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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杜甫의 三吏 三別 (삼리 삼별)

by 까마귀마을 2023. 12. 31.

 

三吏 三別 : 세곳의 관리와 세종류의 이별이라 해석하면 맞을런지?

당 현종때 일어난 안록산의 난때 현종은 촉으로 도망가고 숙종이 난을 평정하고자 전국의 각 고을에 젊은이는 물론 늙은이 마져 마구잡이 징집하는 과정에서 곁들어진 지방 아전이나 관리들의  횡포를 두보가 직접 눈으로 보고 지은 詩이다. 吏詩가 3首, 別詩가 3首, 모두 6首의 五言詩로 각 首마다 내용은 길지만 왕정시대 특히 전란시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참혹하고 피폐하였는가를 독자들이 직접 눈으로 보듯 잘 묘사한 詩이다. 우리나라도 오래지 않은 과거에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죽었고 고난을 겪어는지는 설명이 필요없다. 아직도 그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황속에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가 불안하고 어슬픈 평화일수 있지만 그래도 지난 70여년이 어쩌면 우리같은 풀뿌리들에게는 우리나라가 생기고 가장 풍족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두보(杜甫)는 하남의 한 몰락한 관료의 가문에서 712년 태어나서 타고난 문제로 이름을 날렸으나,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약관의 나이 때부터 세상을 떠돌며 주옥같은 시를 남긴다.
동시대 천재 시인이라 불리던 이백과는 11살의 나이차이가 났음에도 하남, 산동 일대를 유람하며 수십 편의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이 권력에 아부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두보는 낙양에서 이태백과 헤어진 후 장안으로 가서 진사 고시에 응시했는데, 당시의 재상이던 간신이임보가 두보의 천재성을 시기해 그의 답안지를 빼돌리면서 낙방시켜 벼슬을 살지는 못한다.

낙방한 두보는 임동으로 가는 길에 고구마를 세워 놓은 듯 우뚝 솟은 산을 하나 보게 되는데, 이 산은 여산으로 여산은 3천년전 西周시대부터 離宮을 지어 진시황제도 온천을 즐겼던 곳으로, 당시는 백성들이 주려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음에도, 현종과 양귀비는 아랑곳없이 로맨스를 즐기던 별궁이 있었던 곳이다.

朱門酒肉臭 (주문주육취) 궁궐 문 안에는 술과 고기 냄새
路有凍死骨 (로유동사골)길가에는 굶어죽은 뼈다귀

간신들에 둘러싸인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음을 두보가 비판한 시다.
두보는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며 현종이 촉 땅으로 도망가고 아들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새 정부를 도와야 한다며 장안으로 향하다 안록산 부하들에게 잡혀 8개월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다 용케 탈출해 숙종 정권에서 벼슬살이를 하지만, 그 벼슬살이라는 것이 정치꾼과 시인은 생리적으로 맞지를 않았는지 구태관료, 간신정치인들과의 간극은 좁히지 못한 채 또 다시 가난뱅이가 되면서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고 힘없는 백성들 틈에 섞여 그들의 애환을 몸으로 체험하며 비평하는 시를 짓게 된다.
그래서 예리한 고발정신으로 정치, 사회, 시사 문제를 주제로 한 시를 주로 쓴 두보의 시를 史詩라고도 한다.

“백성위에서 백성을 타고 앉아 백성의 고혈로 살아가는 정치인들“ 이라며 비판한 삼리삼별도 이 당시 나온 시다.
두보의 삼리삼별은 신안리(新安吏), 동관리(潼關吏), 석호리(石壕吏)의 세 편과 신혼별(新婚別), 무가별(無家別), 수로별(垂老別) 세 작품을 부르는 것으로 이 시의 탄생 배경은 다음과 같다.

