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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옥봉(玉峯) 李淑媛(이숙원) 삶과 시(詩)의 세계

by 까마귀마을 2023. 11. 26.

 

 

옥봉(玉峯) 이숙원의 삶과 시(詩)의 세계

조선시대 여류시인이라면 보통 황진이, 허난설헌, 매창, 이옥봉 4명을 꼽는다. 황진이와 허난설현은 잘 알려진 반면  매창과 이옥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매창과 옥봉이 지은 시들이 덜 뛰어 나서는 결코 아니다.

옥봉의 대표 詩 "몽혼"이 저의 블로그에 따로 올려져 있지만 오늘은 이옥봉의 삶과 그녀의 詩세계를 새겨 봅니다.
그녀들의 명성과는 달리 그녀들의 남겨진 시는 그렇게 많지 않다, 아마도 4명의 여류시인중 허난설현을 제외한 3명은 신분이 낮은 기생, 서자로 당시 사회의 주류층이 아니었고 평탄한 삶을 살지도 못했다.양반 가문의 허난설현도 순탄하지 않은 결혼생활, 오빠가 정쟁에 휘말리등, 슬하의 두자식을 병으로 잃자 슬픔으로 27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유명한 황진이의 시마저도 대부분 멸절되어 남아 있는 것은 20수도 안 되고, 허난설헌의 시들도 허균이라는 편집자를 거쳐 전해져 와서 대체로 그 원본을 파악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며,  이옥봉의 시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32수가 전하는데 그중 반은 진위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현대 독자들이 이 천재들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옥봉이 남긴 약간의 시는 상당한 충격을 준다.
앞서 언급한 4명 중 허난설헌과 매창의 시가 선이 가늘고 감성적이며 섬세한 느낌이라면, 황진이와 이옥봉의 시는 몹시 호탕하고 재치 있으며 자유분방하고 호쾌한 느낌을 준다. 

허균(許筠, 난설헌 동생)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나의 누님 난설헌과 같은 시기에 옥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조원의 자)의 소실이다. 그녀의 시는 청장(淸壯)하여 아녀자의 연약한 분위기가 없다"고 평했다. (家姊蘭雪一時 有李玉峯者 卽趙伯玉之妾也 詩 亦淸壯 無脂粉態) 조선의 4대 여류시인 이였던 옥봉 이숙원의 생애와 그녀가 남긴 시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전주이씨로 본명은 李淑媛(이숙원)이다, 조선 중기(16세기 후반)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의 후손 며 명종 때의 왕족의 후예이다. 몽혼, 규정, 영월도, 안흥증량, 추사등을 지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玉峰은 그녀의 아버지 李峰이 지어준 호이다. 아버지 자신의 이름자인 峰을 딸, 그것도 서녀의 호로 지어주었을 정도로 옥봉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컷음을 짐작할수있다. 옥봉은 임진왜란때 큰 활약을 하며 사헌부 감찰, 충북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서부터 아버지에게 글과 시를 배웠는데 너무나도 시문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그녀 은 시는 주위를 놀라게 했다. 결혼할 나이가 되어 신분 때문에 첩살이 밖에 할 수 없음을 알자 옥봉은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다.(일부의 자료는 17살에 첫 혼례를 치렀지만 이내 남편이 요절하자 친정에 와 있었다고 되어있다)  옥봉은 장안의 내 노라 하는 시인 묵객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의 시는 재기발랄하고 참신하여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옥봉은 詩會에서 조원이란 선비를 만나 열열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옥봉의 사랑을 알게 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찾아가 딸을 첩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지만 이미 결혼한 몸인 조원이 거절하자 딸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이봉은 체면을 따지지 않고 조원의 장인인 이준민에게 도움을 청하여 결국 이준민의 주선으로 옥봉은 소원을 이루게 된다.
자기 딸을 첩으로 들여 달라고 사위 될 사람의 장인에게 청을 하고, 장인은 자기 딸의 씨앗이 될지도 모르는 여인을 첩으로 추천하다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조선 사대부들의 형태이지만, 어떻든 옥봉은 결혼 후 다른 사대부의 첩들과 시를 주고 받기도 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된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녀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졌다 한다. 조원은 옥봉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안겠다고 맹세하라 하여 , 옥봉은 그러겠노고 맹세했다.
당시 여염집의 여인이 시를 짓는 것은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 내리는 일이라 여겼다. 또한 옥봉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잘 살던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부탁을 해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써 보냈다,
세수대야로 거울을 삼고,  洗面盆爲鏡 (세면분위경 )
참빗에 바를 물로 기름 삼아 쓰옵니다. 琉頭水作油 (유두수작유)
첩의 신세가 직녀가 아닐진대,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 )
어찌 낭군께서 견우가 되리까.   郞豈是牽牛 (랑기시견우) * : 어찌 기 . 牽  : 끌 견
( 거울도 기름도 없이 가난하게 살지만 아내가 직녀가 아닌데 남펀이 소를 끄는 사내 즉 견우이겠냐는 뜻)


