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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야기(나는 왜 가나안 성도인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무엇이 같고 다른가

by 까마귀마을 2024. 2. 11.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무엇이 같고 다른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유래한 한 뿌리의 종교들이다.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을 자기 종교의 최고 조상으로 섬긴다. 세 종교의 공통점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라는 점이다. 다만 유일신을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유대교에서는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처음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은 ‘나는 나다(I am what I am)’라는 의미의 ‘에헤으 아세르 에헤으’였다. 히브리 성경에는 신의 이름이 ‘YHWH’라는 4개의 자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다가 신의 이름 ‘YHWH’가 나오면 이를 발음하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라 읽었다. 이는 ‘나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발음하려 들지 않는다. 워낙 경건한 이름이라 인간이 함부로 부를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YHWH’를 ‘야훼 혹은 여호와’라 부른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하느님의 이름을 고유명사로 부르지 않고 ‘The God’이라는 뜻의 ‘알라’라 부른다. 모두 같은 분, 다른 이름이다. 쿠란에서는 알라가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 동일한 하느님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슬람은 신에 대해 말할 때 그 신이 아브라함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예수의 하느님, 무함마드의 하느님이라고 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서로 갈라선 종교지만 원래는 같은 신을 믿는 한 뿌리의 종교다. 세 종교는 유일신에 의한 창조, 종말, 최후의 심판, 영원한 내세 등의 종교관이 같다. 특히 죽은 다음의 부활을 강조하며 최후의 심판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 다른 종교와 차별화된 점으로 꼽힌다. 사진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4년여 작업 끝에 미켈란젤로가 1541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세 종교 모두 아브라함이 최고 조상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창조주를 한울님이라고 불렀는데,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할 때 이를 채택했다. 그 뒤 가톨릭은 ‘하느님’, 개신교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세 종교의 모태는 유대교다. 유대교는 기원전 2000년경 아브라함에서 시작해 기원전 13세기경 출애굽(출이집트) 때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아 뼈대가 정립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서기 90년경 얌니아 종교회의 이후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유대교에서 분리되었으며, 이슬람교는 기독교보다 약 600년 뒤 무함마드에 의해 생겨났다.

우리가 통상 구약성서로 알고 있는 유대교의 히브리 성서가 세 종교의 근본이다. 유대교는 구약만을 성서로 인정하는 반면 기독교는 구약과 함께 예수 이후의 복음서 ‘신약’을 성서로 믿는다. 이슬람교는 여기에 무함마드가 쓴 쿠란이 보태진다. 세 종교의 경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유대교는 ‘타라크(구약성서)와 탈무드’이며, 기독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이슬람교는 ‘구약성서 가운데 쿠란과 상충하지 않는 토라(모세오경)와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그리고 쿠란’이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쿠란을 제외한 세 개는 후대에 일부 내용이 변질되었다고 보고 있다. 쿠란에서는 율법은 모세가, 복음은 예수가 선포했으되 진정한 예언자는 무함마드이고 그의 계시가 최종적이라 한다.

아브라함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통적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꼽는 인물이다. 사진은 아브라함이 후처 하갈을 내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19세기 화가의 작품. (게티이미지코리아).

 