현종이 촉 땅으로 도망가고 그 아들 숙종(肅宗)의 정부군이 안록산 반란군과 첫 전투에서 패하자, 숙종은 병력 보충을 위해 주변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징발하는데, 두보는 당시 장안에서 화주(華州)로 주거를 옮기다 신안과 석호, 동관 등지를 거치면서 이 때 삼리삼별의 소재가 되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열에 아홉 집은 무너졌고 마을은 초토화 됐으며, 사회기강은 통제되지 않았고, 전쟁 통에 백성들이 가족과 갈 곳을 잃고 헤매는 참상과, 지칠 줄 모르는 관료들의 무자비한 착취와 박해를 거침없이 폭로하면서, 당시 민중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허덕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두보는 그런 난세를 살던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사건과 재난으로 점철된 역사적 진실을 숨김없이 기록하면서, 한편으론 그런 가운데에서도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 난리도 종식되고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그의 작품에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삼리삼별은 두보의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사상적 면모가 새겨진 작품이라는 평가가 더 많은 것이다.(글 :신동아방송=조도환 논설위원)

 

三吏(삼리) 세곳의 관리
 

石壕吏(석호리) 석호촌 관리

暮投石壕村 (모투석호촌 ) 저물어 석호촌에 투숙하였더니

有史夜捉人 (유사야착인 ) 아전이 밤에 사람을 잡아 가더라.

老翁踰墻走 (노옹유장주 ) 늙은 할아비 담을 넘어 달아나고

老婦出門看 (노부출문간 ) 늙은 아낙이 문을 나와 보도다.

吏呼一何怒 (리호일하노 ) 아전의 부름은 어찌 한결같이 노여우며

婦啼一何苦 (부제일하고 ) 아낙의 울음은 어찌 한결같이 괴로운가.

聽婦前到詞 (청부전도사 ) 아낙이 나아가 하는 말을 들으니

三男鄴城戍 (삼남업성수 ) 세 아들은 업성에 수자리를 산다 하네.

一男附書到 (일남부서도) 한 아들에게 편지가 왔는데

二男新戰死 (이남신전사) 두 아들은 이번 싸움에서 죽었다고.

存者且偸生 (존자차투생 ) 남은 사람 또한 구차스레 살아가나

死者長已矣 (사자장이의 ) 죽은 자는 영영 그만이로다.

室中更無人 (실중갱무인 ) 집안에 다시 사람이 없고

惟有乳下孫 (유유유하손 ) 오직 젖먹이 손자뿐이라오.

有孫母未去 (유손모미거 ) 손자가 있어 어미는 가지 못하고

出入無完裙 (출입무완군 ) 출입에 온전한 치마 한 벌 없지요.

老嫗力雖衰 (노구력수쇠 ) 늙은 몸이라 힘은 비록 쇠했지마는

請從吏夜歸 (청종리야귀 ) 청컨대, 아전을 따라 밤에 가겠소.

急應河陽役 (급응하양역 ) 급히 하양의 역사에 응하면

猶得備晨炊 (유득비신취 ) 그래도 새벽밥 짓는 일은 도울 수 있겠지요.

夜久語聲絶 (야구어성절 ) 밤이 깊어 말소리조차 끊어졌는데

如聞泣幽咽 (여문읍유연 ) 낮은 흐느낌 들여 오는 듯

天明登前送 (천명등전송 ) 하늘이 밝아오자 길을 나서서

獨與老翁別 (독여노옹별) 홀로 늙은 할아비와 작별했노라.

 

 

新安吏(신안리) 신안의 관리

客行新安道(객행신안도) 객이 신안의 거리에 들어서니

喧呼聞點兵(훤호문점병) 병사들 점호하는 시끄러운 소리 들린다.

借問新安吏(차문신안리) 신안의 아전에게 물으니

縣小更無丁(현수갱무정) 현이 적어 장정이 없습니다.

府帖昨夜下(부첩작야하) 병첩이 지난 밤에 왔기에

次選中男行(차선중남행) 다음 차례 중남들을 뽑고 있습니다.

中男絕短小(중남절단소) 중남들은 체구가 작으니

何以守王城(하이수왕성) 어찌 왕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肥男有母送(비남유모송) 살찐 남아들은 모친이 나와 송별하는데

瘦男獨伶俜(수남독령빙) 야윈 남아들은 혼자 외롭다.