너무도 가난하고 청렴하게 살지만 견우가 아닌 남편이 어찌 소를 훔쳤겠느냐고 멋지게 항변하는 이 시를 본 관리들은 아낙의 남편을 석방해 주었다.

그래서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일로 옥봉은 쫒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조원하고 함께 산지 20년쯤 되었을 무렵의 일입니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정을 나눈 여인을 조원은 어찌 그리 매정하게 단칼에 내쳤을까요?
처음 첩으로 들었갔을 때 시를 짓지 않기로 한 언약을 깨뜨려서 내쳤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지만 믿기 어렵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녀가 간간이 시를 지은 흔적(痕跡)이 있는데다가 시와 철천지 원한을 맺기도 않은 선비가 부인이 시를 썼다고 이혼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공적인 판결에 벼슬아치의 부인이 끼어들어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된 것을 용납하기 어려워서 일까요?
조원의 꽁한 선비 기질로 보건데 타당한 이유일 듯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관가의 판결이 사회를 크게 어지럽힌것도 아니고 탄원서를 서로 써준 정도에 지나지 않는 데, 그걸 이유로 이혼을 하다니 지금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훗날 조원의 고손자인 조정만은 "이옥봉의 행적" 이란 글에서 세상사람들은 옥봉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군자다운 포용력 이라고 말했지만 고조부는 그녀의 재주가 덕보다 승한 것을 미워 했을것이다 라고 적고있다. 조원과 나란히 장원 급제를 한 율곡 이이가 지적한 "그가 문학적 명성은 있지만 국량과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도 그런 남편을 옥봉은 밤마다 꿈속에서 그리워 한다.

"꿈속에 오고 간 길 흔적이 난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겠내요" 옥봉이 지은 몽혼이란 시의 한구절 이다.
조원이란 남자의 졸렬한 행동은 이런 사랑을 받을 가치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데도 옥봉은 우리가 모르는 조원의 또 다른 매력에 사로잡혀 있었나 보다. 그에게 버림받은 뒤 한강 뚝섬 부근에 움막을 짓고 미친 여자처럼 울부짖으며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강가에서 멀리 북악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여자,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詩魂)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수 지어준 일로 쫒겨나다니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울었다.
더 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지 그녀의 사랑시는 간절하고 정열적이고 슬픔이 가득 차 있다.

이밤, 우리 이별 너무 아쉬워
달은 멀리 저 물결 속으로 지고
묻고 싶어요, 이 밤 어디서 주무시는지
구름 속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 소리에 잠 못이루시리

냉정하기 짝이 없는 조원에게 바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저 시름을 옥봉은 아낌없이 시로 남겨놓고 세상을 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난리통에 옥봉이 죽었으려니 짐작할 뿐, 정확한 생사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옥봉에 대한 기이한 후일담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전해 오고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편찬한 백과전서 )
그녀가 죽은 지 40년쯤 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조원을 아느냐?” 는 원로대신의 질문에 부친이라고 대답하니, 서가에서 책 한권을 보여주었는데 “이옥봉 시집”이라 씌어 있었다.
아버지의 첩으로 생사를 모른 지 벌써 40여 년이 된 옥봉의 시집이 어찌하여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는지 조희일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 너무도 기이하고 놀라웠다.
약 40년 전,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시체가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얼굴이라 아무도 건지러 하지 않아서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돌 다닌다고 했다. 사람을 시켜 건져 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한 겹 두 겹 벗겨내니, 바깥쪽 종이에는 아무것도 씌어 지 않았으나 안쪽 종이에는 빽빽하게 뭔가가 적혀 있었다. 시(詩)였다.
“해동(海東) 조선국(朝鮮國) 승지(承旨) 조원(趙遠)의 첩(妾)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이름도 보였다.
시(詩)를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라, 조원의 후손들이 그녀의 시를 모아서 책을 낸 게 아직도 전해져 내려온다. 이후 임천조씨 문중에서는 선조와  종인의 뜻에  따라 소실 옥봉의 위패를 안장하고 가 묘와 묘단비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매년 음력 10월 14일 봉시제(奉時祭)를 지낸다 한다.

