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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켈수스, 안정복의 기독교 논증

by 까마귀마을 2024. 2. 13.

"켈수스"

 2세기 로마에서 활동한 철학가로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의심하고 기독교를 비판한 최초의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켈수스의 출생과 이력등 자세한 행적은 검색을 통해서는 알수없었고 동명의 다른 이름의 켈수스만 검색되었다. 켈수스에 대해 올려진 글들에 의하면 그는 로마 혹은 알렉산드리아 인으로서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단지 그가 쓴 책 "참된 말씀 Λόγος Ἀληθής"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를 알수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은 흔히 영어로 The True Word로 번역 되었다.

켈수스는 기독교에 대하여 총체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비판을 시도했다. 켈수스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와 상식을 다 동원해서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가 쓴  참된 말씀이란 책은 소실되었고 이 책에 대한 반박문으로 당시 교부 "오리게네스"(오리겐)가 자신의 저서 "켈수스에 맞서(콘트라 켈숨 Contra Celsum)"에 끌어다 쓴 25만 단어로 된 장대한 발췌문 속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켈수스의 사상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서 나왔을 만큼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을 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 할만큼 경솔하지 않았고,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목조목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했을 거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데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 했을리 만무하며,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오리겐의 반박문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보면, 켈수스는 구약과 신약, 그리고 유대 역사와 기독교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보여주고, 오리게네스 시대에 거의 완전히 사라진 두 영지주의 종파(오피테스와 시몬교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때로는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을 혼동하기도 했다.
켈수스는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불신했다.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면 그는 그리스 철학, 혹은 이성의 판단으로 기독교의 교의를 판단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특히 그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회적 신분의 문제를 가지고 기독교인들은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매도했다. 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각종 학설과 풍자, 그리고 상식을 다 동원하여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스스로를 벽으로 막고 인류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는” 집단으로 보았고, 기독교와 기독교 교리를 비판하고 조롱했다. 심지어 그는 일부의 유대인들이, ‘예수의 아버지는 실제로 판테라라는 로마 군인’이라고 말했다고 조롱했다. 또 예수의 기적에 대해 언급하면서 ‘예수 마법(γοητεία)’으로 기적을 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상상을 터무니없으며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기독교 저작물들이 오류, 모순, 위조로 넘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 신화와 역사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리를 반박하였다.

켈수스의 삶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별로 없다. 그는 아마도 알렉산드리아나 로마에 살았을 터이며, 로마인이거나 그리스 문화에 동화된 유대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예의 책을 CE(공동연대) 178년쯤에 썼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도 박해가 심해지던 때였다. 기독교도는 그의 책을 두고 이교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켈수스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예리하고 최고의 교육을 받은 반대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이후의 많은 기독교 비평가는 그의 주장들을 끄집어내어 더 높은 수준으로 다듬어 나갔다. 그는 또한 예수의 역사적 존재에 의문을 표명한 최초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책은 기독교와 고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사상은 심오하지는 않았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Voltaire)가 사용한 기독교 비평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서 가져갔을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켈수스는 다양한 논증으로 그리스도교와 낱낱의 기독교리를 물리쳐 없애려고 애를 쓴 철학자였다. 그는 기독교의 자체의 모순과 수상쩍음을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우주론적이고 종교철학적인 고찰을 통해 그는 성경의 반이성적 바탕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의 역사적이고 역사 철학적 상론(詳論)은 성경의 역사관과 정면으로 부닥치며 기독교를 문화적 해체 과정의 끝물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비판의 또 다른 중점은 기독교도들이 교육에 적대적이고, 속이 좁으며, 시민 의무의 이행을 퉁기고, 저들만의 분리를 통해 국가의 존속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비난이었다. 그는 진리의 독점적소유 주장과 다른 종교에 대한 냉담한 거부는 사회의 유대관계를 서서히 무너뜨린다고 보았다. 

 
 
 
 
오리겐의 반박문을 통해 켈수스의 논증을 알아봅니다.

유대인과 기독교도는 혁신과 명망에 대한 병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공통된 민족 고대의 슬기에서 벗어났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옛 지식을 조각조각 위조하더니 기독교도도 지지리 어긋나고 주변에 늘린 신화와 헬라 철학을 모방한 가르침을 끌어들였으나, 사실은 조금도 새롭지 않았고 단지 오해와 의도적 미혹에서 비롯된 부조리에 지나지 않았다. 