白水暮東流(백수모동류) 하얀 강은 어둠 속에서 흐르고

青山猶哭聲(청산유곡성) 청산은 큰소리로 곡을 하는 듯하다.

莫自使眼枯(막자사안고) 스스로 눈물을 마르게 하지 말고

收汝淚縱橫(수여루종횡). 흐르는 눈물 거두게 하지도 말라

眼枯即見骨(즉고즉견골). 눈물 말라 뼈가 드러난다 해도

天地終無情(천지종무정) 하늘과 땅은 끝내 무정할테니

我軍取相州(아군취상주) 관군이 상주를 취하여

日夕望其平(일석망기평).그날 저녁에 난리를 평정하리라고 기대했건만

豈意賊難料(기의적난료) 어찌 적의 동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歸軍星散營(귀군성산영).관군이 흩어져 후퇴했으나

就糧近故壘(취량근고루) 옛 보루 근처에서 식량을 구하고

練卒依舊京(련졸의구경) 옛 서울에 의지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니

掘壕不到水(굴호부도수) 호를 파도 물이 차지 않으니

牧馬役亦輕(목마역역경) 말을 기르는 일도 역시 가볍다.

況乃王師順(항내왕사순) 하물며 왕의 군대는 하늘에 순응하니

撫養甚分明(무양심분명) 보살핌과 급양도 심히 분명하다.

送行勿泣血(송행물읍혈) 배웅하면서 너무 울지 말아라

仆射如父兄(복야여부형) 부형처럼 대해줄 곽자의(郭子儀) 복야가 있으니( 郭子儀 : 안록산 난을 평정한 장군)

 
 

潼關吏(동관리)  동관의 벼슬아치

士卒何草草(사졸하초초) 병사들은 어찌 저리 허둥대나

築城潼關道(축성동관도) 동관 길에 성을 쌓는데

大城鐵不如(대성철불여) 큰 성은 견고하여 견줄 바가 없고

小城萬丈餘(소성만장여) 작은 성은 만여 장 높이 있네

借問潼關吏(차문동관리) 동관 아전에게 물어보니

修關還備胡(수관환비호) 관문을 고쳐 다시 오랑캐를 막고자 한다며

要我下馬行(요아하마행) 나를 말에서 내려 걷게 하고

爲我指山隅(위아지산우) 산모퉁이를 가리켜 보이네 

連雲列戰格(연운열전락) 방책은 구름에 닿아

飛鳥不能踰(비조불능유) 나는 새도 넘을 수 없고   

胡來俱自守(호래구자수) 오랑캐가 와도 절로 지켜주니

豈復憂西都(기부우서도) 어찌 다시 장안을 걱정할까

丈人視要處(장인시요처) 노인장 저 요새를 보시요

窄狹容單車(착협용단거) 비좁아 겨우 수레 하나 지나니

艱難奮長戟(간난분장극) 어지럽고 어려울 때 긴 창 휘두르는

萬古用一夫(만고용일부) 사내 하나만 있다면 딱이라오

哀哉桃林戰(애재도림전) 슬퍼라 도림의 전투여

百萬化爲魚(백만화위어) 병사 백만이 고기밥 되었거늘

請囑防關將(청촉방관장) 관문 지키는 장수에게 당부하오니

愼勿學哥舒(신물학가서) 제발 그 때의 패장 가서한을 본받지 마시오.

 
 
三別(삼별) 세종류의 이별
 
 

無家別(무가별 ) 집없이 이별

寂寞天寶後 (적막천보후) 황폐하여 쓸쓸하다. 천보 후에

園廬但蒿藜 (원려단호려) 들과 집은 명아주와 쑥만 자라네.

我里百餘家 (아리백여가) 우리 동네 백 여 집이

世亂各東西 (세란각동서) 세상 난리에 동과 서로 헤어졌네.

存者無消息 (재자무소식) 산 자는 소식이 없고

死者爲塵泥 (사자위진니) 죽은 자는 티끌 진흙이 되었네.