세 종교 모두 유일신에 의한 ‘창조, 종말, 최후의 심판, 영원한 내세’라는 종교관도 일치한다. 특히 죽은 다음의 부활을 강조하며, 최후의 심판 개념을 발전시켰다. 초기 유대교는 ‘야훼의 날’, 곧 ‘마지막 날’을 강조했다. 유대교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용어는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상징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부활과 구원에 관한 믿음이 있다. 하느님이 모든 민족을 심판하는 날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다만 유대교 개혁파는 이러한 메시아 사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유대교에 부활과 최후의 심판 사상이 명료하게 정립된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 유수기(포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죽으면 지하 깊숙이 있는 ‘스홀’에 간다고 생각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반(半)수면 상태에서 목적 없이 존재하는 음침한 곳이다. 훗날 메시아가 그들을 부활시켜줄 것이라는 어렴풋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당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바빌론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준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을 흠모하며 그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일부 사상을 받아들였다. 대표적인 게 인간의 도덕적 선행의무를 일깨운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적인 ‘선과 악’ 사상이다. 곧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부활과 심판’ 등을 받아들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예언자 자라투스트라가 강조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며 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행동들이 악을 물리치는 무기가 된다고 보았다. 특히 선행이 가져다줄 심판과 부활을 강조했다. 죽은 뒤 3일을 무덤에서 지낸 뒤 4일째 계곡을 가로지르는 보응의 다리를 건너는데, 이때 살아있을 때 했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만일 선행이 악행보다 많으면 영혼은 다리를 건너 하늘로 올라가지만, 악행이 많으면 다리가 좁아져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지혜의 주 ‘아후라 마즈다’가 악마들 우두머리인 ‘아흐리만’을 결국 굴복시킨 뒤, 모든 인간을 부활시키고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기 때문이다.

이후 기독교는 최후의 심판 개념을 더욱 발전시켜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후의 심판이 있으며,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에서도 최후의 심판 개념이 많이 확대되었다. 이슬람에서는 ‘부활의 날’ ‘심판의 날’이 세상의 마지막 이전에 선행된다. 심판의 날은 이슬람교의 5대 신앙 중 하나다. 부활의 날에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살았던 모든 인간이 다시 살아나 알라 앞으로 나간다. 이때 인간들의 모든 행위를 기록한 책이 두 천사에 의해 하느님 앞에 제출되고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수록한 2권의 책에 실린 기록에 따라 낙원이나 지옥으로 간다. 만일 종교 전쟁(聖戰·Jihad)에서 죽은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면 영혼은 곧바로 낙원으로 간다.

그렇다면 세 종교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가장 큰 차이점은 ‘예수에 대한 관점’ 차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삼위일체설에 입각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자 신이라고 믿는다.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예수를 단지 하느님이 보낸 선지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한다. 유대교는 예수를 유대교의 일파를 이끌다 순교한 선지자로 보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신으로 믿는다. 반면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다. 사진은 바닷가에서 설교하는 예수를 묘사한 그림. (브루클린 미술관)

 

이슬람교 “쿠란 이외 경전은 왜곡돼”

이슬람교는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한다. 실제로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하느님의 허락으로 여러 기적을 보여줬다고 믿는다. 이슬람교는 “예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람에서 말을 했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흙으로 새를 빚어 숨결을 불어넣는 기적을 행했다. 예수는 ‘하느님 이외에는 숭배받을 존재가 없다’는 유일신 사상을 사람들에게 설파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심판의 날이 가까워지면 예수는 다시 재림한다고 했다.

 

이슬람교의 말세는 알라만이 알 수 있는 영역이다. 말세는 대말세와 소말세가 있는데 대말세의 징조는 연기가 온 세상을 덮을 것이며 짐승들과 사기꾼들이 출현하고, 예수가 재림하며 태양이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는 등 징조가 있다. 소말세는 사회의 부정부패, 고리대금, 간음, 대로에서의 범죄 같은 것으로 그 징조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알라께서 쿠란과 하디쓰(예언자 언행록)를 통해 그들에게 알려주신 사실들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는 이렇게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면서도 참선지자는 바로 무함마드라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는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이 적자(嫡子)가 아니라, 하갈이 낳은 맏아들 이스마엘이 적자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 종교를 계승했으며 이스마엘의 자손인 무함마드를 참선지자로 믿는다.

 

유대교·기독교 갈라진 까닭 로마와의 전쟁 막바지에 초기 기독교파 먼저 피란… 유대인들, 배신자로 인식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오랜 기간 사이좋게 예배를 같이 보았다.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뿌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 유대교의 한 분파인 ‘나사렛파’로 존재했다. 그 무렵 로마와 전쟁 막바지에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일전이 있었다. 68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자 종말론 신앙 속에 살아온 초기 기독교 ‘나사렛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요르단강 동편 펠라성으로 피란 갔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나사렛파를 배신자들로 여기며 신앙공동체를 함께할 수 없다고 보았다.

