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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이 있는 한시

古秋獨夜(고추독야)

by 까마귀마을 2023. 9. 14.

       古秋獨夜(고추독야) 늦가을 밤에 홀로

井梧凉葉動(정오량엽동) 우물가 오동나무 서늘해지니  잎이 지고

隣杵秋聲發(인저추성발) 이웃집 다듬이질에 가을 소리 퍼진다

獨向檐下眼(독향담하안) 홀로 처마 아래 에서 졸다가

覺來半牀月(각래반상월) 깨어 보니 침상에 반이 달빛.

                        ------白居易-----

 

註.

凉(량) : 서늘하다, 쓸쓸하다, 황폐해서 서글프다.

杵(저) : 절굿공이, 다듬잇방망이.

發(발) : 여기서는 퍼지다.

檐(첨) : 처마,

覺來(각래) : 깨닫다,

牀(상) : 평상.

 

집 안마당 한켠 우물가에 심어져 있는 오동나무.

오동은 가을을 알리는 나무다.

누렇게 물든 오동잎,

하나, 둘,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이 온다.

아낙네들은 갑자기 마음이 분주 해졌다. 추워 지기전에 지난 철 장농에 넣어 두었던 옷가지를 꺼내 손을 봐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가을을 음미하던 시인은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처마 밑 방에 들어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보니 어느새 떠오른 달이 시인이 누워있는 평상의 절반을 비추고 있다. 

다듬이 소리가 주는 청각적 이미지와  달빛이 주는 시각적 효과가 아주 절묘하게 어울린다. 

다듬이 소리나 달빛이나 고독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는 매 한가지다.

처마 밑으로 비껴 떨어지는 달빛의 공허함이 평상에 누워 있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 아낙네들의 다듬이질 소리, 침상에 스며든 하얀 달빛, 시인의 소회(所懷)는 어떠하였을까?

전체적으로 흐르는 기조(基調)는 외로움이다. 시인은 가을의 외로운 속성을 시인 자신의 고독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외로운 가을을 시인은 혼자서 맞이하고 있으니, 외로움은 배가(倍加)될 수밖에 없으리라.

계절은 어김이 없다. 

아직 무더위가 여전하지만 낙엽되어 떨어지는 오동나무 잎엔 이미 가을이 가까이 와 있다. 멀리 길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이웃 아낙네들의 다듬이 소리에는 기다림의 염원이 실려 있다. 자신도 모르게 침대 한켠에 찾아 온 달빛은 가을이 짙게 채색되어 있다. 누구라서 가을이 오는 것을 싫어 할까만, 문제는 외로움이다. 

생명의 조락(凋落)이 귀로 들리고 눈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세월의 무상함 또한 가을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시를 읽다보면 처량하고 쓸쓸하며 외로움이 한 가득 실려 오는것 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가을을 앓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순응을 통해 성숙된 삶의 자세를 기르라고 말하는 것도 가을 아니던가? (일부 옮겨온 글 보완)

 

가을의 소리는 어떤 소리 일까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로 문장을 떨친 송나라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 :가을소리)로 알아 봅니다. 歐陽修(구양수) 의秋聲賦(추성부)는송 인종(宋 仁宗) 가우(嘉祐) 4년(1059년)가을구양수가 53세 때 지은 작품이라 합니다.구양수가 가을바람 소리를 들은 감흥을 동자(童子)와의 대화 형식을 빌려 가을 소리가 주는 처량함과 가을의 의미를 말하며 인생의 덧없음을 탄식하였다.

부(賦)는 한문 문체의 하나로 본래 시경(詩經)의 표현 방법의 하나이며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詩 형태이다. 秋聲賦의 한글 번역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번역본을 옮겨와 올립니다.


구양수의 가을소리

 구양자(歐陽子)가 마침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오싹하여 귀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 소리가 나고 나무에 바람 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랑 쨍그랑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며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대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暗淡)하여 안개는 자욱하고 구름은 모인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후는 살을 에는 듯이 추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들며, 가을의 정취는 스산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여 울부짖으며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짙푸르고 무성함을 다투며,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사람들을 즐겁게 할 만하더니, 풀들은 가을바람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을 꺾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가을 기운이 남긴 위력 때문이다.

가을은 형옥을 집행하는 관리이며, 계절로 치면 음(陰)의 때이며, 또한 용병의 상징이며, 오행(五行)으로는 금(金)에 속하니,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쌀쌀한 기운이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七月)의 음률에 해당한다.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살육의 뜻이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한다.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자신의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불그스레한 얼굴이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어찌하여 금석(金石) 같은 육체도 아니면서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잔인하게 해치려는 것을 생각해야 하거늘, 또 하필이면 가을 소리를 원망하는가!
 