유대교의 창시자들에겐 그래도 실제적인 지식이라도 있었다. 이는 이집트인과 페르시아인과 같은 민족들이 지켜 온 오래되고 귀중한 인류 지식의 보고 덕택이다. 그 이후에 나타난 기독교도들은 유대인 전통을 깡그리 왜곡한 바탕에 플라톤의 사상을 닥작닥작 보탰는데, 이조차도 잘못 이해하고 그리하였다. 그 결과 두 종교는 맞서는 처지가 되면서 다툼이 불거졌다. 유대인과 기독교도는 그들이 믿는 메시아, 이른바 인류의 구원자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독교의 도드라진 점을 들라면 끊임없는 신학적 다툼이다. 기독교가 지독히 종파적인 공동체로 따로 분열된 것은 수백 년에 걸친 분열 과정의 마지막 단계이다. 처음에 유대인이 이집트인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그다음에 유대교에서 기독교의 분리 사태로 이어졌다. 결국에 이 분열 충동은 신흥 신앙공동체 자체를 사로잡았다. 강이 바다로 흘러들 듯 기독교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기독교도 사이에 불일치의 유행은 불가피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반란이 기독교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예수 출생에 대한 진술은 복음서 마다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는 가난한 육체 노동자인 목수 아내의 아들로 그려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유대 왕족이며 가계도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단다. 그의 이른바 고귀한 기원은 뻔뻔스러운 날조다. 

 

켈수스는 예수의 숫처녀 탄생은 그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간통이 들통난 다음에 몰래 혼외 아이를 낳았다는 전설을 인용한다. 그의 아버지는 판테라라는 로마 군인이었다. 숫처녀의 출산이라는 이야기는 이를 덮으려고 지어낸 것이다. 전설 자료는 랍비 문헌에서도 예수에 대한 분명한 언급 없이 탈무드에서 또 다른 꼴로 전승된다. 켈수스가 끌어다 쓴 갈래는 반기독교 문헌에서 가장 오래된 증거다. 이교도 철학자의 묘사가 랍비 문헌의 자료 수용과 어떻게 얽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통의 두 갈래에 공통된 유대적 출처에 대한 가정은 그럴듯해 보인다. 아무튼 켈수스가 알린 전설은 기독교에 반대하는 유대인의 논쟁에서 비롯했을 터이다. 가장 낮고 가장 창피스런 신분에서 유래했다는 가정은 신성 기원설을 까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보였다고 하는 기적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독교도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없다. 기적은 되레 그가 마법사로 활동했다는 근거다. 기적을 믿든 안 믿든 그 바탕은 사람을 홀리게 하는 눈속임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남다른 존엄성을 증명할 수 없다. 미래에 꼬드기는 무리가 나타나 기적을 보일 것이라고 예수가 예언했을 때, 그 자신이 이미 이 점을 인정한 터이다. 

 

예수의 나타남과 운명에 대한 증거로 기독교도가 끌어대는 예언들은 믿을 수가 없다. 똑같은 기독교도가 (이교도) 신탁 예언의 신성한 기원은 문제 삼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예언은 덮어놓고 믿으면서도 다른 문화권에서 나온 예언은 그렇지 않다고 함은 이해력 부족이다. 

 

 기독교도는 유대인의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은 기독교도들이 성경을 날조했다고 말하고, 기독교도는 유대인이 성경을 날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훨씬 더 오래되고 슬기로운 그리스인들의 글보다 유대인의 글을 더 믿어야 할까?

 

 기독교도는 단일하거나 명확한 성경이 없고 각각 떠받드는 여러 다른 성경이 있다. 그들 중 몇몇은 참된 복음서는 네 개뿐이라고 말하고, 몇몇은 더 많은 복음이 있다고 말하고, 또 몇몇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을 물리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서로 차이를 보이는 여러 다른 번역본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도 중에 바울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예수의 몇몇 가르침을 들은 후에 자기 자신의 종파를 창시하려고 그 자신을 사도라고 불렀던 범죄자이자 악한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따르게 하려고 세상의 슬기를 업신여기고 어리석게 여기라고 가르쳤다.

 

그는 사도가 아님에도 스스로 사도라고 불렀다. 그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사람이었고 자신을 연설가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수다쟁이였다. 그는 유대교 경전을 아는 척했으나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자주 잘못되게 인용했고 그 뜻을 왜곡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이교의 가르침과 자신의 가르침을 뒤섞었다.

 

바울은 유대교를 버리고 새 종교를 창시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유대인을 깔보고 그들은 구원받긴 글렀다고 가르쳤다.

 

어떤 기독교도들은 예수가 하나님이고 그가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고대 예언의 실현 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유명해지려고 예수의 가르침을 새로운 형식에 담아낸 배교자 바울이라고 하는 자가 한 일이다.