로마와의 전쟁 후유증으로 유대 민족의 절반이 멸절되어 거의 모든 종파가 와해되고 바리새파만이 남았다. 전쟁으로 제사장 계급이 전멸해 사제가 없어지자 이른바 랍비들이 주도하는 랍비적 유대교가 자리 잡았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나라가 로마제국에 의해 무참히 박살 난 이유 중 하나가 종파 간 교리 싸움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랍비들은 율법 논쟁은 용인하나 종파적 논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서기 90년 야브네(얌니아) 종교회의에서 구약성경을 확정 지으면서, 랍비 사무엘이 회당예배 때 바치는 18조 기도문 가운데 이단자들을 단죄하는 제12조에 ‘나사렛 사람들’을 덧붙였다. 그 뒤 나사렛 사람들, 곧 초기 기독교도들은 더 이상 유대교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독자 종단으로 독립했다.

이슬람교만큼 빠르게 성장한 종교는 없었다. 지금도 이슬람교의 증가 속도는 가파르다. 613년 무함마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장점을 따서 이슬람교를 만들었다. 무함마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와 똑같은 유형의 ‘움마 공동체’를 만들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움마 공동체가 지향하는 정신이 ‘형제애와 평등정신’인데, 이는 유대인 공동체의 체다카(약자를 돌보는 정신), 미슈파트(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와 동일하다.

이처럼 움마의 중심에는 피보다도 강한 무슬림 ‘형제애’와 성별, 인종, 계급을 초월한 ‘평등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움마 공동체는 사막사회에 뿌리 깊었던 남존여비 등의 차별을 하지 않고, 마지막 한 톨까지 나눠 먹는 정신으로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게다가 유대인의 공동체는 배타적이지만 움마 공동체는 개방적이었다.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신의 사자다”라고 암송하는 순간, 누구나 형제가 되고 움마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를 반긴 건 사회적 약자인 힘없는 서민과 소외계층이었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이브 - 기독교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원죄’라 한다. 이 원죄는 십자가 보혈로 대속(代贖)한 예수를 믿으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원죄 사상 자체가 없다. 아담이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기에 그의 자손에게 원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유대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이 죄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지 않는 것으로 본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한 뿌리에서 비롯됐지만 원죄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이슬람교, 형제애·평등 내세워 확장

사막의 척박한 환경 속에 아랍 부족들은 툭하면 이웃 부족을 약탈하거나 전쟁을 벌였다. 그런 호전적인 부족들을 하나로 묶어 움마 공동체로 만든 게 무함마드였다. 공동체 정신이 이들을 순한 양으로 변모시켜 움마가 이슬람의 원형이 된다.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총체적 사회 시스템이 됐다. 움마는 형제애로 똘똘 뭉친 신앙 공동체이자 이슬람교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신도 공동체란 의미로 사용됐다. 움마 공동체와 신정일치의 강한 종교적 지도력이 이슬람교 성장의 비결이다.

이처럼 교세를 키워가는 이슬람교와, 이 종교의 모태인 유대교와 기독교 등 세 종교 간 대표적 차이는 ‘구원에 대한 견해’다. 기독교는 인간의 죄를 십자가의 피로 속죄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유대교는 율법을 실천하고 선행을 하면 구원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들도 선하고 바른 행동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슬람교를 믿는 이들은 ‘실천적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종교적 의무 5행(行)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이는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이다”라는 신조를 암송하고, 매일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하며, 가난한 자를 위한 자선, 라마단 기간 중의 금식, 평생 한 번 이상의 성지순례를 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유대교는 ‘율법의 실천에 의한 구원’을, 기독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을,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렇게 된 밑바탕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다. 유대교가 창시되던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모세에 이르기까지의 시대는 다신교의 우상숭배가 일상적인, 삶의 방향이나 지침이 없는 무질서한 사회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유대인을 선택해 그들에게 올바른 삶을 위한 크고 작은 것들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곧 613개의 성문율법과 구전율법이었다.

