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道吟 (락도음) 도를 즐기는 노래
家在碧山岑 (가재벽산잠) 푸른 산봉우리에 조용히 살고 있어도
從來有寶琴 (종래유보금) 옛 부터 내려온 좋은 거문고 있네
不妨彈一曲 (불방탄일곡) 한 곡조 탄들 아무도 방해하지 않겠지만
祗是少知音 (지시소지음) 이 노래의 뜻을 누가 알아 주리오.
---- 李資玄(이자현) ----
註.
岑(잠) : 봉우리
碧山岑(벽산잠) : 푸른산, 묏부리
從來 (종래) : 이전부터
不妨(불방): 방해되지 않는
彈(탄) : 팅기다, 연주하다.
祗(저) : 다만
知音(지음) : 나를 알아주는 사람 ( 중국 전국 시대에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백아는 거문고 연주로 이름난 음악가였다. 백아가 마음 속에 생각을 담아 이를 곡조에 얹어 연주하면, 종자기는 곁에서 묵묵히 듣고 있다가, 백아의 마음 속 생각을 알아맞히곤 하였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는 생각을 하며 연주를 하면, 종자기는 아득히 높은 것이 태산과 같다고 말하였고, 흐르는 강물을 떠올리며 연주하면 넘실대는 강물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하였다.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종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소리[音]를 알아듣는[知]다 하여 지음(知音)의 벗으로 사귀었다. 이후로 지음(知音)이란,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까지 다 이해하는 벗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다가 자기의 음악을 이해해 주던 종자기가 먼저 세상을 떴다. 백아는 절망한 나머지, 자기의 거문고 줄을 칼로 부욱 그어 다 끊어 버리고 말았다. 세상에는 이제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면서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 이것을 두고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 하여 백아절현(伯牙絶絃-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한다.
*첫째구절 家在가 家住로 된 판본도 있다
이 시는 고려 중기의 학자인 청평거사(淸平居士)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의 작품이다.
맑고 고운 시다. 속세를 떠난 방외거사의 은일의 멋이 배어 있는 시다. 그러면서도 거문고 가락을 함께 들을 벗을 사모하는 그리움이 듬뿍 담긴 따스한 시다
이자현은 당대 권문세도가였던 인주(仁州) 이씨 집안의 적손으로 22세 때인 1083년 과거에 급제하였고, 28살인 1089년(선종 6년)에는 요즘으로 치면 국립교향악단 단장에 해당하는 대악서승(大樂署丞)이 되었다. 이자현의 조부인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은 문종의 최측근으로 최충을 이어받아 문하시중을 역임하였으며, 자기 세 딸을 문종비로 들여보내 외손주 3명이 왕이 되었다. 자현의 고모 3명이 왕비요, 그들에게서 난 순종(12대), 선종(13대), 숙종(15대)이 자현의 고종사촌들이었으니 자현은 혈통이 왕가와 닿아있는 그야말로 경화거족(京華巨族 : 서울의 번화한 곳에 살면서 대대로 번영을 누리는집안)의 자제로 출세가 보장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악서승직을 끝으로 관직을 정리하고, 춘천의 청평산(淸平山, 오늘날의 오봉산)에 들어가서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普賢院)을 문수보살을 두번이나 친견하였다 하여 문수원(文殊院)이라 개칭하고 이곳에서 평생 나물밥과 베옷으로 생활하며 불경을 읽고 참선을 즐겼다.
문수원은 청평산 주봉을 뒤로 하고, 소양강 물줄기가 남으로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이오, 남쪽으로 앉아서 먹을 갈고 북쪽 마당에 꽃을 가꾸는 연남화북(硏南華北 )의 길지이니, 글 읽기 더없이 좋은 곳이로다. 은거한 선비의 산골살이에 무슨 번잡한 가재도구가 필요하랴만, 그래도 하 아쉬워 가전(家傳)되어 온 좋은 거문고를 짊어지고 들어왔다. 호수에 흩어지는 달빛을 바라보며 뜯는 거문고의 청량한 가락이 세월을 잊게 한다. 이 벽촌에 어느 이웃이 있어 내 풍류를 방해하랴만, 다만 아쉬움은 함께 듣고 즐길 친구가 없음이라.
그가 홀연히 속세를 등진 동기에 대해서는 고분지환(叩盆之患), 즉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는 어려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나 일찍부터 선계(仙界)를 동경하는 마음, 즉 자하상(紫霞想 : 신선이 되고자 하는 마음 (신선은 보랏빛 노을을 타고 다닌다에서 연유)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이인로가 쓴 『파한집(破閑集)』에는 “언젠가 복술사 은원충을 따라 심산명승지를 몰래 찾아다니다가 발걸음이 청평산에 미치자 은공은 이 곳이야말로 피세지경(避世之境 :세상을 피해 숨을만 한 곳)이라 했다. 벼슬이 대악서승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버리고 홀연히 청평산에 들어가 문수원을 꾸미고 살았다”라고 했다.
자현의 또 다른 고종 사촌형이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그러나 자현은 스님이 되지 않은 채 불법(佛法)을 수행하는 거사(居士) 불교인으로 평생 불도를 닦았다. 이자현 이후 그를 추종하여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에 매진하는 재가불자, 즉 거사불교가 유행하게 되었다. 조카뻘에 해당되는 고려조 제16대 예종(睿宗, 재위 1105∼1122)이 다향(茶香)과 금백(金帛 : 금과 비단)을 보내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그는 “처음 도성 문을 나올 때 다시 서울을 밟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니,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始出都門, 不復踐京華, 不敢奉詔)”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문을 지어 올렸다.
以鳥養鳥, 庶無鐘鼓之憂(이조양조, 서무종고지우)
새를 새답게 기르시어, 백성들이 종치고 북치는 근심을 없게 하시고
觀魚知魚, 俾遂江湖之性(관어지어, 비수강호지성)
물고기를 보고 그 마음을 아시어, 강호에 살려는 뜻을 이루게 하소서.
당대 최고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나이에 입산하여 고고(孤高)한 인생을 살아서인지, 이자현은 고려 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많은 선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세상사를 초월하고 안빈낙도한 그의 소박한 삶은 지인과 후학들에 의해 숱한 시로써 예찬되었다.
1125년(인종 3) 이자현은 37년 동안 청평산에 머문 후 6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자현의 신도비인 <진락공 중수 청평산 문수원기>에는 그의 생활을 “배가 고프면 향기로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이름난 차를 마시니, 오묘한 쓰임이 종횡으로 이루어져 그 즐거움이 끝이 없었다 (飢餐香飯 渴飮名茶 妙用縱橫 其樂無涯)”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일 내린 시호도 진락(眞樂)이다. 인생의 진정한 즐거움을 누린 분이라는 매우 적절한 시호다.(옮겨온 글을 일부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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