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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歲暮歸南山(세모귀남산)

by 까마귀마을 2023. 12. 19.

歲暮歸南山(세모귀남산)  歲暮에 南山으로 돌아가다

 

北闕休上書 (북궐휴상서)  조정에 상소 올리기 그만두고

南山歸弊廬 (남산귀폐려)  남산의 초라한 오두막으로 돌아왔네
不才明主棄 (부재명주기)  재주 없는 이 몸 총명한 천자께서 버리셨고
多病故人疏 (다병고인소)  
병이 많아 옛친구들의 발길도 뜸하다.

白髮催年老 (백발최년노)  백발은 늙음을 재촉하고
靑陽逼歲除 (청양핍세제)  봄날이 가까우니 한 해가 지나는구나
永懷愁不寐 (영회수부매)  온갖 수심에 잠겨 잠 못 이루는데
松月夜窗虛 (송월야창허 소나무에 걸린 달빛 창문너머 더욱 쓸쓸하다.

                 ---- 孟浩然(맹호연)----

 

註.

南山(남산) : 맹호연의 고향인 양양(襄陽)의 현산(峴山)을 가리킨다.
北闕休上書(북궐휴상서) : 北闕(북궐)은 북쪽에 자리한 宮殿으로 여기서는 朝廷을 가리킨다. 休 : 그만두다.
弊廬(폐려) : 오래되어 낡은 집으로 여기서는 자신의 집에 대한 겸손한 표현이다.
明主(명주) : 현명한 임금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당(唐) 현종(玄宗)을 가리킨다.
靑陽(청양) : 봄을 말한다.(爾雅注疏(이아주소)卷6 釋天(석천) 봄은 靑陽이다.[春爲靑陽]라고 하였다. 邢昺의 註에 봄기운이 온화해지면 푸른빛이 돌고 따뜻해짐을 말한 것이다.[言春之氣和 則靑而溫陽也]”라고 하였다.

歲除(세제) : 음력 섣달 30일, 북을 쳐 역병을 물리치는 풍속이 있었다. 후에 년 말일을 세제라고 했다. 

窗虛(창허) : 窗(창) 堂(당)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詩題가 歸故園作(귀고원작)이라 되어 있기도 하며, 暮(모)晩(만)으로 되어 있는 본도 있다. 

 

대궐의 임금께 글을 올려 임용되기를 바라는 일을 그만두고 양양 현산(峴山)의 남쪽 고향집으로 돌아왔도다. 

재주가 없어 인재를 찾는 훌륭한 군주에게조차 선택되지 못하고, 병으로 친구들과도 소원해졌다.

머리에 난 백발은 노년이 되었음을 빨리도 알려주는 것 같고, 봄날이 가까워오는 걸 보니 묵은해가 바뀌어 또 새해가 되는구나. 끊이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에 수심에 잠겨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소나무 사이로 달빛이 비춰드는 창문, 밤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마지막 구절 ‘松月夜窗虛'에서 虛(허)는 매우 절묘하다. 자연의 풍경과 시인의 심정이 모두 공허함을 정경교융(情景交融)의 경지에서 제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적막한 밤도 공허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시인의 마음도 공허하다.

계묘년 이해도 저물고 있다.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 맘때면 한해 많은것을 이루고 알차게 살아온 사람들도 아쉬움이 남는 때다. 취직을 위해 숱한시간 공을 들인 취준생 에게는 어느 다른 때보다 좌절과 허탈함이 더 할때인것 같다.시인이 낙방하고 초라한 고향으로 돌아가며 온갖 수심에 젖은 것처럼... 그러나 인생은 길다 새해에는 새로운 해가 떠 오르듯 더 많은 희망과 더 많은 기회가 있어 우리의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어야 하는이유 이기도 하다.

 

이 시는 맹호연(孟浩然)이 나이 마흔에 長安(장안)에 와서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양양(襄陽)으로 돌아가서 지은 작품이다. 진사시에 낙방한 뒤에 황제에게 직접 글을 올리는 것은 당대 선비들에게는 흔한 일이었으나 孟浩然은 그것을 포기했다. 글을 올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가서 천하창생을 구제하려던 시인의 이상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이 詩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옛 선비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아예 벼슬을 포기했을 때 곧잘 ‘남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시인은 왜 벼슬을 포기했을까. 군주는 현명한데 자신의 재주가 부족한 데다 병이 잦아 친구들과의 교유마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누굴 원망하랴. 게다가 흰머리가 돋을 만큼 이젠 나이도 들었고, 마침 봄기운이 돌면서 또 한 해가 허망하게 지나려 한다. 언뜻 이 시는 벼슬길이 막힌 여느 선비의 상투적인 넋두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맹호연은 당시 장안 사대부 사이에 꽤 시명(詩名)을 날리던 중년의 인재였으며 이백이 “그 높은 인품을 어찌 우러러나 보랴? 난 그저 여기서 맑은 향기나 본받으리니”라 극찬했던 맹호연 이었다. 화근은 그가 이 시를 황제와의 첫 대면에서 읊은 데서 비롯되었다. 맹호연을 처음 만난 현종이 반색을 하며 시 한 수를 요구하자 시인이 즉석에서 지어 올린 시가 위의 시이다. 황제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대가 벼슬을 구한 적도 없거니와 내가 언제 그대를 버린 적이 있던가?” 겉으로는 겸손하게 재주가 없다고 말하지만 내심 원망과 탄식을 토로했으니 황제로서는 시인의 괜한 푸념이 고깝게 들렸다. 황제는 시인의 낙향을 명령했고 이후 맹호연은 평생토록 벼슬과 멀어졌다.

 
 

맹호연(孟浩然, 689년 ~ 740년)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다. 이름은 호이며, 자는 호연이며 호(號)는 녹문거사(鹿門處士)이다.

양양(襄陽) 사람으로 절개와 의리를 존중하였다. 한때 녹문산(鹿門山)에 숨어 살면서 시 짓는 일을 매우 즐겼다. 40세 때 장안(지금의 시안)에 나가 시로써 이름을 날리고, 왕유 · 장구령 등과 사귀었다. 그의 시는 왕 유의 시풍과 비슷하며,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 5언시에 뛰어났다. 격조 높은 시로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어 왕유와 함께 ‘산수 시인의 대표자’로 불린다. 맹양양(孟襄陽)으로도 불리며 저서에 ‘맹호연집’ 4권이 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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