 

온몸을 자신(自身)의 시(詩)로 감고 죽다니….
그 시(詩)로 몸을 감고 바다에 뛰어들다니….
왜 이런 전설같은 후일담이 전해 올까요?
조원에 대한 미움과 분노(憤怒)에 시(詩)로 몸을 감고 바다에 뛰어 든 것일까요?
여성을 천시하고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봉건적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걸까요?
결국은 시(詩)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침묵으로 웅변한 걸까요?
이옥봉은 대답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自身)이 남긴 시(詩)들로 그 대답(對答)을 대신(代身)할 뿐이다.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에 작품이 전해졌고 한 권의 시집이 있었다고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 1권 만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玉峰의 詩 세계

 

영월 가는 길
千里長關三日越(천리장관삼일월) : 천리 먼 험한 길을 사흘에 넘으니

哀歌唱斷魯陵雲(애가창단노릉운) : 애절한 노래 단종의 무덤 구름에 사무친다
妾身自是王孫女(첩신자시왕손녀) : 저의 몸도 본래 왕손의 딸이라
此地鵑聲不忍聞(차지견성불인문) : 이곳의 두견새 우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다
위 시는 남편 조원과 같이 남원으로 가는데 영월의 노산군의 묘를 지나면서 지은 시로서 봉은 자신은 비록 서녀로 태어낳지만 덕흥대원군의 후손인 왕족의 딸임을 알리며 동병상린의 마음을 시에 담은 것이다.

몽혼(夢魂) 

근래안부문여하(近來安否問如何) 요사히 안부를 묻노니 어떠하시는지요?
월도사창첩한다(月到紗窓妾恨多) 달 비친 사창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약사몽혼행유적(若使夢魂行有跡) 꿈 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전석로반성사(門前石路半成沙)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 걸
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타내는 시이다. 임을 그리워하여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으면 돌길이 다 부서져 모래가 되었겠는가로 간절한 심경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시는 한문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 받고 있지만 尹鉉(조선 중종--선조때 문신)이 지은 " 題贈淸州人"이라는 시와 표절 논란이 있다.(自述이란 제목으로 된 본도 있음)
*사창(紗窓) 얇은 비단으로 만든 창이란 뜻이지만  여자가 기거하는 방을 이르기도 함.

영월도중(寧越道中) 영월로 가면서
五月長干三日越(오월장간삼일월) : 오월 긴 산을 삼 일만에 넘어서니
哀歌唱斷魯陵雲(애가창단노릉운) : 노릉의 구름에 애처로운 노래 끊어진다
安身亦是王孫女(안신역시왕손녀) : 내 몸 또한 왕가의 자손이라
此地鵑聲不忍聞(차지견성불인문) : 이 곳 두견새 우는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간(干)은 산골짜기다, 노릉(魯陵)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을 말한다. 장릉은 조선의 제6대왕 단종의 무덤이다. 왕손은 옥봉이 왕가의 후손을 말한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은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이 시는 옥봉이 삼척부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가는 길에 영월을 경유하면서 비운의 죽음을 당한 단종의 한을 노래한 작품이다.

爲人訟寃(위인송원) 원통함을 아룁니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 (유두수작유)물로 기름을 삼아 머리 빗었네
妾身非織女 (첩신비직녀)제가 직녀가 아니니
郞豈是牽牛 (랑기시견우)임께서 어찌 견우이리
중국 당나라 대 시인인 이백이 신분이 낮았던 시절 소를 몰고서 현령이 있는 마루앞을 지나가는데 현령의 아내가 화를 내면서 꾸짖으니 현령의 처에게 사과하여 지은 시의 한 구절인 고비시직녀(苦非是織女) 그 대가 직녀가 아니라면, 하필문견우(何必問牽牛)어찌 견우에게 묻는가? 를 사용한 것으로 옥봉은 이 시구를 이용하여 소도둑으로 몰린 억울한 사람을 구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옥봉과 조원이 헤어지게 되는 단초(端初)가 되는 작품으로 이옥봉행적(李玉峯行蹟)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옥봉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원에게 버림받고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칠석(七夕) 칠석
無窮會合豈秋思(무궁회합기추사) : 끊없이 만나니 어찌 가을 수심 있을까
不比浮生有離別(불비부생유이별) : 덧없는 인간의 이별과 견줄 수가 없도다
天上却成朝暮會(천상각성조모회) : 하늘에는 도리어 아침저녁 만나는데
人間漫作一年期(인간만작일년기) : 사람들은 부질없이 일 년만에 만다 하네.

