할 뿐이다.
아버지는 자녀가 잠시 빌려, 갖고 노는 장난감에 그 영혼까지 갈아 넣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곧 두고 가야 할, 세상 것에 올인 하기를 원치 않는다.
수집한 그 재물과 함께 멸망하기를 원치 않는다.
진실한 기도는 자기 반성이며 조용한 성찰이다.
겸비한 마음의 태도다.
입을 다물고 (마음의)귀를 여는 것이 참된 기도다. 참된 기도는 묵상이요 명상이다.
묵상하고 명상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중언부언 천 만 마디 주절대는 기도보다 신 앞에서 침묵하는 태도가 훨씬 더 고귀하다.
전자는 똥이라면 후자는 금이다.
바리새인의 유창하고 그럴듯한 기도보다 세리의 어눌하고 버벅대는 기도가 더 값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리의 기도는 말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단발성 기도행위보다 그 사람의 평소, 마음상태와 마음의 태도, 마음 중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저 일회성 기도나 일회성의 말이 아닌 평소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기도가 된다.
그러나 저주받는 자들의 중심은 다르다.
"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겔2:4)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렘6:15)
저주받을 자들, 심판받을 자들이 하는 짓은 미가서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너희도 양심은 있을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교인들)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십일조와 각종 헌금명목으로 남의 가산을 삼키고)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충성봉사 명목으로 부교역자나 전도사들, 신도의 노동력을 상습적으로 착취하면서도 댓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도다)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삯꾼들은)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돈을 주면 태도가 확 바뀜)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신도들을 먹잇감으로 보고 교회 독식에 방해가 되면 배도자로 정죄하며 물고 뜯고 심판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운다고 자처하며 G-ral한다.)
마태복음 23장에서도 나오지만 이들 바리새인들은 그 중심이 뻔뻔하고 강퍅하다.
밥 먹듯이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거만하고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특징이 있다.
백 만 마디 성경을 주절대는 것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더 값지다.
백 만 번의 습관적인 예배보다 하루 하루 반성하는 삶이 더 낫다.
전자는 저주받을 바리새인이 하는 짓이지만 후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다.
천 만 번의 제사보다 중심의 진실함이 더 고귀하다.
중심이 간교하고 더러운 자들의 예배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십일조 안내면 저주받는다"는 자들...
https://www.youtube.com/live/XIYJ3Pv8l8g?si=fChipUTPnoI2nQRb
동영상에 나온 삯꾼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은 거기서 거기, 도찐개찐.
신도 착취하는 가증한 짓을, 하나님의 뜻인냥,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습적으로 당당하게한다.
신도를 등쳐먹고, 뜯어먹고, 발라먹고, 삶아먹고 볶아먹고 고아먹으면서 주의 일을 한다는 자들이다.
이들은 응답받지 못한다.
이들이 응답을 받는다면 하나님으로 위장한 어둠의 영으로부터 오는 응답이요, 더 깊은 속임수와 완전한 미혹으로 유도하기 위한 능력과 은사와 역사일 뿐이다.
간교한 자들, 돈에 눈 먼 자들과 탐심과 육욕에 빠진 자,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결단코 거룩한 영과 교통할 수 없다.
서로 의식파장과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둡고 더러운 그들 파장은 미혹의 악령과 하나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부르나 그들이 실제로 섬기는 건, 악령이요, 악마다. 예배당에 앉아서 사랑을 노래하는것보다 삶속에서 상대를 더 배려하는 것이 더 낫고 큰 소리로 사랑을 설교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존중하듯 상대방을 존중하려는 일상이 더 낫다. (글 : 카페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에서 옮겨옴)
'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를 읽고... (4) | 2024.02.26 |
---|---|
기독교 용어의 뜻 (2) | 2024.02.21 |
켈수스, 안정복의 기독교 논증 (2) | 2024.02.13 |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무엇이 같고 다른가 (2) | 2024.02.11 |
당신이 믿는 신은 누구인가? (2) | 2024.02.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