 

바울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교 경전을 그릇되게 풀이한 사기꾼이기도 하다. 더욱이 바울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이었으므로 기독교를 가르칠 권위가 없다.

 

기독교도는 새롭고 더 좋은 할 말은 없지만 유대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유대인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풀이하고 날조했고, 또 이해도 못 하면서 훔쳐 온 그리스의 몇몇 가르침을 덧붙여 끼워 넣었다.

 

만약 그리스도교도가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많은 계시들이 있는 까닭이다.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계시가 하나님한테서 온다면 서로서로 딱 들어맞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순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도의 계시는 서로 모순된다 .

 

기독교도는 그들의 계시가 진리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시가 진리라면, 그것들은 서로 잘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의 계시는 한결같지 않다.

 

기독교도는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비롯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이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도의 계시는 합리성이 떨어진다. 그것들은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기독교도는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면 그것은 다른 종교의 계시와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하나님인 까닭이다. 그러나 기독교도의 계시는 다른 종교의 계시와 어긋난다.

 

기독교도는 그들의 계시가 그들 종교의 바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계시가 그들 종교의 바탕이라면 그것은 서로 잘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왜나하면 종교는 모순된 바탕 위에 설 수는 없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도의 계시는 저들끼리도 서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기독교도는 그들의 계시가 하나뿐인 참된 계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계시가 하나 뿐인 참된 계시라면, 그것은 다른 종교의 계시와도 일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순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도의 계시는 다른 종교의 계시와 맞지 않는다.

 

기독교도는 그들의 계시가 유대교 계시의 성취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계시가 유대교 계시의 성취라면 그것은 유대교 계시와도 일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성취는 그것이 성취하는 것과 어긋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의 계시는 유대교의 계시와 모순된다.

 

하나님이 진리를 계시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야만 한다. 하지만 기독교도의 계시는 모순적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 수가 없다.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그 계시는 도덕적 원칙에 맞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도덕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도의 계시는 부도덕하다. 그것들은 폭력과 증오를 설교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는 폭력과 증오를 설교하지 않으실 터이다. 하지만 기독교도의 계시는 폭력과 증오를 설교한다. 그런 까닭에 그 계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 수가 없다.

 

착하고 바른 삶을 살았으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은 영겁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한편, 추악한 삶을 살았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 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공정할 수 있겠는가?

 

켈수스는 먼저 영원함은 물질의 본성에 어긋나므로 영생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물질은 덧없으며 변화의 법칙을 따른다. 그러므로 물질은 영속 될 수 없다. 물질은 탄생, 죽음과 신생의 법칙을 따를 뿐이다. 영생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영원한 삶은 한자리에 머무는 따분한 삶이다. 더 나아질 것도 없는 하나의 상태가 끝없이 이어지는 삶이다.

 

물질은 덧없고 변화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물질은 영속 할 수가 없다. 영원한 삶은 지루함과 침체의 삶 이리라. 진보와 발전이 없는 삶 이리라. 그것은 이미 한 번 보고 겪은 삶 이리라. 그것은 더는 새로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삶 이리라.

 

기독교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기 때문에 죽은 자들도 부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기독교도의 생각은 터무니없고 비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헛된 희망으로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켈수스는, 모든 사람이 아담과 이브에게서 죄를 물려받는다는 기독교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책임지도록 하기에 부도덕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처벌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본다.

 

켈수스는 원죄에 대한 기독교리를 그리스 신화에 견준다. 이 신화에서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죄 때문에 사람들이 벌을 받는다. 켈수스는 기독교리가 그리스 신화보다 더 나은 점이 없다고 주장한다. 두 가르침 모두 사람이 스스로 하지도 않은 일을 책임지게 하므로 부도덕하다.

 

기독교도들은 세상 누리의 삶을 업신여겼지만, 박해를 받으면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동경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들을 그곳으로 데려다 줄 죽음은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물질적인 재산을 혐오한다고 말은 했지만, 재화와 소유물을 긁어모아 쌓아 두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기쁨을 누리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를 즐겼다.

 

기독교도는 자기들이 슬기롭다고 주장했지만, 철학과 교육을 업신여겼다. 그들은 이성을 사용한다고 말은 했지만, 기적과 동화를 믿었다. 그들은 진리를 안다고 말은 했지만, 명백한 사실과 역사의 증거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논리를 존중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들의 진술과 주장은 끊임없이 서로 어긋났다.

 

예수는 적에게 맞서지 말고 다른 뺨까지도 내밀라고 가르친다. 켈수스는 이는 불의와 혼란을 가져올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켈수스는 적에게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므로 이것은 실행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고 봤다.

