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非花(화비화) 꽃이 아닌 꽃
花非花 (화비화) 꽃이면서 꽃이 아니고
霧非霧 (무비무) 안개인 듯 안개 아니로다.
夜半來 ((야반래) 한밤중에 왔다가
天明去 (천명거) 날이 새면 떠나는데.
來如春夢幾多時(래여춘몽기다시) 봄꿈처럼 살짝 와서 잠깐 동안 머물다가
去似朝雲無覓處(거사조운무멱처) 아침 구름처럼 떠나가니 찾을 곳이 없어라
------白居易(백거이)------
註.
夜半(야반) : 한밤중
天明(천명) : 동틀 무렵
幾多時(기다시) : 그 얼마나 긴 시간인가, 즉 짧다는 말.
來如春夢幾多時(내여춘몽기다시) : 봄날 꿈같기가 얼마이던가? 즉, 꿈속에서 만나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뜻.
無覓處(무멱처) : 간 곳을 찾을 수 없다. (覓은 찾을 멱)
백거이는 시 한 수를 완성할 때마다 그걸 집안일 하는 노파에게 먼저 읽어주고 노파가 뜻을 이해하면 그제야 자신의 시로 기록했다고 한다.
그의 시를 ‘산둥(山東) 사는 노인이 농사짓고 누에 치듯 모든 말이 다 사실적이다’라고 평가한 이도 있다.
자신의 박학다식을 활용해 삶의 철학, 남녀 간의 곡진한 연정 따위를 묘사한 작품도 적지 않지만 어쨌든 그의 시가 쉽고 통속적이었다는 걸 증명하기엔 충분하다.
이 시는 좀 유별나다. 시어도 쉽고 구성도 단순한데 시인이 무얼 말하려 하는지는 가물가물하다.
한밤에 왔다가 날이 새면 떠나는 이것,
일장춘몽처럼 잠깐 머물다가 아침 구름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것.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이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꽃처럼 안개처럼 춘몽처럼 구름처럼 아름답고 달콤하되
쉬 사라져버리는 그 무엇은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추억일까.
피할 수 없는 인생무상의 허무함일까.
남녀 간 사랑의 허망함에 대해 읊은 옛날 중국의 유명 詩와 賦 중 셋을 꼽으라면, 그 첫 번째는 白居易의 “花非花(화비화)”이고, 다음은 宋玉의 "高堂賦(고당부)“와 曹植의 "洛神賦(낙신부)"라고 한다.
명대 문인 양신(楊愼)은 자신이 유독 백거이의 시 花非花를 사랑한다면서 그 이유를 송옥의 ‘고당부(高堂賦)’, 조식의 ‘낙신부(洛神賦)’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이 작품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그 두 작품은 인간과 신녀(神女)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묘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시는 시인이 남녀 간 사랑의 허망함에 대해 한번 무람없는 상상을 해본 것인지도 모른다.(옮겨온 글 일부 보완)
*무람 : 부끄럽거나 무안하여 삼가고 조심함.
*高唐赋(고당부)는 戰國末期(전국말기) 辭赋家(사부가) 宋玉이 창작한 赋(부)이다. 이 赋는 序에서 楚襄王과 神女가 巫山에서 남녀가 만나 즐긴, 즉 歡會한 이야기를 적었다. 여섯 段으로 나누어져있다.
*洛神賦는 삼국 시대에, 위(魏)나라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지은 산문부(散文賦)로 신화중 복비(宓妃)의 고사를 기초로 하여 낙신이라는 미녀를 창조하였고, 전기적(傳奇的)인 색채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 시는 전당시(全唐詩)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歌行體(가행체) 雜言詩(잡언시)로 분류되여 수록되여 있지만 시의 형태는 唐詩의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로 宋시대 유행한 詞(사)의 형식에 더 가깝다고 한다.
詩의 내용은 송옥의 무산 신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그리운 사람이 꿈에 나타나 아침이면 사라지니 그리움을 채울 수 없다고 표현한 시이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시인 송옥(宋玉)의 〈高唐賦(고당부)〉 서(序)에 초(楚)나라 회왕(懷王)이 고당(高唐)을 유람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한 부인이 나타나 스스로 칭하기를 ‘무산신녀(巫山神女)’라 하였다. 회왕은 그녀와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이별에 임해서 무산신녀가 “저는 무산의 남쪽 고악산(高丘山) 험한 곳에 사는데,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어 아침이면 아침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양대(陽臺) 아래에 있을 것입니다.