賤子因陳敗 (천자인진패) 천한 이 몸 전쟁에 패하여

歸來尋舊蹊 (귀래심구계) 고향에 돌아와 옛 길을 더듬네.

久行見空巷 (구행견공항) 오래 다녀 봐도 빈 거리요

日瘦氣慘悽 (일수기참처) 햇빛도 시들하고 참혹하고 서글프다.

但對狐與狸 (단대호여리) 다만 대하는 것 여우와 더불어 살쾡이

竪毛怒我啼 (수모노아제) 털을 세워 나를 보고 사납게 짖네.

四隣何所有 (사린하소유) 사방의 이웃은 어찌 있는바

一二老寡妻 (일이노과처) 한두명의 늙은 과부 뿐.

宿鳥戀本枝 (숙조연본지) 잠이 든 새도 본 가지를 그리워하는데

安辭且窮棲 (안사차궁서) 한 처소라 사양하리오.

方春獨荷鋤 (방춘독하서) 봄철에 홀로 호미질하고

日暮還灌畦 (일모환관휴) 날이 저물면 돌아와 물을 대었네.

縣吏知我至 (현리지아지) 고을의 관리가 내가 온 것을 알아

召令習鼓鞞 (소령습고비) 불러 명하기를 북을 연습을 하라했네.

雖從本州役 (수종본주역) 비록 근본을 따라 고을 일을 하지만

內顧無所携 (내고무소휴) 집안을 돌아본바 처자권속 없으니

近行止一身 (근행지일신) 가까이 간대도 이 한 몸 뿐이네.

遠去終轉迷 (원거종전미) 멀리 가면 끝내 떠돌며 헤매 일 것이고

家鄕旣蕩盡 (가향기탕진) 집과 고향은 이미 탕진되었으니

遠近理亦齊 (원근리역제) 멀고 가까움이 역시 같지요.

永痛長病母 (영통장병모) 오래도록 마음이 아픔은 긴 병에 가신 어머니

五年委溝谿 (오년위구계) 오년 전 개울가에 묻히셨고

生我不得力 (생아부득력) 내 나서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였으니

終身兩酸嘶 (종신양산시) 죽을 때까지 둘이 슬프게 울었네.

人生無家別 (인생무가별) 인생 집도 없이 이별하니

何以爲蒸黎 (하이위증려) 어찌 백성이라 할 수 있으랴.

 

 

新婚別(신혼별 ) 신혼 후 이별

兎絲附蓬麻 (토사부봉마) 넝쿨이 삼에 엉켜 자라면

引蔓故不長 (인만고부장) 줄기가 길게 뻗지 못하듯

嫁女與征夫 (가녀여정부) 출정하는 병사에게 딸을 시집보냄은

不如棄路傍 (불여기로방) 길가에 버림만 못하다 하네.

結髮爲夫妻 (결발위부처) 머리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나

席不煖君牀 (석불난군상) 남편과 잠자리 덥혀지지도 아니했는데

暮婚晨告別 (모혼진고별) 저녁에 혼인하고 새벽에 작별을 고하니

無乃太忽忙 (무내태총망) 성급하고 허무한 일이 아니냐.

君行雖不遠 (군행수불원) 임은 가심이 비록 멀지 아니하시고

守邊赴河陽 (수변부하양) 변방을 수비하러 하양에 오시니.

妾身未分明 (처신미분명) 며느리 신분이 아직 분명하지 아니하여

何以拜姑嫜 (하이배고장) 어찌 시부모님께 절을 올릴까

父母養我時 (부모양아시) 부모님 나를 키우실 때

日夜令我臧 (일야영아장) 낮이나 밤이나 잘 되기를 바라셨고

生女有所歸 (생녀유소귀) 딸낳아 시집보낼 때

鷄狗亦得將 (계구역득장) 어울리는 짝 얻고자 하셨네.