 

예수는 죄를 지은 눈은 뽑고 손은 잘라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켈수스는 이를 폭력적이고 비인도적인 요구라고 봤다.

 

예수는 적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들의 적을 미워하라고 한 구약과 맞지 않는다.

 

예수는 원수를 축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수를 저주하라고 명령한 구약과 맞지 않는다.

 

그들은 유대교와 그리고 자기들끼리도 종파마다 서로 다른 가르침과 관습을 가꿔 나갔다

나사렛파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임을 믿으면서도 토라와 할례를 따른다

 

에비온파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그를 토라를 완성한 선지자로만 여긴다.

 

엘케사이트파 : 토라를 갈음하는 새로운 계시를 그들에게 가져다 준 엘케사이Elkesai라는 천사를 숭배한다.

 

카르포크라테스파 : 자유로운 성생활을 실천하고 몸의 부활을 부인한다

 

발렌티누스파 : 에온Aeon이라고 부르는 신성한 유출과 함께 복잡한 우주론을 가르치며, 예수도 그 에온의 하나라고 믿는다.

 

마르키온파 :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배척하고, 예수는 사람들을 사악한 창조자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우려고 온 다른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이 사람 때문에 지어졌다고 어림해 볼 만한 까닭수가 없다. 차라리 동물을 위해 이 세상이 있다는 주장이 더 맞음 직하다. 짐승은 사람에게 사냥 당하고 먹히지만, 사람이 무기, 그물, 사냥개를 끌어 들이기 전에는 상황은 거꾸로였으며 그게 오히려 정상이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발톱과 어금니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육식 동물을 더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나라 만들기, 사회 조직과 앞날 대비 따위는 개미와 벌도 그와 비슷한 일을 해내므로 사람만의 별다른 성취가 아니다. 사실 자연계에는 특권을 가지거나 세계를 지배하도록 정해진 종이 없다. 창조물 중의 어떤 조각을 창조의 목적으로 끌어올리는 모든 생각은 본디부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자기 구실과 자기 나름의 생존권이 있는 구성요소가 모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창조의 한 조각이 다른 조각을 위해 있다거나 생물의 한 종이 다른 종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소리는 옳지 않다. 오히려 우주의 각 조각은 자신이 딸린 전체와 얽혀 있으며, 전체의 완전성은 각 조각의 완전성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그밖의 세상보다 유대인과 기독교도에게 더 마음을 써서 그들에게만 그분의 뜻을 계시 한다는 믿음은 제멋대로 식 자기 중심주의의 드러냄이다. 이와 똑같이 벌레나 개구리도 삼라만상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이 온갖 다른 뭇 생명보다 자기를 더 좋아한다고 상상할 수는 있다.

 

더없이 높은 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몸, 특히 아름다움이 뛰어나지도 않고 신성한 데라곤 없는 예수 같은 흔한 몸속으로 들어가셔서 나쁘고 못됐고 못생긴 이들과 어울리며 슬픔에 자기를 내 맡긴다는 믿음은 허무맹랑(虛無孟浪)하다. 더욱이 하나님이 무슨 까닭에 그 늦게서야 어떤 역사적 시점에 이리 행동하셨고 왜 좀 더 일찍 하시지는 않았는지 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끝내 자기 피조물인 아담을 설득하지 못했으며, 뱀의 꼴을 한 악마가 하나님의 계명을 이겼다는 가정은 미친 것이다.

 

하나님도 노여워하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는 주장은 우스꽝스럽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으름장을 놓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것은 그분 자신이 세운 질서를 스스로 거스르는 일이 될 터이다.

 

하나님은 이른바 『모세오경』에 따르면 모세를 통해서 유대인에게 전쟁에서 모든 적을 없애고 그 자손까지 멸족하라고 명령하셨다. 한편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촉구한다. 켈수스는 하나님이 예전 명령을 잊으셨는지 아니면 마음을 바꾸셨는지 묻는다.

 

몸의 부활 교리는 하나님이 자연에 어긋난 정신 나간 행동을 한다고 가정한다. 푹 썩을 대로 썩은 몸이 땅에 나타나는 것은 벌레들의 희망이다. 육체는 본디 썩기 쉬우므로, 몸의 영원한 지속은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리스도교도들은 하나님이 마치 직공 처럼 일을 하고 피곤하여 휴양이 필요하듯 엿새 동안의 창조 작업을 마치신 후에 공휴일이 필요하셨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오해에 기초한 어리석은 생각이다.