불비(不比)는 견줄 수 없다는 뜻이고 부생(浮生)은 덧 없는 인생을 말한다. 따라서 “덧없는 인생 중에 이별만큼 슬픈 것은 없다”는 뜻이다. 만(謾)은 속이는 것이다. 이 시는 견우와 직녀의 이별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작자 자신의 이별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사람들이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한번 칠석에 만난다고 말하는 것을 옥봉은 부질없이 하는 말로 여겼다. 하늘에선 견우성과 직녀성이 매일 만난다고 본 것이다. 또한 옥봉은 인간이 느끼는 슬픔 중에 이별이 가장 애절한 것이라 노래하였다. 따라서 이시는 임과 헤어진, 이별의 아픔을 칠석을 통해 표현한 작품이다. 

離恨(이한)  이별이 한이되어

平生離恨成身病(평생이한성신병) :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 술로도, 약으로도 못 고칩니다
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 이불 속 눈물 얼음 아래 물같아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 밤낮을 흘러도 사람들 모르리라.

“이별의 한이 병이되어 술로도 달랠 길 없고 약속으로도 고칠 길 없다.”는 작자의 절규는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에 집약된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하고 홀로 흘리는 눈물은 이별의 후유증이다. 따라서 이시는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작품이다.

사인내방(謝人來訪) 사람이 찾아 준 것이 고마워
飮水文君宅(음수문군댁) : 탁문군 집, 우물같고
靑山謝朓廬(청산사조려) : 산 속, 사조의 오막살이로다
庭痕雨裡屐(정흔우리극) : 뜰에는 비 온 뒤 발자국
門到雪中驢(문도설중려) : 눈 속에 나귀 이미 문 앞에 와 있다.
음수(飮水)는 지명이니 옥봉이 살던 곳이다. 문군(文君)은 탁문군이다. 탁문군은 중국 전한 임구의 부호인 탁왕손의 딸로서 사마상녀(司馬上女)가 타는 거문고 소리에 반하여 집을 빠져 나와 그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둘째 줄의 사조(射眺)는 중국 육조시대 제나라의 시인으로 음조에 뜻을 담은 시풍인 영명체에 가장 뛰어 났다고 한다. 빗속에 나막신과 눈 속에 나 귀는 어려운 발걸음을 비유한 것이니 이 시는 어려운 발걸음을 한 손님에게 고마움을 사례한 작품이다.

玉峯家小池 옥봉집 작은 연못
玉峯涵小池(옥봉함소지) : 옥봉의 집, 작은 연못
池面月涓涓(지면월연연) : 못 위에 달빛이 은은하다
鴛鴦一雙鳥(원앙일쌍조) : 원앙새 같은 한 쌍의 새
飛下鏡中天(비하경중천) : 거울 속 하늘로 날아 든다.
원앙(鴛鴦)은 임에게 사랑 받 고 싶어 하는 옥봉의 감정이 반영된 “객관적 상관물”이다. 따라서 이 시는 금슬 좋은 원 앙을 등장시켜 임에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작가의 감정을 진솔하게 들어낸 작품이다.

 

離怨 이별의 아픔
深情容易寄(심정용이기) : 깊은 정 쉽사리 전해드리려
欲說更含羞(욕설갱함수) : 말로 다하려니 더욱 부끄럽도다
若問香閨信(약문향규신) : 임이 만일 내 소식 묻거든
殘粧獨依樓(잔장독의루) : 화장도 지운채 누각에 혼자 있다 하소서.

심정은(深情)은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용이(容易)는 글로 표현하기 쉽다는 말이다. “더욱 부끄럽다”는 말하고 싶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작자의 갈등을 나타낸다. 신(信)은 소식이다. 잔장(殘粧)은 쓸쓸한 작자의 심정과 임에 대한 체념이 드러난 절묘한 표현이다. 따라서 이 시는 이별을 원망하는 작자의 마음이 애절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규정(閨情) 여자의 마음
有約郞何晩(유약랑하만) : 약속했는데 임은 어찌 늦으시나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 뜰 위 매화꽃이 피려는 때로구나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 갑자기 들리노니, 가지 위 까치소리
虛畫鏡中眉(허화경중미) : 거울 속의 눈썹을 부질없이 그려봅니다.