[妾在巫山之陽 高丘之阻 且爲朝雲 暮爲作雨 朝朝暮暮 陽臺之下]”라고 하였다. ‘雲雨(운우)’는 훗날 남녀 간의 환회(歡會)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歌行體 : 가행체는 고체시 형식중 하나로 작품의 구절 수에 제한이 없고 격률(格律)이 비교적 자유로우며, 한 구절에 들어가는 글자 수도 기본적으로 일곱 글자를 기본으로 하지만 중간에 세 글자나 다섯 글자, 아홉 글자로 된 구절을 삽입하기도 하였다.
얼마전 71세의 일기로 사망한 일본의 피아니스트인 류이치 사카모토 가 1996년 작곡한 a flower is not a flowers (꽃이 꽃이 아니다)는 위의 詩 화비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하였다 한다. 가사가 없던 원곡에 사카모토의 오랜 동료인 오오누키 타에코의 보컬을 입혀 2010년 flowers라는 제목으로 발매했다. 가사를 아래 올립니다
밤이슬에 젖은 그 잎은 접혀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잠들고
꽃은 깨어나 달을 바라보네
이름은 자귀나무 (자귀나무는 밤에 잎이 오므라드는데 이 모습이 잠자는 것 같다고 해서 일본에서는 네무노키, 잠의 나무라고 부른다 밤이 되어 잎은 잠들고 꽃만 깨어나 달을 본다는 내용)
무르익은 여름 밤은 깊어만 가는데
지나간 세월의 끝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솔로몬의 반지를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모자이크
잊혀진 방 한구석
태양조차 닿지 않는 채로
나는 빛을 향해 몸을 돌리고
이윽고 감싸여 타들어 가네
당신의 창문에서
향긋한 향기 부드러운 그 손가락이
내게 닿아줄 날을 기다리네
그리운 에덴을 꿈꾸면서…
백거이(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唐 대력(大曆) 7년(772년), 뤄양(洛陽) 부근의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県, 지금의 허난성 신정시)에서 가난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던 그는 5, 6세때 이미 시를 짓고, 9세 때에 호율(號律)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가난한 학자 집안으로 대부분 지방관은 지방관으로서 관인 생활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특출난 명문가라고 할 수 없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의 정치 개혁에서 비교적 낮은 가계 출신에게도 기회가 열렸다. 10세에 가족들에게 벗어나 장안(長安) 부근에서 교육을 받았다. 정원(貞元) 16년(800년) 29세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2세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長恨歌)」는 장안의 자랑거리일 정도로 유명하다.
백거이의 지우였던 원진은 백거이의 문집 《백씨장경집》 서문에서, "계림의 상인이 (백거이의 글을) 저자에서 절실히 구하였고, 동국의 재상은 번번이 많은 돈을 내고 시 한 편을 바꾸었다"고 하여, 당시 백거이의 글이 신라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810년에 당 헌종이 신라의 헌덕왕(憲德王)에게 보내는 국서를 황제를 대신해 지었으며, 821년에서 822년 사이에 신라에서 온 하정사 김충량(金忠良)이 귀국할 때 목종(穆宗)이 내린 제서도 그가 지었다.
35세에 주질현위(盩厔縣尉)가 된 것을 시작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 좌습유(左拾遺)를 역임했다. 이 무렵 당시 사회나 정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신악부」라 불리는 작품들을 많이 지었다. 관인으로서 그의 경력은 성공적이었지만, 원화(元和) 10년(815년) 재상 무원형(武元衡)이 암살된 사건의 배후를 캐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월권행위라 하여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의 사마(司馬)로 좌천당했다. 그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라는 명이 내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이 지방관을 자처하여 항저우(杭州, 822년부터 824년까지), 쑤저우(蘇州, 825년부터 827년까지)의 자사(刺使)를 맡아 업적을 남기고 그 지역을 성공적으로 다스렸다.
특히 항저우에 재직하는 동안 시후(西湖)에 건설한 백제(白堤)라는 제방은 소동파가 만든 소제(蘇堤)와 더불어 항주의 명소로 유명하며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항저우에서 재직하는 동안 항상 나무 위에 올라 참선하여 새둥지라는 뜻의 '조과'란 별명을 가진 '도림 선사'와의 일화가 재미있으며 다양한 버전이 있다. 약술하자면 백거이가 도림선사에게 불법을 묻자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은 다 하라'고 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 어린 애도 아는 이야기'라며 일축하자, 도림선사가 '세 살 아이도 알지만, 여든인 노인도 평생을 통해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다.
개성(開成) 원년(836년)에 형부시랑(刑部侍郞), 3년(838년)에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이 되었으며,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년)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때 그의 나이 71세였다. 74세에 자신의 글을 모아 《백씨문집(白氏文集)》(백씨장경집) 75권을 완성한 바로 이듬해 생애를 마쳤다.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 장경집>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인 <백씨 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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