 

악마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게 고약하고 힘센 맞수가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발명이며 더 없는 무지의 징표다. 만일 악마가 실제로 있어 사람들을 속인다면, 하나님이 속은 자들에게 형벌을 주겠다고 위협할 근거는 없을 터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두루 착하시고 올바르게 대하시며, 욕심을 부리지 않으시고, 시새움이 없으시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도의 딴 모든 종교 전통의 저주는 마땅하지 않다. 지고신에 딸린 신들과 악마들이 걸맞게 존경받아도 그것이 지고신에 대한 숭배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여기에 언급된 악마(다이모네스 daimones)는 기독교 세계관처럼 악의로 똘똘 뭉친 존재가 아니라 선의가 있고 도움이 되는 존재다.(자료를 수집 작성)

 

"順菴   安鼎福"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1712~1791)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면서 역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순암은 20대까지는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이후 33세에 유형원의 저서를 접하고, 35세 때 비로소 星湖(성호) 李瀷(이익 : 조선후기 문인)을 만나 그의 문하로 들어가 근기남인(近畿南人)이 된다. 그 뒤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지면서, 1749년(영조 25)부터 만령전참봉· 사헌부감찰· 익위사익찬· 목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사상적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양명학(천주교)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비판하였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천주교는 사위인 권일신 등의 남인학자들이 신봉하고 있었는데, 천학고(天學考)와 천주문답(天主問答)을 저술하여 이교(異敎)로 지목하는 등, 그릇된 외래문화에도 적극 반대하였다. 즉 그는 경세치용의 경세론을 학문과 현실에 연결시키고, 그 정신으로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신보수적인 학자였다.

 

7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안정복은 학자 본연의 생활로 돌아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는데,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일찍이 40대 중반에 스승 이익을 비롯하여 이익의 제자이자 천주교 신자인 권철신(, 1736~1801)에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흐른 후 그의 나이 70대가 되었을 무렵,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를 비판한 책인 천학고()나 천학문답()이 간행된 것도 1785년, 안정복의 나이 74세 때이다.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스승 이익이 천주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스탠스를 취했던 것과 달리 안정복은 서학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배척했다. 저서 순암집(順菴集)의 권17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유교적 세계관과 이기론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비판했다. 안정복은 천학(천주교)은 현실을 문제삼지 않고 오로지 내세의 천당 지옥설을 믿어 사람을 황당한 지경에 빠뜨리며 아침, 저녁으로 지옥의 고통을 면하고자 자기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함이 무당이나 불가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였다. 옛 신성한 자가 만든 사람들을 가르치는 수단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서양인들의 신은 여와나 후예나 다를 바 없는 괴력난신이므로 서양인들에게는 천학이 성학(聖學)일지라도 그것이 공자(孔子) 같은 성인의 가르침과 동일한 성학은 아님을 말했다.

 

조선후기 유학자 순암 안정복의 천주교 논증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기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그것은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또한 동신(童身)을 귀하게 여기는 교리도 부부와 인륜과 음양의 근본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조상의 제사에 대한 거부도 효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효는 인간과 천지가 소통하는 근본원리다. 서양 종교는 하늘의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없으며, 도덕규범이 타락한 것일 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한, 현실성없는 이야기다.

 

천국과 지옥과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들을 교리의 중심으로 삼아서 비합리적이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후의 일을 알 수 있겠는가? 일상적 관심을 벗어나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말하는데, 인간이 본 적도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들며 현세의 선악에 대한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창조설 역시 비합리적이다. 천지는 음과 양의 두 기운이 혼합되어 이루어지는 개벽의 세계이므로 인격체로서의 조물주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주장도 틀렸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도덕적, 합리적 원리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내세를 강조하기 때문에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현세에서의 선행이다. 신과 영혼의 구원을 주위사람에 대한 의무보다 상위에 둠으로써 인간공동체의 근본적 중요성을 거부하게 된다.

 

예수가 아담의 자손인 이상, 예수는 인간일 뿐이며 신이 될 수는 없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도 신의 모함일 뿐이다. 아담과 이브가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에 잘 가르쳤어야지, 어떻게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해 놓고 그들에게 그토록 가혹한 벌을 내리는가? 그것은 어진 스승의 태도일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가난과 질병과 죽음 등을 겪는 것이 아담과 이브의 원죄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가소로운 논리적 모순이다.

 

사람이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도 마땅한 도리일 뿐이다. 그러한 사회적 선을 행하는 윤리적 바탕이 사람의 본성에 들어있다. 왜 인간이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한 죽은 후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이는 현세의 고뇌에서 해탈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이기적이다. 인간이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는 도저히 바른 세상의 도덕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세례, 죄의 고백, 공개적 기도 등은 불교제식과 비슷하다. 이는 그저 불교나 미륵불 신앙의 아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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