君今往死地 (군금왕사지) 이제 임은 사지(전쟁터)에 가시니

沈痛迫中腸 (침통박중장) 뼈저린 마음 창자에 스며

誓欲隨君去 (서욕수군거) 임을 따라 가기를 마음에 새겨보나

形勢反蒼黃 (형세반창황) 형세가 도리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

勿爲新婚念 (물위신혼념) 신혼이라는 생각을 마시고

努力事戎行 (노력사융행) 나라 지키는 일에 힘쓰소서.

婦人在軍中 (부인재군중) 부인 생각 군중에서 하시면

兵氣恐不揚 (병기공불양) 군인으로 사기가 오르지 못하지요.

自嗟貧家女 (자차빈가녀) 한스럽게도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久致羅褕裳 (구치나유상) 어렵게 비단치마 장만했으나

羅褕不復施 (나유불부시) 비단옷 다시는 입지 않겠고

對君洗紅粧 (대군세홍장) 임 뵈올 때 화장을 할께요.

仰視百鳥飛 (앙시백조비) 나르는 많은 새 우러러 보니

大小必雙翔 (대소필쌍상) 큰새 작은 새 반드시 짝을 지어나는데

人事多錯迕 (인사다착오) 인간사 착오가 많아

與君永相望 (여군영상망) 임과 더불어 언제까지(기약없이) 서로 바라만 보네.

 
 

垂老別 (수로별 )늙어서의 이별

四郊未寧靜(사교미녕정) 사방이 안정되지 않아

垂老不得安(수노부득안) 늙은이 평안을 얻을 수 없네.

子孫陣亡盡(자손진망진) 자손들이 진에서 다 죽었는데

焉用身獨完(언용신독완) 어찌 이 몸 홀로 온전하길 바라랴.

投杖出門去(투장출문거) 지팡이 던지고 문을 나서니

同行爲辛酸 (동항위신산) 동행도 나를 보며 마음 아파하네

幸有牙齒存(행유아치존) 다행히 치아는 남아 있지만

所悲骨髓乾(소비골수건) 슬픈바 골수가 말랐고

男兒旣介胄(남아기개주) 남아 이미 갑주를 입었고

長揖別上官(장읍별상관) 길게 읍하며 상관과 이별하네.

老妻臥路啼(노처와노제) 늙은 처는 길에 엎드려 울고 있는데

歲暮衣裳單(세모의상단) 세모에 홑옷을 입고 있네.

孰知是死別(숙지시사별) 누가 알가 이것이 사별이 될지

且復傷其寒(차복상기한) 추위에 떨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此去必不歸(차거필부귀) 이제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텐데

還聞勸加餐(환문권가찬) 아내의 말은 더 먹고 가라 권하네.

土門壁甚堅(토문벽심견) 토문의 성벽은 아주 견고하고

杏園度亦難(행원도역난) 행원나루 역시 건너오기 어려우니

勢異邺城下(세이업성하) 업성의 전투 때와는 형세도 달라

縱死時猶寬(종사시유관) 죽는다 해도 아직 시간은 있겠지

人生有離合(인생유리합) 인생에 헤어짐과 만남이 있음을

豈擇衰盛端(개택쇠성단) 어찌 젊고 늙음을 가리나

憶昔少壯日(억석소장일) 옛날 젊은 날을 기억하며

遲廻竟長嘆(지회경장탄) 머뭇거리다 길게 탄식하네.

萬國盡征戍(만국진정수) 온 나라가 다 수비하는 병정되고

烽火被岡巒(봉화피강만) 봉화가 모든 산을 뒤덮으니

積屍草木腥(적시초목성) 시체 쌓여 초목에 피비린내 나고

流血川原丹(유혈천원단) 흐르는 피로 내와 들은 붉어졌네

何鄕爲樂土(하향위낙토) 어느 마을인들 즐거운 땅이 있을까

安敢尙盤桓(안감상반환) 어찌 그대로 이리 맴도나

棄絶蓬室居(기절봉실거) 옹색한 살림 두고 가려니

傝然摧肺肝(탐연최폐간) 흙더미 무너지듯 가슴메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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