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취미 생활/한문서예

桃李不言 下自成蹊(도리불언 하자성혜)

by 까마귀마을 2023. 5. 1.

 

桃李不言 下自成蹊(도리불언 하자성혜)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자두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꽃과 열매로 인해) 그 밑으로 길이 저절로 생긴다.

 

司馬遷(사마천)이 지은 史記(사기)李將軍列傳(이장군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덕이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그 아래로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인다”는 뜻으로 지도자가 갖춰야할 덕목을 말한다"

이광 (李廣)은 (한)나라 (무제)때의 무인으로 농서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예, 특히 활쏘기에 뛰어났으며 힘이 세고 몸이 빨라  (흉노)들은 그를 (한)나라의 날아다니는 장수라는 이름으로 (한비장군)이라 불렀다. 흉노가 침입해 왔을 때마다 그는 흉노를 격퇴 하였고 그 후로 자주 전공을 세워 북쪽 변경의 태수가 되었다.  흉노는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이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감히 침공해 오지 못했다. 그의 용병은 알기 쉬웠으며, 부하를 사랑하였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행군 중 물이나 풀이 있으면 부대를 쉬게 하고, 소수의 정찰병을 보낼 뿐이었다.

기원전 121년, 4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했을 때 4만의 흉노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는 부하에게 명하여 원형의 진을 만들게 하고 자기도 강궁을 가지고 적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져 감으로 부하들은 당황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적의 부장을 쏘아 쓰러뜨렸기 때문에 흉노는 두려워서 근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진영을 굳게 지켜 원군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선전했으나 부하를 많이 잃어 후(候)에 봉해지지 않았다. 뒤에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이 출진할 때 종군할 것을 원했으나 무제(武帝)는 그의 노령을 염려했다. 그러나 재삼 요청하므로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이광을 위청의 한 부장으로 임명했다. 위청은 명령대로 그를 우장군으로 종군케 하고, 동쪽 길을 가게 하여 막북(漠北)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광은 도중에 길을 잃는 등 애로가 많아 기한 안에 당도하지 못했다. 흉노에게 애먹고 있던 위청은 이광을 의심하고, 무제에게 그를 벌하라고 상주했다. 그는 모든 죄는 자기에게 있다며 부하를 감싸고 병사로 돌아와 “60이 넘어 심판을 받는 치욕은 견딜 수 없다”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장병은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이광(李廣)을 적을 만나면 용감하였고 병졸들 에게는 인애로왔으며 그의 호령은 명쾌하여 부하 장졸들이 심복했다.고 적으며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그를 절찬했다'.

 

太史公曰 傳曰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 其李將軍之謂也. 余睹李將軍 悛悛如鄙人 口不能道辭. 及死之日 天下知與不知 皆爲盡哀. 彼其忠實心, 誠信於士大夫也.  諺曰  桃李不言 下自成蹊. 此言雖小 可以諭大也.

 

(태사공왈 전왈 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불정 수령불종. 기이장군지위야. 여도이장군 전전여비인 구불능도사. 급사지일 천하지여불지 개위진애. 피기충실심, 성신어사대부야. 언왈 도리불언  하자성혜차언수소 가이유대야).

 

태사공이 말했다. 옛 책에 이르기를 자신의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더라도 행하고, 자신의 몸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을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이장군을 이르는 말이다내가 이장군을 보건대, 투박하니 시골사람 같고 입으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하지만 그가 죽는 날 온 세상의 그를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모두 다 애도를 했다. 바로 그의 충실한  마음이 사대부에게 신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복숭아나무나 오얏나무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밑에는 절로 길이 생긴다고 했다. 이 말은 비록 간략한 것이지만, 그의 큰 덕에  비유할수 있을 것이다.

댓글