욕사(欲謝)는 지려고 한다는 뜻이다. 까치 소리는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는 암시로 임을 기다리는 작자의 심정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헛되이 그리는 눈썹은 부질없이 기다리는 작자의 마음을 뜻한 다. 이 시는 옥봉의 대표작중의 하나로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애타는 마음을 잘 그린 작품이다.

추사(秋思) 가을 심사
翡翠簾疏不蔽風(비취염소불폐풍) : 푸른 발 성글어 바람 막지 못하고
新凉初透碧紗襱(신량초투벽사룡) : 선선 기운 푸른 깁치마에 스며든다
涓涓玉露團團月(연연옥로단단월) : 방울지는 흰 이슬과 반짝이는 달빛
說盡秋情初夏蟲(설진추정초하충) : 가을 삼사 풀어내는 초여름 풀벌레 소리.

사룡(紗櫳)은 사창(紗窓)이니 여자가 거하는 아름답게 꾸민 방을 의미한다. 연연(涓涓)은 이슬이 가늘게 흐르는 모양이고 단단(團團)은 달이 둥근 모양이다. 단지 가을바람과 한기, 이슬, 달, 벌레등의 자연물을 등장시켜 작자의 감정을 반등하도록 하였다고 했고 임기연은 벌레들의 울음소리는 벌써 가을이 왔음 알리는데 달빛 비치는 가을밤에 임이 곁에 없으니 가을기운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진다고 하여 마음의 추위에 고독감이 증폭되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이시는 작자가 직접적으로 이별의 한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쓸쓸한 가을의 풍경을 통해 직접적으로 외로운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 보천탄 여울에서
桃花高浪幾尺許(도화고랑기척허) : 복사꽃 핀 물가의 물결 몇 자인지
銀石沒汀不知處(은석몰정부지처) : 하얀 바위 물에 잠겨 어딘지도 모르겠다
兩兩鸕鶿失舊磯(양량로사실구기) : 짝지어 나는 가마우지 옛 물가 잃었고
銜魚飛入菰萍去(함어비입고평거) : 먹이 물은 물고기는 풀섶으로 날아든다.

셋째 구절의 로사(鸕鷥)는 가마우지과의 물새로 몸은 검은데 등과 죽지에 푸른 자주색 광택이난다. 부리가 길고 발가락사이에 물갈퀴가 있으며 물고기를 잡아먹는다. 넷째 구절의 고포(菰蒲)는 줄풀과 부들이니 모두 다년생 수초로 자리를 만든다. 이시는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백성들이 꿋꿋이 인고하는 삶의 모습을 노래한 작품이다 

별한(別恨)  이별의 한

明宵雖短短(명소수단단) : 임 떠나는 내일 아침 짧고 짧아도
今夜願長長(금야원장장) : 임 만나는 오늘밤일랑 길고 길었으면
鷄聲聽欲曉(계성청욕효) : 닭우는 소리 들려오고 날이 새려니
雙瞼淚千行(쌍검루천행) : 두 뺌에는 눈물이 천가닥 흘러내린다.

임을 모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 날이 더디 새기를 바라는 작자의 애절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임과의 이별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작자의 모습을 “눈물 천줄기”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임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나타낸 작품이다.

등루(登樓)  누대에 올라
小白梅逾耿(소백매유경) : 작은 흰 매화꽃 더욱 빛나고
深靑竹更姸(심청죽갱연) : 짙푸른 대나무는 한창 곱구다
憑欄未忽下(빙난미홀하) : 난간에 기대어 홀연히 내려오지 못하니
爲待月華圓(위대월화원) : 달 떠올라 둥글어질 때까지 기다리노라.
매화와 대나무는 지조 있는 선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옥봉 자신을 상징한다. 월화는 달빛을 말하고 여기서 달이란 임을 말한다. 임을 기다리는 지조 있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한 작품이다.

즉사(卽事) 본대로 짓다
柳外江頭五馬嘶(유외강두오마시) : 버드나무 너머 강 언덕에 다섯 말이 우는데
半醒愁醉下樓時(반성수취하루시) : 누대를 내려 올 때 술 절반 깨자 또 근심에 취했어요
春紅欲瘦臨粧鏡(춘홍욕수림장경) : 봄날 붉은 꽃들 시들어갈 때 경대에 앉아
試畵梅窓却月眉(시화매창각월미) : 매화꽃 핀 창가에서 반달같은 눈썹을 그려보았지요.