 
백거이

당나라 중기의 시인이다.

중국문학을 말할 때 唐詩(당시)라고 표현할 정도로 나라 때 시 문학이 황금기를 누렸다.

흔히 唐詩는 初唐(초당), 盛唐(성당), 中唐(중당), 晩唐(만당)의 네 시기로 구분 하는데 이백과 두보는 성당시기에  백거이는 중당시인으로 분류한다.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낙양 부근 신정(新鄭)의 하층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숙부들은 모두 관직 생활을 했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하는데,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갈 지(之)’ 자와 ‘없을 무(無)’ 자 두 자를 구분할 수 있었고, 다섯 살에는 시 짓는 방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열여섯 살 무렵 이미 시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시선(詩仙)’이라 일컬어지는 당나라 최고의 시인 이백은 시를 쓸 때 한 잔 술에 막힘없이 한 번에 써 내려갔다고 하며,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시인 두보는 열 번의 손질을 했다고 한다.  백거이는 시를 탈고할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는 노파가 알아 들었는지를 묻고, 만약 모르겠다고 하면 그녀가 뜻을 알 때까지 몇 번이고 고친 후에야 비로소 붓을 놓았다고 한다. 그의 시는 쉬운 어휘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속적이면서도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문장은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것에 맞춰 써야 하며, 문장은 문장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변화를 선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00년 스물아홉 살의 백거이는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803년 비서성 교서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료 원진(元縝)과 함께 당시 정세를 진단하고, 각종 폐단들을 고해 올렸다. 또한 민생 안정을 위해 감세 정책과 극형 폐지 등을 주장했으나 권세가들의 반감을 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교서랑의 임기를 마친 백거이는 806년 장안에서 가까운 현의 현위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처사 진홍(陳鴻), 왕질부(王質夫)와 친분을 쌓고 그들과 함께 마외파를 유람하고, 양귀비의 묘를 찾았다. 백거이는 왕질부의 제의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담은 장편시 "장한가"를 썼다.

 

808년 백거이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황제에게 직접 간언할 수 있는 좌습유에 임명되었다.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그는 황제에게 위민 정책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직접 진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황제와 관리들의 잘못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지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적인 정치적 성향과 비판적 견해는 권문세가들의 미움을 샀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느꼈던 당 현종은 결국 그를 경조부의 호조참군으로 강등시켰다. 811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812년 딸까지 병으로 죽자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머물렀다.

 

백거이는 강주에서 가까운 노산에 지은 초당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시련을 바탕으로 일생일대의 걸작 "비파행"(琵琶行)을 지었다. 어느 가을날 백거이는 강가에서 손님을 배웅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구슬픈 비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을 방랑하는 늙은 기생의 연주였다. 기생의 가련한 이야기를 들은 백거이는 그녀를 동정하는 한편 변방에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 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백거이는 그런 한탄을 단숨에 시로 남겼다.

 

820년 백거이는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 주객낭중으로 임명되었고, 821년에는 다시 중서사인으로 승진하는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던 중 822년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의 당쟁이 심해지자 다시 외직인 항주 자사로 보내졌다. 그는 그곳에서 백성들을 위해 우물을 파고, 서호(西湖)에 제방을 쌓아 저수사업과 관개사업을 시행했다. 만년에는 조정에서 비서감, 하남윤,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다 846년 75세에 사망했다.

 

백거이가 815년 강주 사마로 좌천되기 이전에 쓴 사회 들은 중국 문학사상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작품들은 당시의 정치, 사회, 생활상과 그에 대한 비판이 돋보인다. 더불어 작품들의 분위기가 서민적이고 어휘와 문장의 구성이 쉬우면서도, 내용면에서는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백거이가 남긴 시는 3천여 수가 넘는데, 그는 스스로 자신의 시를 풍유시(諷喩詩), 한적시(閑適詩), 감상시(感傷詩), 잡률시(雜律詩)로 나누었다. 백거이의 작품들은 어휘와 문장이 통속적, 일상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백거이의 시는 계층을 막론하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당시에도 널리 읽혔다.

하지만 그의 작품 중 단연 의미가 큰 것은 172수의 풍유시들이다. 그중 "진중음"(秦中吟)〉 10수와 신악부(新樂府) 50수가 으뜸으로 꼽힌다. 그는 풍유시를 통해 과중한 세금, 관리들의 횡포, 부역의 고통 등을 직설적으로 묘사하여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그려 냈다. 또 그와 반대로 권력 계층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비판했다. 이러한 백거이의 행동은 왕조 시대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대담하고 도발적인 행동들이었다. 백거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백성들을 위해 대신하고 앞장섰기에 그와 그의 시들은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다.(다음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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