그러던 것이 유대교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엄격한 안식일 준수 등 너무 율법에 얽매이다 보니 율법의 본질보다는 형식이 더 우선되었다. 이를 바로잡은 분이 예수라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 게 아니라 새로운 복음인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반면 기독교보다 600년 뒤에 탄생한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성경을 자기들 입맛대로 변질, 타락시켜 신이 마지막 선지자 무함마드에게 하늘에 있는 성경 원본을 다시 내려주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다시는 왜곡되거나 타락하지 않도록 이슬람교 교리는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었다. 이슬람교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바다’(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한다. 6신(信) 5행(行)이라고도 불린다. 5행을 신앙생활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으로 보아 ‘아르칸’(기둥들)이라 부른다. 이슬람은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는 이 다섯 가지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이슬람이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메카에 모인 이슬람 순례자들 - 이슬람교는 라마단 금식과 성지 순례 등 ‘실천적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종교적 의무들을 지키면 구원된다고 믿는다. 선한 행동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알자지라·플리커).
 

유대교는 율법, 기독교는 믿음 중시

세 종교의 원죄(原罪) 사상도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원죄’라 한다. 이 죄가 하도 무거워 자손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는 것이 ‘원죄 사상’이다. 선악과란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지혜’를 주는 과일이다. 이에 하느님께서는 “이제 사람들이 우리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끝없이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 보혈로 대속했기 때문에 원죄에서 벗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원죄 사상 자체가 없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 중의 하나가 ‘대속(代贖) 사상’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했다는 대속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의 사건을 통해 대속에 관한 이슬람교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을 하느님께서 크게 꾸짖으시자 아담은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실로 저희들은 잃어버린 자가 될 것입니다’라며 용서를 청했다. 이에 하느님은 아담을 용서해 주셨다. 이처럼 아담은 그의 죄를 용서받음에 있어 제3자가 필요치 않았다. 이슬람교는 아담이 용서받았기에 그의 자손에게 원죄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반면 유대교는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 죄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 죄가 후손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원죄 사상은 없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과거에 구속되지 않고 현재에 구속된다. 유대교에선 현재에 충실하지 않는 삶이 죄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이 죄다.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한 것이 죄가 아니라 오늘을 사는 내가 하느님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하느님이 인간에 거는 기대가 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죄다. 주어진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능력’이 죄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믿지 않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자기 안의 달란트(재능)를 찾아내어 힘을 다하여 이를 키워 나가지 않아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신앙이란 자기 자신 속에 내재된 하느님의 형상을 찾아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노력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예수가 메시아다. 반면 이슬람교에는 ‘구세주’라는 중재자가 없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두 가지 희망 속에 사는 유대인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2500년 전부터 굳게 믿어

유대인들은 2500년 전부터 두 가지 희망 속에 살고 있다. 첫 번째가 메시아가 나타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메시아가 가져올 ‘올람 하바’ 세상이다. ‘지금 시대’는 히브리어로 ‘올람 하제’이며 ‘장차 다가올 세상’은 ‘올람 하바’다. 그런데 이 ‘올람’이라는 말은 시공을 초월한 개념이다. 유대인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그들의 영혼이 모두 모세와 같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를 중히 여기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올람’은 어떤 일이 내일로 계속 이어질 경우 ‘지금’을 말하면서 또한 미래, 곧 영원을 말하기도 한다. 이 세상 삶이 끝이 아니라 이 세상은 주님이 오실 그날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은 과거가 살아 숨쉬는 ‘올람 하제’를 살면서 동시에 미래에 다가올 ‘올람 하바’의 시간을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파 유대교는 어느 날 홀연히 출현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유대인 하나하나가, 곧 유대 민족 전체가 하느님의 일을 거들어 이 세상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고 있다. 초림 메시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여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물다가 승천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재림 메시아로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는 ‘구세주’란 중재자가 없다. 누구나 알라를 믿고 선행을 쌓으며, 진실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글 : 홍익희(前)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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