류(柳)는 이별을 의미하고 오마(五馬)는 태수가 타던 수레를 끄는 다섯 마리 말이니 첫째구는 헤어진 임이 오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임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수심에 취한 것이라는 표현은 정말 절묘하다. 임이 오시는 소리를 듣고 수심이 반쯤 깨인 것이다. 춘홍(春紅)은 작자 자신을 가리킨다. “임에게 보여줄 눈썹을 시험 삼아 그려본다.”는 말에는 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옥봉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홍만종은『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이 시를 예로 들어 “국조제일의 여류 시인이다”라고 극찬하였다.

누상(樓上) 누각에서
紅欄六曲壓銀河(홍란육곡압은하) : 붉은 난간의 여섯 노래가 은하수를 누르고
瑞霧霏微懸翠羅(서무비미현취라) : 상서로운 안개 흩날려 푸른 휘장에 걸려있다
明月不知滄海暮(명월부지창해모) : 밝은 달빛에 바다에 해 지는 줄도 모르겠는데
九疑山下白雲多(구의산하백운다) : 구의산 아래에는 흰 구름이 짙어지는구나.

구의산은 순(舜)임금과 그의 부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이별의 슬픔이 간직된 곳이다. 아황과 여영은 요(堯)임금의 두 딸로 순임금의 첫째 왕비와 둘째 왕비였다. 순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숙상강(肅湘江)을 건너지 못하고 슬피 울다가 대나무 마디를 물들이고 순임금을 따라서 상수(湘水)에 빠져 죽어 상수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달이 임을 상징한다면 흰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달처럼 보이지 않는 임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우(雨)  비
終南壁面懸靑雨(종남벽면현청우) : 남산 벼랑에 푸른 비 걸려있고
紫閣霏微白閣晴(자각비미백각청) : 자색 누각에 흩뿌리고 흰 누각은 개었구나
雲葉散邊殘照淚(운엽산변잔조루) : 구름 터진 사이로 저녁 햇살 흘러나오고
漫天銀竹過江橫(만천은죽과강횡) : 하늘 가득 뻗은 은빛 대나무 강 건너 걸쳐있다.

종남(終南)은 중국 장안(長安) 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을 가리키지만 이 시에서는 목 멱산(木覓山)이니 남산의 옛 이름이다. 자각(紫閣)과 백각은 본래 종남산의 산봉우리 이름 인데 이시에서는 남산 봉우리를 나타낸다. 은죽(銀竹)은 소나기를 의미한다. 이시는 여름 철 변덕을 부리며 지나가는 소나기의 모습을 그린 회화적인 시로써 청(靑), 자(紫),백(白) 등의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송별(送別)  이별하며
人間此夜離情多(인간차야이정다) : 이 밤, 우리 이별 너무 아쉬워
落月蒼茫入遠波(낙월창망입원파) : 달은 멀리 저 물결 속으로 지고
借問今宵何處宿(차문금소하처숙) : 묻고 싶어요, 이 밤 어디서 주무시는지
旅窓空聽雲鴻過(여창공청운홍과) : 구름 속 날아가는 기러기 울음에 잠 못 이루시리,



秋恨 가을의 한
絳紗遙隔夜燈紅(강사요격야등홍) 붉은 비단 너머로 한밤의 등불만 밝고
夢覺羅衾一半空 (몽각나금일반공)꿈에서 깨어나니 이불 한쪽이 빈자리네
霜冷玉龍鸚鵡語 (상냉옥룡앵무어)차가운 서리에 새장의 앵무새 울고
滿堦梧葉洛西風 (만계오엽낙서풍)섬돌가득 오동잎이 가을바람에 진다
첫줄의 강사(降紗)는 불근 비단으로 된 휘장이다. 옥룡(玉龍)은 새장이다. 앵무(鸚鵡)는 작자 자신을 비유한다. “임의 부재를 노래한 것이다. 밤중에 꿈에서 깨어 습관적으로 옆을 더듬어 보니 있어야할 사람이 없다. 밤중이라 비단 휘장의 색깔을 알 수 없었겠지만 등불에 비치어서 붉은 색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시는 작자가 느끼는 처절한 외로움과 이별의 한을 앵무새를 통해 드러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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